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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거장의 초상

칼라스, 제8편 | 체중 감량과 목소리의 변화 : 아름다움의 대가

by 책으로떠나는여행 2026. 5. 2.

칼라스, 목소리로 산 여자 : 여덟 번째 이야기


세상에는 두 종류의 대가가 있다. 얻기 위해 치르는 대가와, 얻고 나서야 알게 되는 대가. 마리아 칼라스는 아름다움을 얻었다. 그리고 나중에야 알았다. 그 아름다움이 무엇을 가져가고 갔는지를.


90킬로그램의 소프라노

1952년의 마리아 칼라스를 상상해보시길.
라 스칼라를 정복했다. 이탈리아 음악계의 중심에 섰다. 유럽 전역에서 초청이 쏟아졌다. 비평가들이 그녀의 이름 앞에 수식어를 붙이기 시작했다. 세기의 소프라노, 벨칸토의 부활자, 라 디비나.
그 모든 것을 얻은 소프라노의 체중이 90킬로그램에 달했다.
오페라 세계에서 그것이 문제가 되지 않았다. 목소리가 전부인 세계에서 외모는 부차적이었다. 역사적으로 위대한 소프라노들 중 체중이 많이 나가는 경우가 드물지 않았다. 오히려 풍부한 체형이 목소리의 공명에 도움이 된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그러나 마리아는 달랐다.
마리아는 무대를 다르게 보았다. 오페라는 음악만이 아니었다. 드라마였다. 인물이 살아있어야 했다. 비올레타가 폐결핵으로 죽어가는 마지막 장면에서, 청중은 그 죽음을 믿어야 했다. 노르마가 달에게 기도할 때, 그 여사제가 실제로 신성한 존재처럼 보여야 했다. 메데아가 분노로 타오를 때, 그 분노가 몸 전체에서 느껴져야 했다.
90킬로그램의 몸으로 그것이 가능한가.
마리아는 스스로에게 그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1952년 이전 체중 감량 전 칼라스

결심의 순간

1953년 어느 날, 피렌체에서 있었던 일이 전해진다.
지휘자 툴리오 세라핀과 테너 티토 고비(Tito Gobbi)와 함께 점심을 먹는 자리였다. 「람메르무어의 루치아」 녹음 중간의 휴식 시간이었다.
세라핀이 칼라스에게 말했다.
"마리아, 너무 많이 먹고 있어요. 체중이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칼라스가 반박했다.
"저는 그렇게 무겁지 않아요."
티토 고비가 조용히 끼어들었다.
"그러면 저기 식당 밖에 있는 저울로 한번 확인해보시지요."
칼라스는 저울에 올라섰다. 숫자를 보았다. 그리고 이후 한동안 말이 없었다고 고비는 회고했다.
그 날이 무언가의 시작이었는지, 아니면 이미 시작되어 있던 것에 하나의 계기가 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1953년부터 1954년 사이에 마리아의 몸이 급격히 달라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어떻게 30킬로그램이 사라졌는가

체중 감량의 방법에 대해서는 지금까지도 논쟁이 있다.
가장 널리 알려진 이야기는 촌충(tapeworm) 감염이다. 마리아가 의도적으로 또는 비의도적으로 촌충에 감염되어 그로 인해 급격한 체중 감소가 일어났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당시 이탈리아 언론에서 나왔고, 오랫동안 회자되었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확인된 사실이 아니다.
칼라스 자신은 이 이야기를 부정했다.
"촌충이라니요. 나는 그저 먹는 것을 줄이고, 더 많이 움직였습니다. 그것이 전부입니다."
또 다른 이야기는 엄격한 식이요법이었다. 칼라스가 특정 음식을 완전히 끊고, 칼로리를 극단적으로 제한했다는 것이다. 그리스 의사의 처방에 따른 다이어트였다는 버전도 있다.
어느 이야기가 사실인지는 지금도 명확하지 않다. 아마도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식이 제한, 스트레스, 극도로 바쁜 공연 스케줄로 인한 에너지 소모. 그 모든 것이 더해진 결과.
분명한 것은 결과였다.
1953년 초의 칼라스와 1954년 말의 칼라스는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2년 사이에 30킬로그램 이상이 사라졌다.


세상이 새로운 칼라스를 만났을 때

체중 감량 이후 마리아를 처음 본 사람들의 반응은 충격이었다.
여기 두 개의 신문 기사가 있다.
1952년의 기사: "칼라스는 위대한 목소리를 가진 소프라노다. 그러나 무대에서의 외모는 역할에 설득력을 더하는 데 한계가 있다."
1955년의 기사: "칼라스는 이제 목소리만큼이나 아름다운 소프라노가 되었다. 그녀가 무대에 등장하는 순간, 비올레타가 실제로 거기 있다는 것을 누구도 의심하지 않는다."
세상이 달라졌다.
패션 잡지들이 칼라스를 커버에 실기 시작했다. 1957년 「타임(Time)」 지가 칼라스를 표지로 선택했다. 음악 전문지가 아니라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시사 주간지가.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칼라스가 오페라 팬만의 아이콘을 넘어섰다는 것이었다.
패션 디자이너들이 칼라스에게 드레스를 입히고 싶어 했다. **크리스찬 디올(Christian Dior)**의 옷을 입은 칼라스, 에마누엘 웅가로(Emanuel Ungaro)의 드레스를 입은 칼라스. 그 사진들이 전 세계로 퍼졌다.
오나시스도 이 시기에 칼라스를 처음 만났다. 어쩌면 그것이 우연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칼라스는 아름다워졌다. 그리고 세상은 그 아름다움에 반응했다.

1955년 이후 날씬해진 칼라스

무대가 달라졌다

체중 감량이 칼라스의 무대에 가져온 변화는 외모만이 아니었다.
움직임이 달라졌다.
이전의 칼라스는 무대에서 주로 정면을 향해 서서 노래했다. 목소리가 전부인 시절의 방식이었다. 그러나 몸이 가벼워지면서 칼라스는 무대를 다르게 사용하기 시작했다.
비스콘티가 요구하던 세밀한 동선들을 더 자유롭게 소화할 수 있게 되었다. 돌아서고, 쓰러지고, 달려가고, 천천히 무릎을 꿇는 것. 그 동작들이 목소리와 하나가 되었다. 비올레타가 기침하며 쓰러지는 장면에서 칼라스의 몸이 실제로 쓰러졌다. 노르마가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는 순간 칼라스의 등이 실제로 굽었다.
청중은 그것을 보았다. 그리고 들었다. 몸과 목소리가 하나가 되는 것을.
비스콘티는 이렇게 말했다.
"체중 감량 이후의 칼라스는 완전히 다른 무대 예술가가 되었다. 이전에도 위대했지만, 이후에는 완전해졌다. 목소리와 몸이 하나의 악기가 된 것이다."
그것이 체중 감량이 칼라스의 예술에 가져온 것이었다. 단순히 아름다워진 것이 아니라, 표현의 도구가 완성된 것.


그러나 비평가들은 다른 것을 들었다

1954년, 1955년. 칼라스의 공연이 계속되었다.
그리고 1955년 후반부터, 일부 비평가들이 무언가 다른 것을 쓰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조심스러운 언급이었다.
"칼라스의 고음역에서 이전과 다른 무언가가 느껴진다. 안정감이 약해진 것인가, 아니면 새로운 표현의 방식인가. 아직 판단하기 이르다."
그러다 더 직접적인 비평이 나왔다.
"칼라스의 목소리가 변했다. 고음에서 흔들림이 있다. 피아니시모에서 이전의 완벽한 통제가 느껴지지 않는다."
음악학자들과 성악 전문가들 사이에서 논쟁이 시작되었다.
체중 감량이 칼라스의 목소리를 바꾸었는가.


목소리와 체중의 관계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성악의 생리학적 측면을 이해해야 한다.
소프라노의 발성은 복잡한 신체 기제를 통해 이루어진다. 폐에서 나오는 공기가 성대를 통과하고, 목, 구강, 비강의 공명강에서 울리고, 그 소리가 밖으로 나온다.
이 과정에서 복부와 흉곽의 근육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특히 고음을 낼 때, 이 근육들이 공기 흐름을 조절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체중, 특히 복부의 지방 조직이 이 근육들을 지지하는 역할을 한다는 주장이 있다.
체중이 급격히 줄면, 이 지지 구조가 달라진다. 근육이 새로운 상태에 적응하는 데 시간이 걸린다. 그 과정에서 발성의 안정성이 일시적으로 또는 영구적으로 달라질 수 있다.
소프라노 르네 플레밍(Renée Fleming)은 칼라스의 목소리 변화에 대해 이렇게 분석했다.
"체중 자체가 목소리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체중을 지지대로 사용하던 발성 방식이 있는데, 그 지지대가 갑자기 사라지면 다른 근육 기제를 발달시키지 않은 한 문제가 생길 수 있다."
또 다른 설명도 있었다.
테너 티토 고비는 다른 원인을 지목했다.
"칼라스의 목소리 변화는 체중 감량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 시기 칼라스가 소화한 공연의 양이 엄청났다. 한 시즌에 수십 번의 공연. 목소리는 근육이다. 쉬어야 한다. 쉬지 않으면 닳는다."


마리아 칼라스는 외국 신문에서 흥미로운 기사를 읽고 있다.

 

칼라스 자신은 무엇을 들었는가

주변의 비평가들과 음악학자들이 칼라스의 목소리 변화를 논의하는 동안, 칼라스 자신은 무엇을 느꼈는가.
칼라스는 자신의 목소리에 대해 누구보다 예민한 청중이었다. 리허설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듣고, 녹음 부스에서 플레이백을 들으며 수십 번 확인했다. 이달고에게 배운 청음 능력, 음악을 분석적으로 듣는 능력이 자신의 목소리에도 적용되었다.
칼라스는 변화를 알았다.
그러나 공개적으로 그것을 인정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인터뷰에서 목소리의 변화에 대한 질문이 나오면 칼라스는 회피하거나 반박했다.
"내 목소리는 성숙하고 있다. 성숙한 목소리는 젊은 목소리와 다른 것이다. 그것을 쇠퇴라고 부르는 사람들은 예술이 무엇인지 모른다."
그러나 사적인 자리에서는 달랐다는 증언이 있다.
메네기니는 회고록에서 이렇게 썼다.
"마리아는 공연 후 집에 돌아와서 때로 울었다. 목소리가 달라졌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다음 날 아침이면 다시 일어나 연습했다. 마리아는 포기하는 방법을 몰랐다."
포기하는 방법을 몰랐다는 그 말이 마리아의 전부를 담고 있었다.


1957년 : 전성기와 쇠퇴의 경계

1957년은 마리아 칼라스의 이름이 가장 널리 알려진 해이기도 했고, 동시에 어떤 의미에서는 내리막의 시작이기도 했다.
그해 10월 27일, 「타임」지가 칼라스를 표지에 실었다.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시사 주간지의 표지. 그것이 칼라스의 명성이 오페라를 넘어 세계적인 것이 되었음을 공식화했다.
같은 해, 칼라스는 전성기의 대표 음반들을 녹음했다. 도이치 그라모폰과 EMI에 남긴 녹음들 중 가장 빛나는 것들이 이 시기에 만들어졌다.
그러나 같은 해, 공연 현장에서는 다른 이야기도 나오기 시작했다.
목소리가 예전 같지 않은 날들이 있었다. 고음에서 안정감이 흔들리는 공연이 있었다. 어떤 날은 완벽했고, 어떤 날은 위태로웠다. 그 불안정함이 예측 불가능해졌다.
칼라스의 팬들은 두 진영으로 나뉘었다.
한쪽에서는 말했다. 목소리의 변화는 사실이지만, 표현의 깊이는 오히려 더 깊어졌다. 기술적 완벽함이 줄어든 자리에 더 인간적인 무언가가 들어왔다. 그것이 칼라스를 더욱 위대하게 만든다.
다른 쪽에서는 말했다. 위대한 소프라노의 기준은 목소리의 안정성이다. 그 안정성이 흔들린다면, 전성기가 지나가고 있는 것이다.
두 관점 모두 틀리지 않았다.


Maria Callas 1957

1958년 로마, 그리고 폭발

1958년 1월 2일.
로마 오페라 극장. 이탈리아 대통령 지오반니 그론키가 참석한 「노르마」 공연.
1막이 끝났다. 칼라스는 무대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2막 시작 전, 칼라스는 공연을 계속할 수 없다고 했다.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극장 측은 당황했다. 대통령이 객석에 있었다. 수천 명의 청중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칼라스는 움직이지 않았다.
"내 목소리는 거짓말을 할 수 없다. 오늘 밤 내가 줄 수 있는 것이 없다. 그것을 알면서 무대에 서는 것은 청중에 대한 모욕이다."
공연이 중단되었다.
이탈리아 언론이 폭발했다. 비난의 기사들이 쏟아졌다. 무책임하다, 오만하다, 국가적 망신이다. 대통령 앞에서 공연을 중단한 것이 이탈리아 전체의 자존심을 건드린 것처럼 다루어졌다.
그러나 칼라스의 입장에서 보면 달랐다.
그날 밤 칼라스의 목소리는 실제로 한계에 와있었다. 무리해서 공연을 강행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칼라스의 남은 목소리에 더 큰 손상이 왔을 것이다.
칼라스는 자신의 목소리를 지키기 위해, 가장 큰 대가를 치른 날 밤이었다.


아름다움을 얻고 잃은 것

이 시점에서 하나의 질문이 피할 수 없게 된다.
체중 감량이 칼라스의 목소리 쇠퇴를 앞당겼는가.
대답은 아마도 '그렇다'와 '아니다' 사이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체중 감량이 직접적인 원인이었다고 단정 짓는 것은 지나치다. 칼라스의 목소리는 체중 감량 이전부터 이미 한계를 향해 가고 있었다. 극단적인 공연 스케줄, 엄청난 심리적 압박, 사생활의 혼란. 그 모든 것이 목소리에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체중 감량이 전혀 관계가 없었다고도 할 수 없다.
성악가의 몸은 악기다. 그 악기의 구조가 급격히 달라졌을 때, 소리가 달라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결과다. 새로운 구조에 맞게 발성 기제를 다시 훈련하는 데 시간이 필요했다. 그 시간이 충분히 주어지지 않은 채로 칼라스는 계속 무대에 섰다.
아름다움을 위해 치른 대가.
그러나 그것이 전부인가. 아름다움만을 위한 것이었는가.
칼라스가 체중을 감량한 것은 더 아름답게 보이기 위해서만이 아니었다. 무대 위에서 더 완전한 예술가가 되기 위해서였다. 목소리와 몸이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믿음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 믿음이 틀린 것인가. 아니다. 그 믿음은 맞았다. 체중 감량 이후 칼라스의 무대 표현은 실제로 더 완전해졌다.
그렇다면 그 대가가 너무 컸는가. 어쩌면 그렇다.
그것이 예술가의 딜레마다. 완전해지기 위해 치르는 대가가, 완전함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것을 빼앗아 가는 아이러니.


Maria Callas 1960s opera stage

칼라스가 말한 것

나중에 칼라스는 이 모든 것에 대해 이야기했다.
체중 감량에 대한 후회가 있느냐는 질문에 칼라스는 이렇게 답했다.
"나는 후회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이 목소리에 영향을 미쳤다는 것을 부정하지도 않겠다. 모든 선택에는 결과가 있다. 나는 내 선택의 결과를 살았다."
짧고 간결한 말이었다. 그 안에 많은 것이 담겨 있었다.
후회하지 않는다는 것. 그것은 칼라스가 무대 위에서 더 완전한 예술가가 된 것을 후회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비올레타가 실제로 죽어가는 것처럼 보일 수 있게 된 것을. 노르마가 진짜 여사제처럼 서있을 수 있게 된 것을.
그러나 결과를 살았다는 것. 그것은 목소리의 변화를 인정하는 것이었다. 아름다움을 얻은 대가가 있었다는 것을.
칼라스는 그 두 가지를 모두 안고 살았다.
그것이 예술가로서의 칼라스의 선택이었다. 완전함을 위해 모든 것을 걸고, 그 결과를 받아들이는 것.


목소리가 달라진 이후의 칼라스

목소리가 변하기 시작한 이후에도 칼라스는 무대를 떠나지 않았다.
1960년대 초반까지 공연을 계속했다. 이탈리아, 영국, 프랑스. 목소리가 예전 같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어떤 공연에서는 예전의 빛이 돌아왔다. 어떤 공연에서는 흔들렸다. 그 불확실성을 안고 무대에 섰다.
1964년, 런던 코번트 가든에서 「토스카」 공연이 있었다.
그것이 칼라스의 마지막 본격적인 오페라 무대 중 하나였다.
그 공연을 본 사람들의 증언이 있다. 목소리는 예전 같지 않았다. 그러나 그 무대에 있는 것이 토스카였다는 것, 그 인물이 살아있었다는 것. 그것은 예전과 달라지지 않았다.
목소리가 달라져도 칼라스는 칼라스였다. 그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었다.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

체중 감량 이야기를 마무리하면서 하나의 질문을 남기고 싶다.
칼라스가 얻은 아름다움이란 무엇이었는가.
외모의 아름다움은 분명히 얻었다. 세상이 그것을 인정했다.
그러나 칼라스가 진정으로 원한 아름다움은 다른 것이었는지 모른다. 비올레타가 실제로 죽어가는 것처럼 보이는 것. 노르마가 진짜 여사제처럼 서있는 것. 메데아의 분노가 몸 전체에서 느껴지는 것. 그 무대 위의 완전함이 칼라스가 원한 아름다움이었다.
그 아름다움을 위해 칼라스는 대가를 치렀다. 목소리의 일부를.
그 교환이 공정한 것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어쩌면 그 질문 자체가 잘못된 것일 수도 있다. 예술에서 완전함을 향한 추구는 항상 대가를 요구한다. 그 대가를 기꺼이 치르는 것이 예술가이고, 그 대가를 치른 결과가 예술이 된다.
칼라스는 대가를 치렀다. 그리고 그 대가로 만들어진 예술이 지금도 남아있다.
음반 속에서, 실황 녹음 속에서, 칼라스의 목소리가 울린다. 그 목소리는 아름다움을 위해 모든 것을 건 한 예술가의 선택이 담겨있다.
그것이 칼라스가 남긴 것이다.


 

🎵 오늘 감상곡 

벨리니 「몽유병의 여인」 중 '아, 믿을 수 없어라'

칼라스, 빅토르 데 사바타 지휘, 밀라노 라 스칼라 (1955년)
체중 감량 직후, 칼라스의 목소리가 가장 완전했던 시기의 녹음. 피아니시모의 통제가 완벽하고, 트릴이 섬세하며, 선율이 물처럼 흐른다. 이것이 칼라스가 추구한 벨칸토의 완성이었다.
 

 


 
📌 다음 편 예고
제9편 | 오나시스 : 사랑인가 파멸인가
1959년 여름, 요트 크리스티나 호. 갑판 위에 그리스의 선박왕 아리스토텔레스 오나시스가 있었다. 그리고 마리아 칼라스가 있었다. 세기의 만남이 시작되었다. 그것은 마리아가 평생 찾아온 사랑이었는가. 아니면 마리아의 남은 것들을 모두 가져간 파멸이었는가. 다음 편에서는 칼라스의 삶에서 가장 뜨겁고 가장 잔인했던 그 이야기를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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