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음악/거장의 초상

칼라스, 제9편 | 오나시스 : 사랑인가 파멸인가

by 책으로떠나는여행 2026. 5. 5.

칼라스, 목소리로 산 여자 : 아홉 번째 이야기


세상에는 두 종류의 만남이 있다. 삶을 풍요롭게 하는 만남과, 삶을 송두리째 바꾸어버리는 만남. 1959년 여름, 마리아는 두 번째 종류의 만남을 가졌다. 그것이 사랑이었는지, 파멸이었는지. 아마도 두 가지가 같은 것이었는지. 마리아는 그것을 알면서도 뛰어들었다.


오나시스라는 사람

아리스토텔레스 소크라테스 오나시스(Aristotle Socrates Onassis).
1906년 오스만 제국의 스미르나(현재 터키 이즈미르) 출신. 그리스계 이민자 가문에서 태어났다. 십대에 가족과 함께 대학살을 피해 도망쳤고, 빈손으로 세상에 던져졌다.
그러나 오나시스는 빈손으로 시작한 사람이 무엇을 만들 수 있는지를 보여주었다.
담배 무역으로 시작하여 선박업으로 옮겨갔다. 1930년대와 40년대를 거치면서 오나시스는 세계 최대의 개인 선박 회사를 만들었다. 유조선, 화물선, 크루즈선. 바다 위의 모든 것이 오나시스의 것이었다.
1950년대 중반, 오나시스는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 중 하나였다.
그러나 오나시스를 단순한 사업가로 이해하면 그의 절반만 보는 것이다.
오나시스는 삶을 강렬하게 살고 싶어 하는 사람이었다. 돈이 목적이 아니었다. 돈은 더 크고 더 화려한 삶을 위한 수단이었다. 몬테카를로의 카지노, 아테네의 살롱, 파리의 레스토랑. 세계의 가장 빛나는 공간들에 오나시스가 있었다. 그리고 그 공간들에서 가장 아름답고 가장 유명한 사람들이 오나시스 곁에 있었다.
그 오나시스가 마리아 칼라스라는 이름을 들었을 때, 무언가를 느꼈다.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소프라노. 오페라의 여왕. 라 디비나.
오나시스는 자신의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것을 원하는 사람이었다. 칼라스는 그 시대 오페라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것이었다.
두 사람이 만나는 것은 어쩌면 필연이었다.


신혼부부 재클린과 아리스토텔레스 오나시스

 


요트 크리스티나 호

1959년 여름.
오나시스의 요트 크리스티나 호(Christina O)가 지중해를 항해하고 있었다.
크리스티나 호는 단순한 요트가 아니었다. 전장 99미터, 선원 60명, 수영장, 바, 댄스 플로어, 손님 방 열여섯 개. 그것은 떠다니는 궁전이었다.
그 요트에 오나시스가 초청한 손님들이 있었다. 영국 전 수상 윈스턴 처칠(Winston Churchill)과 그의 부인 클레멘틴. 그리고 메네기니와 함께하는 마리아 칼라스.
오나시스와 칼라스가 처음 만난 것이 이 크루즈였다.
마리아가 처음 요트에 올랐을 때, 오나시스는 그 자리에 있었다. 두 사람이 처음 인사를 나눴다. 악수, 몇 마디의 말. 그것이 전부였다.
그러나 크루즈가 계속되면서 두 사람은 대화를 나눴다. 갑판에서, 식사 자리에서, 저녁 바에서.
오나시스는 그리스어로 마리아에게 말을 걸었다. 마리아의 모국어. 미국에서 태어났지만, 그리스어가 처음 집에서 배운 언어였다.
그 언어가 무언가를 열었다.
마리아는 훗날 이렇게 말했다.
"오나시스는 나에게 그리스어로 말했다. 처음으로 내가 집에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아테네에서도, 밀라노에서도, 뉴욕에서도 느끼지 못했던 것을 그 요트 위에서 느꼈다."
집. 마리아가 평생 찾아온 것.


크리스티나 오나시스와 마리아 칼라스가 "크리스티나 O"호에 탑승했습니다.

 


크루즈가 끝날 무렵

2주간의 크루즈가 끝나갈 무렵, 무언가 달라져 있었다.
구체적으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칼라스도, 오나시스도 그 크루즈 위에서 일어난 일을 상세히 이야기한 적이 없다. 그러나 크루즈가 시작될 때와 끝날 때, 두 사람 사이의 공기가 달랐다는 것은 함께했던 사람들이 느꼈다.
처칠은 노령이었고 건강이 좋지 않았다. 그는 갑판에 앉아 지중해를 바라보며 많은 시간을 보냈다. 그 옆에 오나시스가 앉아 이야기를 나눴다. 그리고 조금 떨어진 곳에서 마리아가 있었다.
그 크루즈에 있었던 한 사람이 나중에 이렇게 회고했다.
"칼라스와 오나시스는 서로를 자꾸 찾았다. 아직 연인이 아니었지만, 이미 연인처럼 서로의 위치를 알았다. 메네기니는 그것을 보고 있었다."
메네기니는 보고 있었다.
그는 아내와 오나시스 사이에서 무언가 달라지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몰랐다. 오나시스는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사람 중 하나였고, 메네기니는 이탈리아의 벽돌 사업가였다.
크루즈가 끝나고 요트에서 내렸을 때, 네 사람의 삶은 이미 달라지기 시작해 있었다.


메네기니와의 이별

크루즈가 끝나고 몇 달이 지나지 않아, 1959년 가을.
마리아는 메네기니에게 말했다. 결혼을 끝내고 싶다고.
메네기니는 충격을 받았다. 그러나 동시에 놀라지 않았다. 크루즈 위에서 이미 그것을 느꼈기 때문에.
두 사람의 별거가 공식화되었다. 이탈리아 언론이 즉각 보도했다. 칼라스와 메네기니의 결혼이 끝났다. 그리고 그 원인으로 오나시스의 이름이 거론되었다.
메네기니는 나중에 회고록에서 그 시절을 이렇게 썼다.
"마리아를 원망했는가? 처음에는 그랬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이해했다. 마리아는 자신이 필요한 것을 찾은 것이었다. 내가 줄 수 없었던 것을. 오나시스가 그것을 가지고 있었는지, 아닌지는 나중에 드러났다."
나중에 드러났다.
그 말 안에 앞으로 일어날 일들이 담겨 있었다.


오나시스와 마리아 칼라스

오나시스가 칼라스에게 준 것

오나시스와 함께한 시간 동안, 마리아는 자신이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것들을 경험했다.
자유.
메네기니와의 결혼에서 마리아의 삶은 공연과 리허설로 가득 차 있었다. 메네기니가 일정을 관리했고, 마리아는 그 일정 안에서 살았다. 그것이 마리아의 커리어를 만들었지만, 동시에 마리아의 삶을 일정표로 만들었다.
오나시스와 함께할 때, 마리아는 일정이 없었다.
요트 위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었다. 갑판에 누워 지중해의 햇빛을 받아도 되었다. 그리스의 작은 섬에 내려 시장을 걸어도 되었다. 저녁에 댄스 플로어에서 춤을 추어도 되었다.
마리아는 그것이 낯설었다.
평생 음악을 위해 살아온 사람이었다. 어릴 때부터 연습, 연습, 연습이었다. 이달고의 레슨, 아테네 왕립 오페라의 공연, 라 스칼라의 리허설. 멈춘 적이 없었다.
오나시스 곁에서 처음으로 멈추었다.
그 멈춤이 마리아에게 쉼이었는지, 아니면 그것이 나중에 더 큰 무언가를 잃게 하는 첫 걸음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무대가 줄어들었다

오나시스와의 관계가 깊어지면서, 마리아의 공연이 줄어들기 시작했다.
1960년, 마리아는 이전 어느 해보다 적은 수의 공연을 했다. 1961년, 더 줄어들었다. 1962년에는 거의 무대에 서지 않았다.
오나시스의 세계는 오페라와 달랐다. 그것은 요트와 파티와 사교계의 세계였다. 마리아는 그 세계에 적응해야 했다. 아니, 그 세계를 선택했다.
음악계가 걱정하기 시작했다.
세계 최고의 소프라노가 무대를 떠나고 있었다. 공연 취소가 늘어났다. 계약이 파기되었다. 오페라단들이 당황했다.
그러나 마리아는 달랐다.
오나시스와 함께한다는 것이, 그 모든 것보다 더 중요했다.
마리아는 훗날 이 시기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나는 처음으로 마리아 칼라스가 아닌 마리아로 살고 있었다. 그것이 무엇인지를 몰랐었다. 스물다섯 살에도, 서른다섯 살에도. 오나시스와 함께했을 때 처음으로 알았다."
마리아로 사는 것. 소프라노 칼라스가 아닌 인간 마리아로.
그것이 마리아가 오나시스에게서 찾은 것이었다.


칼라스와 오나시스

 


잃어버린 아이

이 이야기에서 가장 아픈 부분을 이야기해야 한다.
1960년, 마리아는 오나시스의 아이를 가졌다.
임신이었다. 결혼하지 않은 두 사람 사이에서. 그것이 당시 사회에서 어떤 의미였는지는 말할 필요가 없다.
아이가 태어났다. 그러나 아이는 살지 못했다.
오마로스(Omiros)라고 불린 아들이었다. 태어난 지 몇 시간 만에 세상을 떠났다.
마리아는 그 상실에 대해 공개적으로 이야기하지 않았다. 언론은 그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이후에도 마리아는 그것을 깊이 숨겨두었다.
그러나 마리아의 가까운 지인들은 그 상실이 마리아에게 남긴 것을 알았다.
마리아는 어머니에게 사랑받지 못했다. 아이를 통해 처음으로 자신이 사랑을 주는 존재가 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아이를 잃었다.
그 상실이 마리아의 내면에 또 하나의 상처가 되었다.
오나시스는 이 상실에 어떻게 반응했는가. 그것에 대한 기록은 충분하지 않다. 다만 마리아가 그 이후에도 오나시스 곁에 남아있었다는 것이 전해진다.
사랑은 상실을 견디는 것이기도 하다. 그 상실 안에서도 함께 있는 것.


오나시스가 주지 못한 것

오나시스는 마리아에게 자유를 주었다. 화려함을 주었다. 집이라는 느낌을 주었다.
그러나 오나시스가 주지 못한 것이 있었다.
헌신.
오나시스의 삶에는 마리아 이전에도 여러 여인이 있었다. 그리고 마리아와 함께하는 동안에도 오나시스의 시선이 항상 마리아에게만 머물지는 않았다.
오나시스는 마리아를 사랑했다. 그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 사랑이 그의 유일한 사랑이었는지는 다른 문제였다.
마리아는 그것을 느꼈다. 그러나 떠나지 않았다. 오나시스의 옆에 있는 것을 선택했다.
그것이 사랑이었는지, 아니면 이미 너무 깊이 들어가버려서 나올 수 없는 상태였는지는 알 수 없다.
오나시스의 가장 가까운 동반자이면서, 동시에 오나시스의 완전한 헌신을 받지 못하는 여인. 그것이 1960년대 마리아의 위치였다.
그 위치가 마리아를 행복하게 했는가. 마리아는 그 질문에 직접 답하지 않았다.
"오나시스와 함께 있을 때 나는 살아있었다. 그것이 행복한 것인지 아닌지는 지금도 모르겠다."
살아있었다. 그것이 마리아가 할 수 있는 가장 솔직한 말이었다.


재클린 케네디의 등장

1963년 11월 22일, 미국 대통령 존 F. 케네디가 달라스에서 암살되었다.
그 사건이 오나시스와 마리아의 관계에 어떤 그림자를 드리우게 될지를, 그날 마리아는 알지 못했다.
케네디의 미망인 재클린 케네디(Jacqueline Kennedy).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여인 중 하나. 아름다움, 우아함, 교양. 그리고 비극의 주인공이라는 후광.
오나시스는 재클린 케네디와 이미 면식이 있었다. 그러나 케네디 대통령의 암살 이후, 오나시스는 재클린에게 더 자주 연락하기 시작했다. 위로의 표현이었는지, 다른 목적이 있었는지는 오나시스만이 알 것이었다.
마리아는 오나시스와 재클린의 관계에 대해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오나시스가 많은 사람들과 교류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것이 그의 방식이었다. 사업가로서, 사교계의 인물로서.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마리아는 무언가를 느끼기 시작했다.
오나시스가 자신에게 이전과 다르다는 것을. 시선이 달라졌다는 것을. 무언가가 변했다는 것을.


재클린 오나시스와 그녀의 남편

 


1968년 10월 20일

그 날이 왔다.
1968년 10월 20일.
오나시스와 재클린 케네디가 그리스의 작은 섬 스코르피오스(Skorpios)에서 결혼했다.
마리아는 파리에 있었다.
그 소식이 전해졌을 때 마리아가 어디에 있었는지,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에 대한 증언들이 있다. 파리 아파트에서 혼자 있었다는 이야기도 있고, 친구와 함께 있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러나 그 소식을 들었을 때 마리아가 어떻게 반응했는지에 대한 증언은 대부분 일치한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충격이 너무 컸던 것인지, 아니면 이미 어느 정도 예상했던 것인지. 아마도 두 가지가 모두 사실이었을 것이다.
오나시스와의 10년. 메네기니와의 결혼을 끝내고 선택한 오나시스. 무대를 줄이고 선택한 오나시스. 아이를 잃으면서도 남아있었던 그 곁.
그 모든 것의 끝이 이것이었다.
마리아는 그날 밤 어떻게 보냈는가. 그것은 마리아만이 알 것이다. 그리고 마리아는 그것을 이야기하지 않았다.


칼라스의 말, 오나시스의 결혼 이후

마리아는 오나시스의 재클린과의 결혼에 대해 공개적으로 거의 이야기하지 않았다.
몇 개의 인터뷰에서 기자들이 그 주제를 꺼냈다. 마리아의 반응은 짧고 절제된 것이었다.
"오나시스 씨의 결혼은 그 분 자신의 결정입니다. 나는 그것에 대해 할 말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 짧은 말 안에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은 느꼈다.
가까운 친구들에게는 달랐다. 마리아는 사적인 자리에서 이렇게 말했다고 전해진다.
"오나시스는 나를 사랑했다. 그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재클린은 내가 가질 수 없는 것을 가지고 있었다. 케네디 대통령의 미망인이라는 역사. 그것이 오나시스에게는 다른 종류의 트로피였던 것이다."
트로피. 마리아가 선택한 단어가 씁쓸하다. 오나시스의 세계에서 여인은 트로피인가. 그렇다면 마리아 자신은 오나시스에게 어떤 트로피였는가.
세계 최고의 소프라노. 라 디비나. 그 트로피 이후, 케네디 대통령의 미망인이라는 더 빛나는 트로피가 왔다는 것.
마리아는 그것을 알았다. 그리고 그것이 가장 아픈 것이었다.


그러나 연락은 계속되었다

오나시스가 재클린과 결혼한 뒤에도 마리아와 오나시스의 관계는 완전히 끊기지 않았다.
오나시스는 재클린과 결혼한 뒤에도 마리아에게 연락했다. 전화를 걸었다. 파리에 올 때 마리아를 만나려 했다.
마리아는 그 연락을 무시하지 않았다.
그것이 인간의 감정의 복잡함이었다. 배신한 사람을 사랑하지 않기로 결심하는 것과, 실제로 그 사람을 사랑하지 않게 되는 것은 다르다.
마리아는 오나시스를 사랑했다. 그것은 재클린과의 결혼 이후에도 달라지지 않았다. 그 사랑이 마리아를 행복하게 했는가. 그렇지 않았다. 그러나 그 사랑을 끊을 수 있었는가. 그것도 아니었다.
마리아는 훗날 이렇게 말했다.
"나는 오나시스를 사랑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사랑은 노력으로 멈출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이 사랑의 가장 잔인한 부분이다."
사랑의 가장 잔인한 부분. 멈추고 싶어도 멈출 수 없는 것.


마리아 칼라스

 


오나시스의 죽음

1975년 3월 15일, 오나시스가 세상을 떠났다.
오랫동안 앓아온 중증 근무력증이 악화된 끝이었다. 파리의 아메리칸 병원에서. 향년 69세.
재클린이 곁에 있었다.
마리아는 어디 있었는가. 파리의 자신의 아파트에 있었다.
오나시스가 죽어가고 있다는 것을 마리아는 알고 있었다. 오나시스의 건강이 악화되어간다는 소식을 듣고 있었다. 그러나 마리아가 병원을 찾아갈 수는 없었다. 오나시스의 법적 아내는 재클린이었다.
오나시스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마리아는 이렇게 말했다고 전해진다.
"오나시스는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그가 나와 함께했던 시간은 나와 함께 있다. 그것은 아무도 가져갈 수 없다."
분노가 아니었다. 체념도 아니었다.
그냥 사실의 진술이었다. 오나시스는 떠났지만, 그와 함께한 시간은 마리아의 것이었다.
그 말 안에 마리아의 평생이 있었다. 잃어도 잃지 않는 것. 사라져도 남아있는 것. 그것이 마리아가 삶에서 배운 것이었다.


사랑인가, 파멸인가

오나시스와 마리아의 이야기를 사랑인가 파멸인가로 판단하는 것은 가능한가.
사랑이었다. 분명히.
마리아는 오나시스를 사랑했다. 그 사랑이 진심이었다는 것을 마리아의 모든 행동이 보여주었다. 메네기니와의 결혼을 끝낸 것, 무대를 줄인 것, 아이를 잃으면서도 남아있었던 것.
그러나 동시에 파멸이었다.
오나시스와의 관계가 마리아의 음악적 커리어에 결정적인 타격을 주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공연이 줄었고, 목소리를 유지하기 위한 훈련이 줄었으며, 무대 위의 칼라스가 세상에서 사라져가기 시작했다.
사랑과 파멸이 하나였던 것.
그것이 마리아 칼라스와 아리스토텔레스 오나시스의 이야기다.
마리아는 그 이야기를 후회했는가. 공식적으로는 후회한다고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파리의 아파트에서 혼자 보내는 밤들이 길어지면서, 마리아가 무엇을 생각했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다만 마리아가 남긴 말이 있다.
"나는 사랑을 위해 모든 것을 줄 수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실제로 주었다. 그 다음에 무엇이 남는지는 나중에 알았다."
그 다음에 무엇이 남는지.
그 질문의 답이 마리아의 남은 이야기에 있다.


🎵 오늘 감상곡

벨리니 「청교도」 중 '나에게 이르기를(Qui la voce)' : 마리아 칼라스
「청교도」의 엘비라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버림받고 정신을 잃는 여인이다. 그 광란 속에서 부르는 이 아리아는 잃어버린 사랑을 향한 노래다. 버림받은 것을 아직 이해하지 못하는 여인의 혼란, 그 사랑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마음.

칼라스가 이 아리아를 부를 때, 목소리 안에 있는 것이 엘비라만이 아니다. 오나시스와 함께한 시간 동안 칼라스 자신이 느꼈을 것들이 그 안에 있다. 사랑받는다는 것, 그리고 그 사랑이 언제 어떻게 달라질지 모른다는 것.
이 아리아를 들으면서 생각해보시길. 세계의 모든 것을 가진 오나시스 곁에서, 마리아가 얼마나 취약했는지를. 그리고 그 취약함을 목소리로 바꾸어 노래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 다음 편 예고
제10편 | 목소리를 잃다 : 가장 잔인한 이별
모든 소프라노에게 가장 두려운 날이 있다. 목소리가 돌아오지 않는 날. 마리아 칼라스에게 그 날이 왔다. 오나시스를 잃은 뒤, 이번에는 목소리마저. 무대 없는 칼라스는 어떤 존재인가. 그 질문이 파리의 아파트에서 마리아를 기다리고 있었다. 다음 편에서는 칼라스의 가장 긴 이별, 목소리와의 이별 이야기를 전합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