마리 앙투아네트 궁정 회고록
EP.03. 결혼 축하 폭죽이 부른 비극
"베르사유에서 출발해 쿠르 라 렌 거리를 따라오던 어린 왕세자비는, 기쁨에 들떠 화려하게 단장한 채 백성들의 축하를 직접 보고자 했다. 그러나 그녀는 끔찍한 광경 앞에서 망연자실해 눈물에 잠긴 채 그곳을 떠나야 했다. 이 비극적인 시작은, 가스너의 불길한 예언을 떠올리게 하는 듯했다." 마담 캉팡, 회고록 중에서

빈에서 들었던 한 점쟁이의 말
회고록의 첫 부분에서 캉팡은 한 가지 일화를 기록한다. 마리 앙투아네트가 프랑스로 떠나기 얼마 전, 빈에서 가스너라는 사람의 점괘를 보았다는 이야기다. 그가 어린 황녀에게 무어라 말했는지 정확한 내용은 전해지지 않는다. 다만 그 말 속에 어떤 불길한 그림자가 있었다는 사실만이 남아 있다.
여제 마리아 테레지아는 이런 종류의 이야기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녀는 합리적이고 행정적인 통치자였다. 그러나 어머니의 마음 한편에는, 막내딸을 그토록 먼 나라로 보내는 일에 대한 막연한 불안이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캉팡이 회고록에서 이 점쟁이 이야기를 굳이 첫머리에 배치한 데에는 이유가 있다. 그녀는 결혼식이라는 가장 영광스러운 사건이 어떻게 비극의 첫 장면이 되었는지를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불길한 전조', 그 진부한 표현이 이 한 여자의 삶에서는 결코 진부하지 않았음을 캉팡은 거듭 강조한다.
5월 30일 밤, 파리의 빛과 불
1770년 5월 16일 베르사유에서 결혼식이 끝난 뒤, 프랑스 전역은 축하 분위기에 잠겨 있었다. 그러나 정작 결혼 행사의 클라이맥스는 베르사유가 아니라 파리에서 열리게 되어 있었다. 5월 30일 밤, 파리시 당국이 주최하는 거대한 축하 폭죽 행사였다.
장소는 파리의 가장 새로운 광장, 루이 15세 광장이었다. 오늘날 우리가 콩코르드 광장이라고 부르는 바로 그곳이다. 1763년에 완공된 이 광장은 당시 파리의 자랑이었다. 한가운데에는 루이 15세의 거대한 기마상이 서 있었고, 광장 주변으로는 우아한 신고전주의 건물들이 막 들어서고 있었다.
파리시는 이날 행사를 위해 막대한 예산을 들였다. 광장 한편에 거대한 목조 가설물을 세웠고, 그 위에 수천 발의 폭죽을 장전해 두었다. 광장 전체에 등불을 켜고, 임시 카페와 가판대를 설치했다. 파리뿐 아니라 인근 지역에서도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그 밤 광장에 모인 사람은 적게 잡아도 수십만 명, 많게는 50만 명에 이르렀을 것으로 추정된다.
폭죽 행사는 처음 30분 정도는 성공적이었다. 화려한 빛이 5월 밤하늘을 수놓았고, 군중은 환호했다. 그러나 어느 순간, 목조 가설물 한쪽에서 작은 불씨가 일어났다. 폭죽 중 하나가 잘못 발사되어 가설물 자체에 떨어진 것이었다.
처음에는 작은 불꽃이었지만, 가설물에는 아직 발사되지 않은 폭죽이 가득 차 있었다. 불은 순식간에 번졌고, 장전된 폭죽들이 사방으로 폭발하기 시작했다. 광장은 더 이상 축제의 공간이 아니었다. 불꽃이 쏟아지는 함정이 되어 있었다.

좁아진 출구, 짓밟힌 사람들
광장에 모인 군중은 본능적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문제는 출구였다. 광장 주변의 도로들은 행사를 위해 일부 차단되어 있었고, 가장 큰 출입구 가운데 하나인 루아얄 거리(Rue Royale) 방향으로 사람들이 한꺼번에 몰렸다.
그날 밤의 진짜 비극은 화재 그 자체가 아니었다. 화재는 잠시 후 진압되었다. 비극은 도망치는 군중 사이에서 일어났다.
루아얄 거리는 당시 한창 공사가 진행 중이었다. 거리 한복판에 깊은 도랑이 파여 있었고, 그 도랑을 가리는 임시 가림판이 설치되어 있었다. 어둠 속에서 도망치던 사람들은 그 도랑을 보지 못하고 그대로 떨어졌다. 뒤에서 밀려오는 사람들은 앞 사람이 떨어진 것을 모른 채 계속 밀어붙였다. 도랑은 곧 사람들로 가득 찼고, 그 위로 또 다른 사람들이 쓰러졌다.
설상가상으로, 광장 주변에서는 일부 마차 운전수들이 군중 속을 가르며 거칠게 달려가기 시작했다. 손님을 태우고 빨리 빠져나가려는 욕심에 사람들을 향해 채찍을 휘둘렀다. 짓밟힌 사람들 사이로 마차 바퀴가 지나갔다.
그리고 또 다른 무리가 있었다. 혼란을 틈탄 소매치기와 강도들이었다. 그들은 쓰러진 사람들의 주머니를 뒤지며, 죽어가는 이들로부터 시계와 지갑을 빼앗아 갔다. 살아남으려 발버둥치던 사람들의 비명, 도랑 아래에서 들려오는 신음, 그리고 그 모든 것 위로 떨어지는 마지막 폭죽의 잔불.
다음 날 아침, 광장과 주변 거리에서 수습된 시신은 공식 기록만으로 132명이었다. 그러나 실제 사망자는 그보다 훨씬 많았을 것이라는 추정이 지배적이다. 어떤 기록은 800명 이상이 죽었다고 전한다. 부상자는 셀 수도 없었다.
마차 안의 신부
마리 앙투아네트는 그 밤 베르사유에서 출발해 파리로 향하고 있었다. 결혼 축하 행사의 정점이 될 폭죽을 직접 보기 위해서였다. 옆에는 남편인 왕세자 루이 오귀스트가 함께 있었다. 두 사람은 쿠르 라 렌, 즉 센강을 따라 이어지는 가로수 길을 통해 파리로 들어오고 있었다.
마차가 광장 가까이 다가갔을 때, 그들은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알아차렸다. 멀리서 비명 소리가 들렸고, 도망쳐 오는 사람들의 무리가 마차 옆을 스쳐 지나갔다. 한 사람은 피를 흘리고 있었고, 또 한 사람은 잃어버린 자식의 이름을 소리쳐 부르고 있었다.
캉팡은 회고록에서 이 순간을 비교적 짧게 묘사한다. 그러나 그 짧음이 오히려 무게를 더한다. "기쁨에 들떠 화려하게 단장한 채" 백성들의 축하를 보러 가던 어린 왕세자비가, "끔찍한 광경 앞에서 망연자실해 눈물에 잠긴 채" 발길을 돌렸다는 그 한 문장.
마차는 곧 방향을 돌렸다. 두 사람은 베르사유로 돌아왔다. 그날 밤 마리 앙투아네트가 무슨 말을 했는지에 대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다만 그녀가 며칠 동안 거의 식사를 하지 못하고, 잠도 제대로 자지 못했다는 시녀들의 증언이 전해진다.
후일 어머니 마리아 테레지아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녀는 그날 자신의 마음을 짧게 적었다. 자신의 결혼식을 축하하러 나온 사람들이 그토록 끔찍한 일을 당했다는 사실이 너무도 견디기 힘들다고. 그리고 그 책임이 자신에게 있다는 느낌을 떨칠 수 없다고.
자선이라는 답
며칠 뒤, 마리 앙투아네트와 루이 오귀스트는 한 가지 결정을 내렸다. 두 사람은 자신들이 받은 한 달 치 용돈 전액을 희생자 가족들에게 기부했다. 어린 왕세자비에게 한 달 용돈은 결코 적은 금액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녀가 새 옷을 짓고, 보석을 사고, 도박에 쓰던 모든 사적 자금이었다.
그녀가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이런 끔찍한 사고 앞에서, 사치는 너무도 무의미하게 느껴집니다."
캉팡은 이 일화를 회고록에서 자랑스럽게 기록한다. 그녀의 시선에서 어린 왕세자비의 이런 반응은 진심에서 우러난 것이었다. 화려한 베르사유의 무대에서 자란 다른 왕족들과 달리, 마리 앙투아네트는 비극을 비극으로 받아들일 줄 아는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자선의 행위가 곧 그녀의 모든 사치를 면죄해 주지는 않았다. 캉팡 자신도 알고 있었던 사실이다. 20년 뒤, 마리 앙투아네트는 다시 한번 거대한 군중 앞에 서게 된다. 그러나 그때 그 군중은 그녀를 축하하기 위해 모인 사람들이 아니었다.
한 시대의 첫 신호
역사가들은 1770년 5월 30일의 비극을 종종 한 시대의 작은 신호로 읽는다. 그것은 단순한 화재 사고가 아니라, 18세기 후반 프랑스 사회의 여러 균열이 한꺼번에 드러난 사건이었다.
먼저 행정의 무능이 드러났다. 파리시는 수십만 명이 모일 행사를 준비하면서도, 비상시 군중을 분산시킬 동선조차 제대로 마련하지 않았다. 도시 한복판의 공사 도랑을 가리는 임시 가림판 외에는 어떤 안전 장치도 없었다.
다음으로 시민들 사이의 무질서한 풍경이 드러났다. 마차 운전수들의 폭력, 강도들의 약탈은 어디까지나 일부의 행동이었지만, 그것이 가능했다는 사실 자체가 도시의 분위기를 말해 준다. 7년 전쟁 이후 깊어진 빈부 격차, 일자리를 찾지 못한 채 파리로 흘러든 빈민층, 그들 사이에 누적된 불만이 이런 순간에 갑작스럽게 표면으로 떠올랐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왕실의 명예가 흔들리는 첫 신호가 있었다. 본래 이 행사는 어린 왕세자비의 결혼을 축하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 축하의 무대에서 수백 명이 죽었다. 사람들의 무의식 속에서 이 두 가지는 연결되기 시작했다. 어린 오스트리아 여자가 도착한 이래로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난다, 라는 식의 막연한 정서가 그날 밤 파리의 거리에 처음 자리를 잡았다.
캉팡은 이 모든 것을 직접적으로 분석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녀의 회고록 첫 부분에서 이 사건이 차지하는 자리, 그리고 "비극적인 시작"이라는 표현은 이 모든 의미를 함축한다.
캉팡은 이렇게 기록했지만
캉팡은 5월 30일의 비극을 마리 앙투아네트 개인의 운명과 직접적으로 연결한다. 어린 왕세자비의 결혼식 축하 자리에서 일어난 일이므로, 그것은 곧 그녀의 미래에 대한 예언이라는 식이다. 그러나 후대의 사회사 연구자들, 특히 18세기 파리 도시사를 연구한 다니엘 로슈 같은 학자들은 이 사건을 좀 더 구조적으로 해석한다. 그들이 강조하는 것은 1770년 파리가 이미 통제하기 힘든 거대 도시였다는 사실이다. 인구는 60만 명을 넘어섰지만, 도시 행정은 여전히 17세기의 틀에 머물러 있었다. 안전 규정도, 도로 정비도, 빈민 구제도 충분하지 않았다. 5월 30일의 비극은 어린 왕세자비의 불운 때문이 아니라, 한 도시의 구조적 한계가 우연한 화재 한 점과 만나 폭발한 결과였다. 그러나 당시 사람들은 그렇게 보지 않았다. 그리고 후일 마리 앙투아네트를 비난할 시간이 왔을 때, 누군가는 그 밤을 떠올리며 "처음부터 그 여자에게는 죽음이 따라다녔다"라고 말하게 된다.
다음 회 예고
결혼식 이후 4년이 흐른다. 1774년 5월, 베르사유의 분위기는 갑작스럽게 바뀐다. 루이 15세가 천연두로 쓰러진 것이다. 그의 죽음과 함께, 열아홉 살의 마리 앙투아네트는 갑자기 프랑스의 왕비가 된다. 준비되지 않은 즉위였다. "신이여, 우리를 보호하소서. 우리는 너무 어립니다." 새 왕과 왕비가 그날 밤 함께 무릎을 꿇고 올렸다는 이 기도를, 캉팡은 잊지 못하고 기록으로 남겼다.
다음 회에서는 1774년 5월의 베르사유, 즉위의 순간을 따라가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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