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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거장의 초상

칼라스, 제12편 | 칼라스가 우리에게 남긴 것

by 책으로떠나는여행 2026. 5. 8.

칼라스, 목소리로 산 여자 : 마지막 이야기


1977년 9월 16일 아침, 파리. 브루나가 문을 두드렸다. 대답이 없었다. 마리아 칼라스는 그날 아침 조용히 세상을 떠났다. 쉰세 살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그녀가 남긴 목소리들이 지금도 세계 어딘가에서 울리고 있다. 그리고 그 목소리를 처음 듣는 사람이 지금 이 순간에도 어딘가에 있다.


마지막 날 아침

1977년 9월 16일.
파리는 가을로 접어들고 있었다. 조르주 망델 거리의 아침.
브루나가 평소처럼 마리아의 방으로 향했다. 문을 두드렸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다시 두드렸다. 역시 대답이 없었다.
브루나가 문을 열었다.
마리아는 침대 위에 있었다. 그 자리에서 심장이 멈추어 있었다.
의사가 왔다. 사인은 심장마비였다. 쉰세 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소프라노 중 한 명이 파리의 아파트에서, 가장 가까운 사람인 하우스키퍼만이 알아챈 채로 세상을 떠났다.
무대 위에서 수천 명의 청중을 압도했던 목소리의 주인이 소리 없이 사라졌다.
그것이 마리아 칼라스의 마지막이었다.


마리아 칼라스 사망

세상이 멈춘 날

마리아 칼라스의 죽음이 알려졌을 때, 오페라 세계가 멈췄다.
밀라노, 런던, 뉴욕, 아테네. 세계의 오페라 극장들이 애도를 표했다. 라 스칼라는 공연을 취소했다. 코번트 가든에 조기가 걸렸다.
뉴욕 타임스의 부고 기사 제목은 이러했다.
"마리아 칼라스, 53세로 파리에서 심장마비로 사망. 오페라 역사를 바꾼 소프라노."
이탈리아의 오페라 평론가 피에로 로스시(Piero Rossi)는 이렇게 썼다.
"칼라스가 떠났다. 그러나 오페라는 칼라스가 오기 전과 같은 오페라가 아니었다. 그리고 이제 칼라스가 간 뒤에도 다시는 같아지지 않을 것이다."
지휘자 레나르도 베르나르디니(Leonardo Bernardini)는 리허설 중에 소식을 들었다. 오케스트라 앞에서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잠시 서있었다가 말했다.
"오늘 리허설을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위대한 예술가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재가 되어, 에게 해로

마리아의 장례는 파리에서 치러졌다.
화장(火葬)이었다. 마리아가 원했던 것이었다. 유해는 파리의 **페르 라셰즈 묘지(Cimetière du Père-Lachaise)**의 납골당에 안치되었다.
쇼팽이 묻히고, 오스카 와일드가 묻히고, 에디트 피아프가 묻힌 그 묘지에. 파리가 사랑한 예술가들이 모여있는 그곳에 마리아도 있게 되었다.
그러나 이야기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1979년, 마리아의 유해가 납골당에서 도난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세상을 떠난 뒤에도 드라마가 따라다닌 것이었다. 유해는 이후 회수되었다.
그리고 1979년 봄, 마리아의 유해는 에게 해에 뿌려졌다.
마리아 자신이 원한 것이었다. 그리스의 바다. 어머니의 나라. 뉴욕에서 태어났지만 아테네에서 음악을 배우고, 그리스의 피를 가진 여인.
에게 해의 파도 위에 마리아가 뿌려졌다.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그리고 동시에 영원한 귀환이었다.


 

칼라스 이전과 칼라스 이후

마리아 칼라스가 오페라 역사에 남긴 것을 이야기하기 전에, 하나의 사실을 먼저 말해야 한다.
오페라 역사에는 칼라스 이전과 칼라스 이후가 있다.
칼라스 이전의 오페라에서 소프라노의 임무는 아름다운 소리를 내는 것이었다. 오케스트라보다 큰 성량, 홀을 가득 채우는 음색, 최고음에서의 광채. 기술적 완벽함이 위대한 소프라노의 기준이었다.
칼라스가 등장하면서 그 기준이 달라졌다.
소리의 크기가 아니라 표현의 깊이. 기술적 완벽함이 아니라 예술적 진실성. 음표를 정확하게 부르는 것이 아니라 그 음표 안에 있는 인물을 살아내는 것.
그것이 칼라스가 오페라에 가져온 혁명이었다.
오페라 평론가 콘래드 오스본(Conrad Osborne)은 이렇게 말했다.
"칼라스는 단순히 위대한 소프라노가 아니었다. 그녀는 오페라가 무엇이 될 수 있는지를 다시 정의한 사람이었다. 그 정의는 지금도 유효하다."


잊혀진 오페라들을 살려낸 것

칼라스의 음악적 유산 중 가장 구체적이고 가장 지속적인 것이 있다.
벨칸토 레퍼토리의 부활.
칼라스가 등장하기 전, 도니제티의 「안나 볼레나」는 60년 이상 무대에서 사라져 있었다. 벨리니의 「청교도」, 「몽유병의 여인」은 거의 공연되지 않았다. 케루비니의 「메데아」는 악보만 있고 실제 공연은 없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칼라스가 이 오페라들을 무대로 가져왔다. 「안나 볼레나」를 1957년 라 스칼라에서 부활시켰다. 「메데아」를 20세기 청중에게 처음으로 들려주었다. 「피라타」, 「폴리우토」, 「베스탈레」. 이름조차 낯선 오페라들이 칼라스를 통해 다시 살아났다.
그리고 그 부활이 칼라스 한 사람으로 끝나지 않았다.
칼라스가 열어놓은 길 위에서 다른 소프라노들이 걸었다.
조안 서덜랜드(Joan Sutherland). 호주 출신의 콜로라투라 소프라노로, 칼라스가 부활시킨 벨칸토 레퍼토리를 더욱 확장했다. 서덜랜드 없이는 도니제티의 여러 오페라들이 지금처럼 공연되지 않았을 것이다.
몽세라트 카바예(Montserrat Caballé). 스페인 소프라노로, 칼라스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아 벨칸토 오페라의 서정적 아름다움을 극한까지 발전시켰다.
체칠리아 바르톨리(Cecilia Bartoli). 이탈리아 메조소프라노로, 18세기 오페라를 오늘날 청중에게 살아있게 전달하는 사람. 그 전통의 뿌리에 칼라스가 있다.
이 소프라노들은 칼라스를 모방하지 않았다. 각자의 방식으로 노래했다. 그러나 그들 모두 칼라스가 보여준 가능성, 벨칸토 기술과 극적 표현력이 하나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시작했다.
그것이 칼라스가 남긴 가장 큰 선물이었다.


마리아 칼라스는 1977년 9월 16일 파리에서 사망했다.

음반이라는 유산

칼라스는 카라얀처럼 수백 장의 음반을 남기지 않았다.
그러나 칼라스가 남긴 음반들은 그 수보다 훨씬 큰 무게를 가진다.
EMI와 도이치 그라모폰을 통해 녹음한 공식 음반들. 세라핀, 데 사바타, 카라얀, 프레트르와 함께 만든 녹음들. 그리고 라 스칼라, 코번트 가든, 메트에서의 실황 녹음들.
이 음반들 중 가장 빛나는 것들로 꼽히는 것들이 있다.
1953년 「토스카」 — 빅토르 데 사바타 지휘, 라 스칼라. 녹음 역사상 가장 위대한 오페라 녹음 중 하나로 꼽힌다. 칼라스의 토스카와 고비의 스카르피아가 만나는 2막의 긴장은 반세기가 지난 지금도 듣는 사람을 얼어붙게 만든다.
1954년 「노르마」 — 세라핀 지휘, 라 스칼라. '정결한 여신(Casta Diva)'의 이 녹음은 지금도 노르마의 대표 음반으로 불린다. 칼라스가 노르마를 부를 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이 음반이 가장 선명하게 보여준다.
1955년 「람메르무어의 루치아」 — 카라얀 지휘, 베를린 RIAS 실황. 광란의 장면에서 칼라스의 벨칸토 기술과 극적 표현력이 동시에 정점에 달하는 녹음.
1964년 「카르멘」 — 프레트르 지휘, 파리 녹음. 칼라스의 마지막 주요 스튜디오 녹음. 카르멘이라는 인물의 자유로움과 비극을 칼라스만이 표현할 수 있는 방식으로 담았다.
이 음반들은 칼라스가 세상을 떠난 뒤에도 계속 팔렸다. 스트리밍 시대가 되면서 더 많은 사람들이 칼라스의 목소리를 듣게 되었다. 음반 가게가 사라진 시대에도 칼라스의 목소리는 더 넓게 퍼졌다.
칼라스가 옳았다. 녹음은 목소리를 시간 밖으로 데려간다.


오페라가 아닌 세계에서의 칼라스

칼라스의 유산은 오페라 세계에만 머물지 않았다.
1969년, 영화감독 피에르 파올로 파솔리니(Pier Paolo Pasolini)가 칼라스를 영화에 캐스팅했다. 유리피데스의 「메데아」를 원작으로 한 영화. 노래가 없는 영화에서 칼라스는 메데아를 연기했다.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칼라스가 단순히 노래하는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인물을 살아내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목소리 없이도 메데아의 분노와 상처를 몸과 눈으로 표현할 수 있었다.
파솔리니는 칼라스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칼라스는 고대 세계의 여인이다. 현대는 그녀에게 맞지 않았다. 그녀가 메데아를 연기할 때, 나는 그것이 연기라는 것을 잊었다."
그 영화 이후에도 칼라스는 문화의 아이콘으로 계속 살아남았다.
패션, 문학, 시각 예술. 칼라스의 이름이 오페라 이외의 영역에서도 상징이 되었다. 페미니즘의 아이콘으로, 비극적 아름다움의 상징으로, 완전함을 향해 모든 것을 건 예술가의 전형으로.
2017년에는 다큐멘터리 「마리아 칼라스(Maria by Callas)」가 만들어졌다. 칼라스가 직접 남긴 인터뷰들과 편지들로 구성된 이 다큐멘터리는 칼라스를 새로운 세대에게 알렸다.
2024년에는 안젤리나 졸리 주연의 극영화 「마리아(Maria)」가 넷플릭스를 통해 전 세계에 공개되었다. 그 영화가 나왔을 때, 오페라를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사람들이 칼라스의 이름을 처음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 중 일부가 칼라스의 음반을 찾아들었다.
그것이 전설이 살아남는 방식이다.


영화 속 메데아로서의 칼라스

 


칼라스가 소프라노들에게 남긴 것

칼라스 이후 소프라노들은 달라진 세계에서 노래한다.
그 달라짐은 기술적인 것이기도 하고, 철학적인 것이기도 하다.
기술적으로, 칼라스가 부활시킨 벨칸토 레퍼토리가 오늘날 정기적으로 공연된다. 「안나 볼레나」, 「메데아」, 「람메르무어의 루치아」, 「노르마」. 이 오페라들이 세계의 주요 오페라 극장들에서 정기 레퍼토리가 된 것은 칼라스 덕분이다.
철학적으로, 오페라 가수는 이제 노래하는 사람이면서 동시에 연기하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진다. 칼라스 이전에는 그것이 당연하지 않았다.
안나 네트렙코(Anna Netrebko), 디아나 담라우(Diana Damrau), 르네 플레밍(Renée Fleming). 오늘날 세계 최고의 소프라노들은 모두 칼라스가 정의한 기준 위에 서있다. 그들은 칼라스처럼 노래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 모두 칼라스가 열어놓은 문을 통해 왔다.
한 번은 어느 소프라노에게 물었다고 한다. "당신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소프라노가 누구입니까?" 그녀의 답은 이러했다.
"칼라스입니다. 직접적인 영향이 아니라 간접적인 영향입니다. 칼라스가 오페라가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정의했고, 그 정의가 내가 음악을 배울 때 이미 거기 있었습니다. 나는 칼라스의 목소리를 따라 하려 한 것이 아니라, 칼라스가 보여준 그 가능성을 향해 나아가려 했습니다."


마리나 아브라모비치와 칼라스

칼라스의 유산이 현대 예술의 다른 영역에서 살아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가 있다.
마리나 아브라모비치(Marina Abramović).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퍼포먼스 아티스트 중 한 명. 그녀가 2020년에 「칼라스의 일곱 죽음들(7 Deaths of Maria Callas)」이라는 퍼포먼스를 만들었다.
칼라스가 연기한 일곱 개의 오페라 인물들이 죽는 장면들을 현대적 퍼포먼스로 재해석한 것이었다. 비올레타의 죽음, 노르마의 죽음, 루치아의 광란. 그것들을 아브라모비치가 자신의 몸으로 살아냈다.
아브라모비치는 이렇게 말했다.
"칼라스는 무대에서 죽는 방법을 가르쳐준 사람이다. 노래로, 목소리로, 몸으로 완전히 소멸하는 것. 그것이 예술이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퍼포먼스 아티스트가 오페라 소프라노에게서 배운다. 그 연결이 칼라스의 유산이 얼마나 넓은지를 보여준다.


칼라스를 이해하기 위한 세 마디

칼라스를 이야기할 때 가장 자주 인용되는 그녀 자신의 말들이 있다.
첫 번째.
"나는 천사도 아니고 악마도 아니다. 나는 여인이고 진지한 예술가다. 그 두 가지로 판단받고 싶다."
두 번째.
"음악을 가르칠 때 가장 먼저 가르쳐야 하는 것은 어떻게 듣는가이다. 노래하기 전에 들어야 한다."
세 번째.
"나는 내가 살아온 곳에서 노래한다."
이 세 마디 안에 칼라스의 전부가 있다.
여인이고 예술가인 것. 듣는 것을 먼저 배우는 것. 그리고 삶이 노래가 되는 것.
그 세 가지가 마리아 칼라스를 만들었고, 마리아 칼라스가 우리에게 남긴 것이었다.


마리아 칼라스의 콘서트, 1959년 7월, 암스테르담.

칼라스를 처음 듣는 사람에게

어딘가에 지금 이 순간 칼라스의 목소리를 처음 듣는 사람이 있다.
스마트폰으로 검색을 하다가, 유튜브 알고리즘이 추천해준 영상을 클릭하다가, 친구의 소개로, 아니면 영화 「마리아」를 보고 나서.
그 사람이 첫 음을 듣는 순간, 무언가를 느낄 것이다.
당황함. 낯섦. 그리고 그 낯섦 뒤에 오는 압도됨.
이 목소리는 무엇인가. 왜 이렇게 들리는가. 왜 내 심장이 이렇게 반응하는가.
그 질문들이 그 사람을 칼라스의 세계로 이끌 것이다. 음반을 찾게 하고, 더 많이 듣게 하고, 오페라가 무엇인지를 알게 할 것이다.
칼라스가 세상을 떠난 지 수십 년이 지났다. 그러나 칼라스의 목소리를 처음 듣는 사람은 지금도 생겨난다. 앞으로도 생겨날 것이다.
그것이 예술가의 불멸이다. 육신이 사라져도 작품이 남는 것. 그리고 그 작품이 새로운 사람들을 계속 만나는 것.
마리아 칼라스는 그 불멸을 얻었다.


완전히 살아내는 것에 대하여

이 시리즈를 마무리하면서, 하나의 질문을 남기고 싶다.
칼라스의 삶이 우리에게 묻는 것이 있다.
완전히 살아내는 것이 가능한가.
칼라스는 노래에 완전히 살았다. 사랑에도 완전히 살았다. 그 완전함이 그녀를 위대하게 만들었고, 동시에 그것이 그녀를 가장 취약하게 만들었다.
절반만 살았다면 어땠을까. 음악에 절반, 사랑에 절반. 오나시스를 만나지 않았다면. 메네기니 곁에 있었다면. 목소리를 보호하기 위해 공연을 줄였다면.
칼라스는 더 오래 살았을 것이다. 더 안전한 삶을 살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 칼라스는 칼라스가 아니었을 것이다.
완전히 살아내는 것. 음악에 완전히, 사랑에 완전히, 고통에 완전히. 그 완전함이 칼라스의 목소리 안에 있었다. 그 목소리가 우리의 심장을 두드리는 것은 그 완전함 때문이었다.
반쪽 삶이 반쪽 예술을 만든다. 칼라스의 완전한 삶이 완전한 예술을 만들었다. 그 예술이 지금도 살아있다.
"나는 무대에 살고, 사랑에 살았다."
토스카의 아리아 한 구절이 칼라스 자신의 고백이 된다.
Vissi d'arte, vissi d'amore.
예술에 살고, 사랑에 살았다.
그것이 마리아 칼라스가 우리에게 남긴 것이고, 남긴 전부였다.


시리즈를 마치며

12편에 걸쳐 마리아 칼라스의 이야기를 함께 걸어왔습니다.
뉴욕의 이민자 아파트에서 시작하여, 아테네의 전쟁을 지나고, 이달고의 레슨실에서 벨칸토를 배우고, 베로나에서 메네기니를 만나고, 라 스칼라를 정복하고, 세계를 정복했습니다. 테발디와 라이벌 관계를 겪었고, 체중을 감량하고, 오나시스를 사랑하고, 목소리를 잃고, 파리의 아파트에서 혼자 있었습니다. 그리고 1977년 9월, 세상을 떠났습니다.
마리아 칼라스는 완전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결함도 있었고, 잘못된 선택도 했으며, 상처를 주기도 했고, 상처를 받기도 했습니다. 그것이 인간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불완전한 인간이 만든 것이 있었습니다. 목소리. 그리고 그 목소리로 표현한 것들. 비올레타의 사랑, 노르마의 분노, 루치아의 광란, 토스카의 저항.
그것들이 지금도 남아있습니다.
오늘 밤, 칼라스의 음악을 틀어놓으시길.


🎵 마지막으로 감상곡 : 칼라스의 전부

오늘은 칼라스의 목소리가 어떤 것이었는지를 가장 잘 보여주는 세 곡을 골랐습니다.


① 벨리니 「노르마」 중 '정결한 여신'

칼라스, 세라핀 지휘, 밀라노 라 스칼라 (1954년)
칼라스의 시작이자 끝. 노르마라는 역할이 칼라스를 만들었고 칼라스가 노르마를 만들었다. 이 녹음에서 칼라스가 처음 음을 낼 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들어보시길. 그것이 칼라스가 무엇인지를 설명하는 가장 짧은 답이다.

 


② 푸치니 「토스카」 중 '노래에 살고 사랑에 살고(Vissi d'arte)'

칼라스, 데 사바타 지휘, 밀라노 라 스칼라 (1953년)
칼라스의 인생 전체를 담은 아리아. 토스카가 신에게 묻는다. 나는 평생 예술에 살고 사랑에 살았는데 왜 이런 고통이 왔는가. 그 질문이 칼라스 자신의 것이기도 했다. 이 녹음을 들을 때, 토스카와 칼라스가 하나가 되는 순간이 들린다.

 


③ 벨리니 「청교도」 중 '나에게 이르기를(Qui la voce)'

칼라스, 세라핀 지휘 (1953년 녹음)
버림받은 여인 엘비라가 잃어버린 사랑을 부르는 아리아. 칼라스가 이 아리아를 부를 때, 목소리 안에 있는 것이 엘비라만이 아니다. 어머니에게 받지 못한 사랑을 찾았던 소녀, 오나시스에게 버림받은 여인, 목소리를 잃어가는 소프라노. 그 모든 것이 한 목소리 안에서 울린다.

 


세 곡을 듣고 나면 칼라스가 어떤 사람이었는지가 말보다 더 선명하게 느껴질 것입니다.
그것이 음악이 말보다 더 정확할 때가 있다는 것을 칼라스가 보여주는 방식입니다.


「칼라스, 목소리로 산 여자」 시리즈 완결.
12편에 걸쳐 함께해 주신 모든 분들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마리아 칼라스가 남긴 목소리들이 여러분의 삶 어딘가에 오래 머물기를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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