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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예술, 인간을 말하다

EP.31 알프스 너머의 르네상스 : 새로운 번영이 유럽 중앙부에 오르다

by 책으로떠나는여행 2026. 5. 6.

「예술, 인간을 말하다」 EP.31

뒤러 《1500년 자화상》 — 알테 피나코테크, 뮌헨

1520년, 안트베르펜 항구.
거대한 선박들이 닻을 내립니다. 포르투갈에서 온 향신료, 신대륙에서 온 은, 영국에서 온 양모, 이탈리아에서 온 비단. 이 도시의 시장에는 한 번에 1,000척이 넘는 배가 정박해 있을 때도 있었습니다. 당시 안트베르펜은 세계에서 가장 분주한 항구 도시였습니다.
그 해 멕시코에서 온 화물선 하나가 특별한 짐을 싣고 왔습니다. 코르테스가 아즈텍 황제 목테수마로부터 빼앗아 스페인 왕 카를 5세에게 보낸 황금 공예품들이었습니다. 이것들이 안트베르펜에 전시되었습니다.
그 전시를 보러 간 사람 중에 알브레히트 뒤러(Albrecht Dürer)가 있었습니다.
뒤러는 일기에 썼습니다.
"평생 이토록 내 마음을 기쁘게 한 것을 본 적이 없다. 이 세상에 이토록 정교한 것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나를 경이롭게 만들었다. 새로운 땅에서 온 이 영리한 사람들의 천재성을 나는 경탄할 수밖에 없었다."
반 룬은 이 일기 항목 앞에서 오랫동안 멈춥니다. 알브레히트 뒤러. 독일이 낳은 가장 위대한 예술가. 이탈리아 르네상스를 흡수하고 북유럽의 정신으로 재창조한 사람. 그가 신대륙의 예술 앞에서 경이로움을 표현했습니다.
이것이 북유럽 르네상스의 정신이었습니다. 새로운 것 앞에서 열린 마음. 다른 문명의 아름다움을 인정하는 겸손함.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자신의 것으로 소화하는 능력.
알프스 너머에서 피어난 르네상스는 이탈리아와 달랐습니다. 그러나 그 차이가 오히려 더욱 풍성한 예술을 낳았습니다.


뒤러 《기사, 죽음, 악마》(1513년) — 동판화

왜 북유럽인가 : 다른 토양, 다른 꽃

이탈리아 르네상스가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직접적인 유산 위에서 꽃피었다면, 북유럽 르네상스는 다른 토양에서 자랐습니다.
독일, 플랑드르, 네덜란드, 스위스. 이 지역들은 이탈리아와 달랐습니다.
기후가 달랐습니다. 북유럽의 흐리고 추운 날씨는 사람들을 실내로 몰아넣었습니다. 이탈리아의 열린 광장 문화 대신 실내의 닫힌 공간 문화. 이 차이가 예술에 반영되었습니다. 이탈리아가 웅장한 프레스코와 기념비적 조각을 발전시킨 반면, 북유럽은 작은 패널화와 세밀한 디테일을 발전시켰습니다.
종교가 달랐습니다. 이탈리아 르네상스는 가톨릭 교회와 밀접하게 연결되었습니다. 메디치 가문과 교황들이 예술을 후원했습니다. 그러나 북유럽에서는 종교적 불만이 끓어오르고 있었습니다. 면죄부 판매, 교황청의 부패, 성직자들의 타락. 이 불만이 마침내 1517년 마르틴 루터의 95개 조항으로 폭발했습니다.
경제 구조가 달랐습니다. 이탈리아의 예술 후원이 주로 귀족과 교회를 통했다면, 북유럽에서는 상업으로 부를 쌓은 시민 계층이 예술의 새로운 후원자가 되었습니다. 안트베르펜과 아우크스부르크의 상인들, 뉘른베르크의 장인 가문들. 이들이 원한 예술은 이탈리아 귀족들이 원한 것과 달랐습니다.
반 룬은 이 차이들이 북유럽 르네상스를 이탈리아의 복사본이 아닌 독자적인 예술 세계로 만들었다고 봅니다. 같은 씨앗이 다른 토양에서 다른 꽃을 피우는 것. 그 다름이 약점이 아니라 강점이었습니다.


에라스무스 : 펜으로 르네상스를 북쪽으로 옮긴 사람

북유럽 르네상스를 이해하려면 먼저 한 인물을 만나야 합니다. 데시데리우스 에라스무스(Desiderius Erasmus, 1466~1536).
네덜란드 로테르담에서 태어난 이 신부이자 학자는 북유럽 인문주의의 가장 중요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평생 한 도시에 머물지 않았습니다. 파리, 옥스퍼드, 케임브리지, 루뱅, 바젤, 프라이부르크. 유럽 전역을 돌아다니며 가르치고 쓰고 토론했습니다.
그의 가장 중요한 공헌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그리스어 신약성경 원전의 편집과 번역입니다. 1516년 출판된 이 작업은 당시 유럽이 사용하던 라틴어 번역 성경, 불가타(Vulgata)에 오류가 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신학의 기초 자체를 다시 검토하게 만든 충격적인 작업이었습니다.
다른 하나는 《우신예찬(Laus Stultitiae, 1511)》입니다. 어리석음의 여신 모리아가 인간의 온갖 어리석음을 풍자하는 이 책은 성직자들의 위선, 신학자들의 공허한 논쟁, 왕들의 전쟁 광기를 날카롭게 비판했습니다. 당대 유럽 최고의 베스트셀러가 되었습니다.
에라스무스는 루터의 종교개혁을 지지했을까요. 반은 지지하고 반은 지지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교회의 부패를 비판했지만, 교회의 분열은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루터로부터는 우유부단하다는 비판을, 가톨릭 측으로부터는 루터의 알을 낳은 사람이라는 비판을 동시에 받았습니다.
반 룬은 에라스무스를 르네상스 지성인의 가장 전형적인 모습으로 봅니다. 어느 한 편에 서지 않는 것. 진리를 추구하되 극단을 피하는 것. 비판하되 파괴하지 않는 것. 이 중도의 입장이 때로는 비겁함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반 룬은 이 중도야말로 가장 어려운 입장이라고 봅니다. 극단은 항상 쉽습니다. 균형이 어렵습니다.
에라스무스의 사상이 북유럽 르네상스 예술에 미친 영향은 직접적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가 조성한 지적 분위기, 즉 권위에 의문을 제기하고, 텍스트를 직접 읽고, 내면의 신앙을 외적 의식보다 중시하는 분위기가 북유럽 예술 전체에 스며들었습니다.


홀바인 《에라스무스 초상》(1523년) — 내셔널 갤러리, 런던

알브레히트 뒤러 : 이탈리아와 독일 사이의 다리

알브레히트 뒤러(Albrecht Dürer, 1471~1528). 뉘른베르크에서 태어난 이 화가이자 판화가이자 이론가를 반 룬은 북유럽 르네상스의 가장 위대한 인물로 꼽습니다.
뒤러의 아버지는 금세공사였습니다. 뒤러는 아버지에게서 정밀한 손 작업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피렌체에서 마이스터 볼게무트의 작업실에서 회화와 판화를 배웠습니다.
그러나 뒤러를 뒤러로 만든 것은 이탈리아 여행이었습니다.
1494년과 1505년, 두 차례의 이탈리아 방문. 특히 베네치아에서 그는 이탈리아 르네상스를 직접 경험했습니다. 원근법, 인체 비례, 고전적 아름다움의 이상. 이것들을 배웠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것들을 독일로 가져와 독일식으로 소화했습니다.
뒤러의 자화상들은 그의 예술가적 자의식을 보여주는 독특한 문서입니다. 1498년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의 자화상. 긴 금발 머리, 우아한 이탈리아 패션, 당당한 시선. 이것은 장인의 초상이 아닙니다. 이것은 귀족의 초상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는 장인이었습니다.
1500년 뮌헨 알테 피나코테크의 자화상은 더 놀랍습니다. 뒤러가 정면을 향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처럼. 손가락이 축복하듯 들어 올려져 있습니다. 이것이 신성 모독인가. 뒤러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예술가가 신의 창조 능력을 나누어 받은 존재라고 믿었습니다. 창조자 신과 창조자 예술가 사이의 유사성.
이 믿음은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예술가관과 같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이토록 직접적으로 그림으로 표현한 것은 독일적 대담함이었습니다.


뒤러의 판화 : 북유럽의 가장 강력한 예술 언어

뒤러를 진정으로 위대하게 만든 것은 판화였습니다.
중세부터 목판화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뒤러 이전에 판화는 주로 대중적인 삽화나 종교적 이미지를 위한 저급한 매체로 취급받았습니다. 뒤러가 이것을 바꾸었습니다.
그는 두 가지 판화 기법을 완전히 새로운 수준으로 끌어올렸습니다.
목판화(Woodcut). 나무 블록을 파내어 잉크를 묻혀 찍어내는 방식. 뒤러의 《묵시록》 시리즈(1498). 요한 계시록의 장면들을 묘사한 15점의 목판화. 이 작품들이 공개되었을 때 유럽 전체가 충격을 받았습니다. 이전에 누구도 목판화로 이런 것을 만들지 않았습니다. 극적인 구성, 세밀한 묘사, 강렬한 감정 표현.
동판화(Engraving). 금속판 위에 직접 선을 새겨 잉크를 묻혀 찍어내는 방식. 목판화보다 훨씬 정밀한 표현이 가능합니다. 뒤러의 동판화 걸작 세 점은 미술사에서 전설이 되었습니다.
《기사, 죽음, 악마(Ritter, Tod und Teufel, 1513)》. 갑옷을 입은 기사가 말을 타고 가고 있습니다. 그의 옆에 죽음이 모래시계를 들고 따라옵니다. 뒤에는 악마가 있습니다. 기사는 이것들을 외면합니다. 두려움 없이 자신의 길을 갑니다. 이것이 에라스무스가 말한 기독교 기사, 즉 신앙으로 무장한 인간의 이상이었습니다.
《성 히에로니무스(St. Jerome in His Study, 1514)》. 서재에서 공부하는 성 히에로니무스. 따뜻한 빛이 창문을 통해 들어옵니다. 사자가 바닥에 누워 있습니다. 책들이 쌓여 있습니다. 고요하고 안락한 학문의 공간. 이 동판화에서 뒤러의 빛 표현 능력이 절정에 달합니다. 아름다운 빛을 표현하는 데 색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멜랑콜리아 I(Melencolia I, 1514)》. 날개 달린 알레고리 인물이 컴퍼스를 들고 생각에 잠겨 있습니다. 주위에 기하학 도형들, 측정 도구들, 다면체 솔리드가 있습니다. 뒤에는 마방진이 있고, 하늘에는 혜성과 무지개가 있습니다. 이 그림의 의미에 대한 해석이 500년간 계속되고 있습니다. 창조적 천재의 우울함, 달성할 수 없는 완벽함 앞의 절망, 사투르누스 행성의 영향. 이 중 무엇이 정답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 알 수 없음이 이 작품을 가장 매력적인 판화 중 하나로 만들었습니다.
반 룬은 뒤러의 판화에서 북유럽 르네상스의 핵심 특성을 봅니다. 도덕적 진지함. 이탈리아 르네상스가 아름다움을 찬양했다면, 북유럽 르네상스는 아름다움 안에서 의미를 찾았습니다. 뒤러의 기사는 아름답지만 그 아름다움이 메시지를 위해 봉사합니다. 이것이 독일적이고, 에라스무스적이고, 종교개혁 전야의 분위기를 담은 예술입니다.


홀바인 《대사들》(1533년) — 내셔널 갤러리, 런던

한스 홀바인 : 초상화로 시대를 기록한 사람

한스 홀바인 소(Hans Holbein the Younger, 1497~1543). 아우크스부르크에서 태어나 영국에서 생을 마감한 이 화가는 16세기 유럽의 가장 위대한 초상화가였습니다.
홀바인의 삶 자체가 북유럽 르네상스의 궤적을 따릅니다. 젊은 시절 바젤에서 에라스무스와 친분을 쌓았습니다. 에라스무스의 초상화를 여러 점 그렸습니다. 그 중 파리 루브르 소장본이 가장 유명합니다. 책 위에 손을 올린 채 약간 아래를 보는 에라스무스의 얼굴. 그 얼굴에 학자의 집중력과 동시에 인간적인 따뜻함이 있습니다.
종교개혁이 바젤에서 격렬해지면서 예술 후원이 사라졌습니다. 에라스무스의 소개로 홀바인은 영국으로 건너갔습니다. 그리고 헨리 8세의 궁정화가가 되었습니다.
《대사들(The Ambassadors, 1533)》. 런던 내셔널 갤러리 소장. 이 작품이 홀바인의 가장 유명하고 가장 복잡한 그림입니다.
두 명의 프랑스 외교관이 서 있습니다. 그들 사이의 선반에 당시 지식의 총체가 놓여 있습니다. 지구본, 천문 기구들, 류트, 찬송가집, 수학 교재. 이 물건들이 당시 인문주의 교양의 목록입니다.
그러나 이 그림 하단에 이상한 형태가 있습니다. 비스듬하게 왜곡된 형태. 특정 각도에서만 제대로 보이는 이 형태는 해골입니다. 아나모르포시스(Anamorphosis) 기법으로 그려진 해골.
모든 지식, 모든 부, 모든 외교적 힘. 그 모든 것의 배경에 죽음이 있습니다. 라틴어로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죽음을 기억하라. 이것이 이 화려한 초상화 안에 숨어있는 메시지입니다.
반 룬은 《대사들》에서 북유럽 르네상스의 정수를 봅니다. 이탈리아 르네상스가 인간의 능력을 찬양했다면, 북유럽은 그 찬양 안에도 항상 죽음의 그림자를 인식했습니다. 이것이 더 비관적인 것인가. 반 룬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 정직한 것이라고. 그리고 더 완전한 것이라고. 삶의 아름다움을 알면서 동시에 그 한계를 아는 것.
홀바인의 헨리 8세 초상화들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다리를 벌리고 당당하게 서 있는 헨리 8세. 이 이미지가 헨리 8세에 대한 우리의 시각적 기억 자체입니다. 역사가 어떻게 권력자를 기억하게 될지를 예술가가 결정한 경우입니다.


루카스 크라나흐 : 루터의 화가

루카스 크라나흐 장(Lucas Cranach the Elder, 1472~1553). 독일 르네상스에서 뒤러와 함께 가장 중요한 이름. 그러나 두 사람은 방향이 달랐습니다.
뒤러가 이탈리아를 향해 열린 사람이었다면, 크라나흐는 독일적인 것을 향해 뿌리를 내린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하게, 크라나흐는 마르틴 루터의 가장 가까운 친구이자 시각적 대변자였습니다.
두 사람의 우정은 깊었습니다. 크라나흐가 루터의 결혼식 증인이었고, 루터가 크라나흐 아들의 대부였습니다. 크라나흐는 루터의 초상화를 수십 점 그렸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루터의 얼굴이 크라나흐의 그림에서 온 것입니다.
종교개혁이 일어났을 때 예술은 어느 편에 서야 했을까요.
루터주의 측에서 예술은 복잡한 문제였습니다. 한편으로 루터는 종교적 이미지를 완전히 거부하지 않았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성상파괴(Iconoclasm) 운동이 일어나 교회의 예술품들이 파괴되었습니다. 특히 칼뱅주의 지역에서 교회 내 모든 이미지가 금지되었습니다.
크라나흐는 이 갈등 속에서 독특한 해법을 찾았습니다. 종교적 주제를 새로운 방식으로 표현하는 것. 가톨릭 예술의 화려한 성인 숭배 대신, 성경 텍스트에 직접 근거한 단순하고 명확한 이미지들.
그의 루터교 제단화들에서 이것이 선명합니다. 복잡한 알레고리가 없습니다. 성경 장면이 직접적으로 묘사됩니다. 보는 사람이 무엇을 보고 있는지 즉각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루터교 예배당을 위한 예술이었습니다. 문맹자들도 성경을 이해할 수 있는 이미지.
크라나흐는 또한 신화적 주제도 그렸습니다. 특히 비너스와 님프들. 그의 여성 누드들은 이탈리아의 이상화된 비너스와 전혀 다릅니다. 더 실제적이고, 더 독일적이고, 때로는 더 관능적입니다. 이탈리아의 고전적 아름다움을 독일적 감성으로 변환한 것.
반 룬은 크라나흐에서 예술과 종교개혁의 복잡한 관계를 봅니다. 예술가는 역사적 격변 속에서 어느 편에 서야 하는가. 크라나흐는 자신의 신앙을 따랐습니다. 그리고 그 신앙이 그의 예술에 새로운 방향을 주었습니다. 이것이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닙니다. 신앙과 예술의 관계가 얼마나 깊을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뤼네발트 《이젠하임 제단화》 — 십자가 처형 장면 (1512~16년)

마티아스 그뤼네발트 : 고통을 그린 사람

북유럽 르네상스에서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이상미와 가장 멀리 떨어진 화가가 있습니다. 마티아스 그뤼네발트(Matthias Grünewald, 1470~1528).
그의 가장 중요한 작품은 이젠하임 제단화(Isenheim Altarpiece, 1512~1516)입니다. 알자스 지방 이젠하임의 성 안토니우스 병원 수도원을 위해 그려진 이 다폭 제단화는 닫히고 열리는 방식에 따라 여러 단계의 그림을 보여줍니다.
가장 충격적인 것은 첫 번째 단계, 즉 가장 바깥 면에 그려진 십자가 처형 장면입니다.
예수의 몸이 아름답지 않습니다.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십자가 처형들에서 예수는 고통 속에서도 어느 정도 이상화된 모습이었습니다. 그뤼네발트의 예수는 다릅니다. 몸 전체가 채찍질로 상처 나 있습니다. 손가락들이 경련으로 뒤틀려 있습니다. 피부가 녹색으로 변해가고 있습니다. 이것은 죽어가는 사람의 몸입니다.
왜 이렇게 그렸을까요.
이 그림이 걸린 곳은 병원이었습니다. 성 안토니우스의 불(ergotism, 맥각병)로 고통받는 환자들이 이 제단화 앞에서 기도했습니다. 살이 썩어가는 끔찍한 이 병을 앓는 환자들에게, 그와 같은 고통을 당한 예수의 이미지가 위로가 되었습니다. 나만 이런 고통을 받는 것이 아니다. 신도 이 고통을 알고 있다.
예술이 치유의 기능을 한 것입니다. 그러나 아름다움이 아닌 고통을 통해서.
반 룬은 그뤼네발트 앞에서 예술에 대한 자신의 전제를 다시 검토합니다. 아름다움이 예술의 조건인가. 그뤼네발트의 십자가 처형은 아름답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강력합니다. 보는 사람에게 무언가를 합니다. 그것이 예술의 더 근본적인 기능이 아닌가.
이탈리아가 아름다움을 통해 진리에 다가갔다면, 그뤼네발트는 고통을 통해 진리에 다가갔습니다. 두 길 모두 진리에 이를 수 있습니다.


아우크스부르크와 푸거 가문 : 상업 자본이 만든 예술

북유럽 르네상스를 가능하게 한 경제적 힘을 이해하려면 아우크스부르크와 푸거(Fugger) 가문을 보아야 합니다.
야코프 푸거(Jakob Fugger, 1459~1525). 그의 별명은 '부유한 자(der Reiche)'였습니다. 이것이 단순한 별명이 아닙니다. 그는 당시 유럽에서 가장 부유한 개인이었습니다. 구리 광산, 은 광산, 교황청 금융, 황제의 금고. 그의 부는 국가를 움직였습니다.
신성로마제국 황제 선출에 필요한 선거인단 매수 자금을 대준 것도 푸거였습니다. 카를 5세가 황제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부분적으로 푸거의 돈 덕분이었습니다.
이 막대한 부가 예술로 흘렀습니다. 아우크스부르크의 건물들이 이탈리아 르네상스 양식으로 지어졌습니다. 푸거 가문의 예배당에는 이탈리아 화가들과 조각가들의 작품이 있었습니다. 한스 홀바인도 푸거 가문의 초상화를 그렸습니다.
그러나 푸거 가문의 가장 중요한 예술적 유산은 1516년에 만들어졌습니다. 푸거라이(Fuggerei). 세계 최초의 사회 주택 단지. 지금도 아우크스부르크에 남아 있는 이 건물군은 가난한 가톨릭 신자들을 위한 저렴한 주택 67채로 이루어졌습니다. 임대료는 연간 1라인 굴덴. 조건은 매일 야코프 푸거와 그의 가족을 위해 기도하는 것.
반 룬은 이 푸거라이에서 흥미로운 질문을 봅니다. 이것이 자선인가, 아니면 죄의 사면을 위한 투자인가. 이 두 가지가 반드시 배타적인가. 그리고 어떤 동기로 만들어졌든, 이 건물들이 500년이 지난 오늘도 사람들이 살고 있다는 사실. 예술과 자선이 합쳐져 시간을 이긴 것입니다.


종교개혁과 예술 : 이미지의 위기

1517년 마르틴 루터의 95개 조항 이후, 북유럽의 예술 세계는 전례 없는 위기를 맞았습니다.
성상파괴(Iconoclasm) 운동. 개신교 개혁자들 중 일부, 특히 스위스의 울리히 츠빙글리와 프랑스의 장 칼뱅이 교회 내 이미지 사용을 완전히 금지했습니다. 그들의 논리는 명확했습니다. 성경은 우상을 만들지 말라고 명령한다. 교회의 성인상과 성화들이 바로 그 우상이다.
이 신학적 논쟁이 폭력으로 이어졌습니다. 교회로 들어온 군중들이 성인상을 부수고, 제단화를 찢고, 스테인드글라스를 깨뜨렸습니다. 수백 년에 걸쳐 만들어진 예술 작품들이 한 세대 만에 사라졌습니다.
뒤러는 이 상황을 어떻게 보았을까요. 그는 루터의 사상에 공감했습니다. 교회의 부패를 비판했습니다. 그러나 예술가로서 이미지의 파괴를 볼 때 그의 마음이 어떠했는지는 기록에 남아 있지 않습니다.
홀바인은 바젤에서 이것을 직접 경험했습니다. 1529년 바젤의 성상파괴 운동으로 교회 작업 의뢰가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그래서 그는 영국으로 떠났습니다.
크라나흐는 루터교 예술의 새로운 방향을 찾는 데 기여했습니다. 이미지를 완전히 없애는 것이 아닌, 성경에 근거한 교육적 이미지를 만드는 것.
반 룬은 이 위기에서 예술의 근본적인 취약성을 봅니다. 예술은 사회와 분리될 수 없습니다. 사회가 격변할 때 예술도 격변합니다. 르네상스가 이탈리아에서 꽃피었을 때, 그 꽃들이 북쪽으로 퍼져나갔을 때, 그것들이 종교적 격변과 만났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어떤 꽃은 살아남았고 어떤 꽃은 짓밟혔습니다. 그리고 짓밟힌 자리에서 새로운 것이 자랐습니다.


반 룬이 북유럽 르네상스에서 읽어낸 것

반 룬은 이 챕터를 마무리하면서 이탈리아와 북유럽 르네상스의 차이가 무엇을 가르쳐주는지를 성찰합니다.
이탈리아 르네상스는 빛을 향했습니다. 아름다움, 이상, 완벽함. 그것이 파르테논에서 배운 것이었고, 고대 조각에서 배운 것이었습니다. 인간의 가장 아름다운 가능성을 예술로 표현하는 것.
북유럽 르네상스는 다른 것도 보았습니다. 그림자. 죽음. 도덕적 책임. 내면의 신앙. 그뤼네발트의 뒤틀린 그리스도, 홀바인의 해골, 뒤러의 《멜랑콜리아》. 이것들이 어둠에 대한 집착인가. 반 룬은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것들이 삶에 대한 더 완전한 시각이라고 봅니다. 아름다움만을 보는 것은 절반의 시각입니다. 아름다움과 함께 고통을, 삶과 함께 죽음을, 빛과 함께 그림자를 보는 것이 더 완전합니다. 그리고 그 완전한 시각에서 더 깊은 예술이 나옵니다.
반 룬은 또한 지리적 교차로에 있는 문화의 창조성에 주목합니다. 뒤러는 이탈리아와 독일 사이에 있었습니다. 홀바인은 독일과 영국 사이에 있었습니다. 에라스무스는 유럽 전체를 돌아다녔습니다. 이 경계 위의 삶이 이들을 어느 한 전통에 안주하지 않게 만들었습니다. 두 세계를 보는 눈이 어느 한 세계만 보는 눈보다 더 많은 것을 봅니다.
1937년 반 룬이 이 책을 쓸 때, 뒤러의 고향 뉘른베르크는 나치 전당대회의 도시가 되어 있었습니다. 뒤러의 그림들이 걸려 있는 그 도시에서 인간의 존엄성을 부정하는 집회가 열리고 있었습니다. 반 룬은 이 아이러니를 직접 언급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가 뒤러의 이야기를 이토록 정성스럽게 쓴 데는 이유가 있었을 것입니다.
뒤러가 말한 것이 있습니다. 예술가의 내면에 담긴 것이 그의 손을 통해 작품으로 나온다고. 선한 마음에서 선한 예술이 나온다고. 이것이 맞는다면, 역도 맞습니다. 위대한 예술이 남아있는 곳에서 그 예술을 만든 정신도 살아있습니다.
뒤러의 작품들이 살아있는 한, 뒤러의 정신도 살아있습니다. 그 정신은 열린 마음, 겸손한 경이로움, 그리고 인간 능력에 대한 깊은 믿음이었습니다. 아즈텍 황금 앞에서 경탄할 수 있는 마음. 그것이 예술가의 마음이고, 그것이 인문주의의 마음입니다.


이번 화 감상 추천

알프스 너머 북유럽 르네상스의 깊고 도덕적인 정신을 음악으로 경험해 보시기를 권합니다.

    • 하인리히 이자크, 《인스브루크, 나는 너를 떠나야 한다》 : 뒤러와 같은 시대를 살았던 플랑드르 출신 작곡가가 만든 이 가곡은 북유럽 르네상스 음악의 서정적 핵심을 담고 있습니다. 이별의 슬픔이 단순하고 직접적인 선율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뒤러의 판화들이 가진 직접성과 감정적 깊이가 음악에서 들립니다.

    • 마르틴 루터 작곡, 《내 주는 강한 성이요》 : 루터 자신이 작곡한 이 찬송가는 북유럽 종교개혁과 예술의 관계를 가장 직접적으로 보여줍니다. 단순하고 강인하고 민중적입니다. 크라나흐의 그림들이 시각적 언어로 표현한 것을 이 음악이 청각적 언어로 표현합니다. 바흐가 나중에 이 선율을 코랄 전주곡으로 편곡하면서 북유럽 음악의 위대한 전통이 이어졌습니다.


다음 화 예고

다음 시간에는 북유럽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이 만나는 가장 극적인 순간으로 들어갑니다. 루터의 95개 조항이 유럽을 바꾸었을 때, 예술도 바뀌었습니다. 그러나 루터는 혼자가 아니었습니다. 그의 등 뒤에는 한 특별한 찬송가가 있었습니다. 루터의 노래이자 신앙의 노래이자 저항의 노래. 이 음악이 어떻게 종교개혁을 가능하게 하고, 종교개혁이 어떻게 예술을 변화시켰는지를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EP.32 : 나의 주는 견고한 요새: 루터와 종교개혁에서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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