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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사회적 권력의 원천

「권력의 지도」 71화, 1968년 : 이념 권력의 반란

by 책으로떠나는여행 2026. 6. 23.

1968년 5월 파리.

학생들이 대학을 점거했습니다.

바리케이드가 세워졌습니다. 돌멩이가 날아다녔습니다. 최루 가스가 거리를 채웠습니다.

벽에 글씨가 쓰였습니다.

"상상력에 권력을!"

"현실주의자가 되어라.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라."

"금지하는 것을 금지하라."

드골 대통령이 측근에게 물었습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냐?"

그의 측근도 몰랐습니다.

프랑스 노동자 1000만 명이 총파업에 들어갔습니다. 사무직, 공장 노동자, 교사, 의사. 프랑스 경제가 마비되었습니다.

드골이 비밀리에 독일에 있는 프랑스 군대 지휘관을 만났습니다. 필요하면 군대를 쓸 수 있는지 확인했습니다.

그러나 군대를 쓰지 않았습니다.

몇 주 후 상황이 진정되었습니다. 학생들이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드골이 재확인되었습니다.

혁명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왜 1968년이 역사를 바꾸었을까요.

마이클 만은 1968년을 이념 권력이 제도적 권력에 도전하여 완전한 혁명은 이루지 못했지만 문화와 의식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킨 순간으로 봅니다. 정치 혁명이 아니라 이념 혁명이었습니다. 그 이념 혁명의 효과가 수십 년에 걸쳐 세계를 바꾸었습니다.


1장. 왜 1968년이었나 : 반란의 조건


1968년이 왜 특별했을까요.

반란이 동시에 전 세계에서 일어났습니다. 파리, 베를린, 프라하, 멕시코시티, 도쿄, 뉴욕, 시카고, 베이징.

같은 해, 다른 나라들에서, 다른 이유들로, 비슷한 에너지가 폭발했습니다.

구조적 조건들이 있었습니다.

전후 베이비붐 세대가 청년이 되었습니다. 1945~1950년 출생한 세대가 1968년 18~23세였습니다. 역사상 가장 많은 청년 인구였습니다.

대학 진학률이 폭발했습니다. 황금기의 번영으로 더 많은 가정이 자녀를 대학에 보낼 수 있었습니다. 1950년에서 1968년 사이 서유럽 대학 등록 학생이 3~4배 늘었습니다.

이 대학들이 새로운 이념의 인큐베이터가 되었습니다.

기대의 혁명이었습니다. 황금기가 물질적 풍요를 가져왔습니다. 그런데 청년들이 물질만으로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더 많은 자유를, 더 많은 의미를, 더 많은 참여를 원했습니다.

부모 세대가 생존을 위해 싸웠습니다. 이들은 의미를 위해 싸웠습니다.

베트남 전쟁의 충격이었습니다. 텔레비전이 전쟁을 거실로 가져왔습니다. 최초의 텔레비전 전쟁이었습니다. 불타는 마을. 죽어가는 아이들. 네이팜 폭격.

미국이 자유를 위해 싸운다고 했습니다. 화면이 다른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마이클 만은 1968년의 조건을 풍요가 만든 새로운 기대와 현실의 간극이 이념 폭발을 만들었다는 것으로 봅니다. 가난한 사람들이 혁명을 만들지 않았습니다. 가난에서 벗어났지만 더 많은 자유와 의미를 원하는 사람들이 만들었습니다.


2장. 베트남 반전 운동 : 미국이 미국을 향해 싸우다


1968년 1월 31일, 구정 공세가 시작되었습니다.

텔레비전 앞 미국인들이 사이공 미 대사관이 공격받는 장면을 보았습니다. 전쟁에서 이기고 있다는 군부의 말이 거짓이었습니다.

반전 운동이 폭발했습니다.

대학 캠퍼스가 중심이었습니다. 징집 카드를 불태웠습니다. 로타(ROTC, 학군 장교 훈련단) 건물을 점거하거나 불태웠습니다. 징집 거부 운동이 조직되었습니다.

마틴 루서 킹이 1967년 베트남 전쟁을 공개적으로 반대했습니다. 그가 말했습니다. "미국이 세계 최대의 폭력 공급자다."

1968년 시카고 민주당 전당대회였습니다. 베트남 정책에 반대하는 시위대가 시카고로 모였습니다. 경찰이 시위대를 폭행했습니다. 텔레비전 카메라 앞에서.

사람들이 외쳤습니다. "온 세계가 지켜보고 있다."

린든 존슨이 재선 불출마를 선언했습니다. 3월 31일. 베트남 전쟁이 그를 무너뜨렸습니다.

켄트 주립 대학 총격 사건(1970년 5월)이었습니다. 정확히 1968년은 아니지만 같은 흐름이었습니다. 주 방위군이 캠퍼스에서 학생 시위대에 발포했습니다. 네 명이 사망했습니다. 모두 반전 시위 학생들이었습니다.

미국이 미국인을 죽였습니다. 미국의 이념에 균열이 생겼습니다.

마이클 만은 반전 운동을 이념 권력이 국가의 군사 정책을 변화시킨 사례로 봅니다. 반전 운동이 직접 전쟁을 끝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전쟁을 지속 불가능하게 만들었습니다. 대중의 이념적 지지를 잃은 전쟁은 오래 지속될 수 없었습니다.


3장. 파리 5월 : 혁명의 언어


프랑스 파리의 5월 운동이 1968년의 상징이었습니다.

왜 파리였을까요. 프랑스 교육 체계가 매우 권위주의적이었습니다. 교수가 강의하고 학생은 받아쓰는. 토론이 없었습니다. 대학 시설이 과밀했습니다.

낭테르 대학에서 학생들이 기숙사 규칙에 항의했습니다. 남학생이 여학생 기숙사를 방문하지 못한다는 규칙에.

작은 불씨였습니다.

에스칼레이션이었습니다. 낭테르 시위가 소르본 대학으로 퍼졌습니다. 경찰이 진입했습니다. 탄압이 더 큰 시위를 만들었습니다.

5월 10일 밤 학생들이 라탱 지구에 바리케이드를 쳤습니다. 경찰이 진압했습니다. 수백 명 부상. 이 장면이 텔레비전에 나왔습니다.

노동자들이 합류했습니다. CGT(프랑스 노동 총연맹)가 파업을 선언했습니다. 학생과 노동자가 연대한다는 것이 비현실적으로 보였습니다. 그러나 일어났습니다.

5월 22일 1000만 명이 파업 중이었습니다.

드골이 사라졌습니다. 5월 29일 드골이 갑자기 파리를 떠났습니다. 아무도 어디 갔는지 몰랐습니다. 독일에 있는 프랑스 군대를 만나고 있었습니다.

다음 날 드골이 돌아와 연설했습니다. 의회 해산을 선언했습니다. 선거로 정당성을 재확인하겠다는.

6월 선거에서 드골이 이겼습니다. 시민들이 무정부 상태보다 드골을 선택했습니다. 혁명이 선거로 패배했습니다.

그러나 무언가가 바뀌었습니다.

벽의 슬로건들이 남았습니다. "상상력에 권력을." 이것이 단순한 구호가 아니었습니다. 새로운 정치의 언어였습니다.

기존 좌파가 경제 권력에 집중했습니다. 계급 착취. 생산 수단 소유. 1968년 좌파가 다른 것도 말했습니다. 일상의 권력. 문화의 권력. 개인의 자율성.

마이클 만은 파리 5월을 이념 권력이 제도 권력에 도전했지만 그 도전이 혁명이 아닌 문화 변혁으로 귀결된 사례로 봅니다. 드골이 이겼습니다. 그러나 1970년대 프랑스가 달라졌습니다. 사회적으로, 문화적으로.


4장. 프라하의 봄 : 다른 종류의 1968년


같은 해, 다른 방향의 반란이 있었습니다.

체코슬로바키아 프라하.

66화에서 이미 살펴보았습니다. 여기서는 1968년 전체 맥락에서 다시 봅니다.

알렉산데르 둡체크가 이끄는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이 "인간적 얼굴을 가진 사회주의"를 시도했습니다. 언론 자유. 정치적 다원주의. 경제 개혁. 소련 지배에서 상대적 자율성.

이것이 서방 학생들의 요구와 달랐습니다.

서방 학생들이 자본주의 체제를 거부했습니다. 체코슬로바키아 학생들이 공산주의 체제의 자유화를 원했습니다.

방향이 반대였습니다. 그러나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기존 권력 구조에 대한 이념적 도전.

소련 탱크가 8월 21일에 왔습니다. 프라하의 봄이 끝났습니다.

얀 팔라흐가 1969년 1월 바츠라프 광장에서 분신했습니다. 소련 점령에 항의하여. 20세의 학생이었습니다.

프라하의 봄이 세계에 준 충격이었습니다. 서방 공산당들이 소련을 비판했습니다. 유로 공산주의가 등장했습니다. 소련식 공산주의가 아닌 독자적 공산주의.

마이클 만은 프라하의 봄을 이념 권력이 정치 권력의 한계에 부딪힌 사례로 봅니다. 이념이 변화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소련의 군사 권력이 그 이념을 짓밟았습니다. 그러나 짓밟힌 이념이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지하에서 계속되었습니다. 1989년에 다시 표면으로 나왔습니다.

 


5장. 민권 운동과 흑인 해방 : 미국의 1968년


미국의 1968년이 특별히 폭발적이었습니다.

마틴 루서 킹 암살(1968년 4월 4일)이었습니다. 멤피스에서 총에 맞았습니다. 환경 미화원 파업을 지지하러 갔다가.

전국 100개 이상의 도시에서 폭동이 일어났습니다. 워싱턴 D.C.에서도. 백악관 근처에서도 연기가 피어올랐습니다.

킹이 평화적 저항을 상징했습니다. 그가 죽자 비폭력의 길이 의문시되었습니다.

블랙 파워 운동이 부상했습니다. 스토클리 카마이클이 말했습니다. "우리는 통합이 아니라 해방을 원한다."

멕시코 올림픽에서 토미 스미스와 존 카를로스가 시상대에서 블랙 파워 주먹을 들었습니다. 금메달, 동메달. 신발 없이 검은 양말로.

이 이미지가 세계로 전송되었습니다.

로버트 케네디 암살(1968년 6월 5일)이었습니다. 킹 암살 두 달 후. 대통령 선거 운동 중. 로스앤젤레스에서.

형 존 케네디(1963년 암살), 마틴 루서 킹(1968년 4월 암살), 로버트 케네디(1968년 6월 암살). 미국 민주주의의 지도자들이 총격으로 사라졌습니다.

이 연속적 암살이 무엇을 의미했을까요. 미국의 폭력적 본성. 평화적 변화의 한계. 많은 사람들이 절망했습니다.

마이클 만은 미국의 1968년을 인종적 정의와 정치 참여를 둘러싼 이념 갈등이 폭력으로 표현된 방식으로 봅니다. 비폭력 이념이 폭력으로 억압될 때 다른 이념들이 공간을 채웁니다. 이것이 1968년 미국이 보여준 것이었습니다.


6장. 페미니즘의 제2물결 : 개인이 정치다


1968년 또는 그 직전부터 새로운 여성 운동이 시작되었습니다.

제2물결 페미니즘이었습니다. 제1물결이 19세기~20세기 초 참정권 운동이었습니다. 법적 권리. 투표권.

제2물결이 달랐습니다. 법적 평등을 넘어선 것들을 요구했습니다.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이다(The Personal is Political)."

이것이 제2물결의 핵심 슬로건이었습니다. 무슨 의미였을까요.

가정 내 권력 관계가 정치적 문제입니다. 누가 집안일을 하는가. 누가 누구에게 복종하는가. 누가 몸의 권리를 결정하는가. 이것들이 사적인 문제가 아니라 권력 구조의 문제입니다.

베티 프리단의 『여성의 신비』(1963년)가 선구였습니다. 교외 주부들의 실존적 공허함을 분석했습니다. 명문대 졸업 후 좋은 남편과 아이들과 편안한 집을 가진 여성들이 왜 공허한가. "이름 없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케이트 밀렛의 『성의 정치학』(1970년)이었습니다. 문학과 문화에서 성 권력 관계를 분석했습니다. 가부장제가 가정에서 시작하여 사회 전체로 구조화된다는.

낙태권 운동이었습니다. 1973년 미국 대법원 로 대 웨이드 판결. 여성의 낙태권을 헌법적 권리로 인정. 이것이 여성의 몸에 대한 자결권 운동의 큰 성과였습니다.

직장에서의 평등이었습니다. 동일 임금. 승진 기회. 성희롱 금지. 이것들이 새로운 요구로 등장했습니다.

가사 노동의 재정의였습니다. 여성의 가사 노동이 경제적 가치가 있다는 주장. 보이지 않는 노동이 경제 체계를 지탱한다는.

마이클 만은 제2물결 페미니즘을 이념 권력이 가장 일상적인 삶의 공간 — 가정 — 으로 침투하여 그곳의 권력 구조를 정치적 문제로 만든 것으로 봅니다. 이것이 혁명적이었습니다. 권력을 국가와 경제에서만 찾지 않고 일상과 문화에서 찾았습니다.


7장. 문화 혁명의 여파 : 무엇이 바뀌었나


1968년의 반란들이 혁명을 만들지 못했습니다.

드골이 살아남았습니다. 닉슨이 당선되었습니다. 소련 탱크가 프라하를 점령했습니다.

기존 권력 구조가 유지되었습니다.

그런데 왜 역사가들이 1968년이 세계를 바꾸었다고 말할까요.

문화가 바뀌었습니다.

1970년대 이후 서방 사회가 달라졌습니다. 이전의 권위주의적 문화가 변했습니다. 젊은이들이 부모에게 완전히 복종하지 않았습니다. 학생들이 교수에게 질문했습니다. 여성들이 남편에게 무조건 복종하지 않았습니다.

섹슈얼리티 혁명이었습니다. 피임약이 1960년대 초 등장했습니다. 1968년 운동이 이것과 결합했습니다. 성적 자유가 요구되었습니다. 혼전 성관계, 동성애에 대한 태도가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환경 운동의 탄생이었습니다. 1968년 이전까지 환경이 중요한 정치 이슈가 아니었습니다. 1972년 로마 클럽이 **『성장의 한계』**를 발표했습니다. 환경 운동이 1968년 반권위주의 정신과 결합하여 성장했습니다.

정체성 정치의 등장이었습니다. 1968년 이후 흑인, 여성, 동성애자, 장애인 등 다양한 집단이 자신의 권리와 인정을 요구했습니다. 계급만이 아닌 다양한 정체성이 정치의 무대에 올랐습니다.

대중문화가 변했습니다. 록 음악, 비틀즈, 밥 딜런. 이것들이 단순한 오락이 아니라 반문화의 표현이었습니다.

마이클 만은 이 문화 변혁을 이념 권력이 제도를 통하지 않고 문화와 의식을 직접 변화시키는 방식의 가장 극적인 사례로 봅니다. 법이 바뀌기 전에 의식이 바뀌었습니다. 제도가 바뀌기 전에 일상이 바뀌었습니다.

 


8장. 1968년의 역설 : 보수 반동을 만들다


1968년이 역설적 결과를 만들었습니다.

반란이 진보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보수 반동도 만들었습니다.

조용한 다수(Silent Majority)였습니다. 닉슨이 1969년 이 개념을 사용했습니다. 시위하지 않고 일하는 평범한 미국인들. 이들이 1968년의 혼란을 두려워했습니다.

닉슨이 이들에게 호소했습니다. 법과 질서. 사회 안정. 과격 세력에 맞서는.

이것이 보수 정치의 새로운 언어가 되었습니다.

반문화에 대한 반발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1968년의 자유화에 불편함을 느꼈습니다. 전통적 가족 가치. 종교. 권위. 이것들을 지키려는 보수 운동이 1970~80년대 성장했습니다.

레이건, 대처의 정치적 상승이 이 반발과 연결되었습니다.

신사회운동의 분열이었습니다. 1968년 이후 좌파가 계급 정치와 정체성 정치로 분열되었습니다. 노동 운동 중심 전통 좌파와 페미니즘, 환경, 인종 등 새로운 운동들 사이의 긴장.

이 분열이 좌파의 정치적 힘을 약화시켰습니다.

마이클 만은 이 역설을 이념 권력이 새로운 해방을 만들면서 동시에 새로운 반작용을 만드는 변증법적 과정으로 봅니다. 1968년이 1980년대 신자유주의 혁명의 씨앗을 뿌렸습니다. 반문화의 자유주의가 전통 가치를 위협한다는 느낌이 보수 반동을 만들었습니다. 73화에서 살펴볼 것입니다.

 


9장. 마이클 만의 분석 : 이념 반란의 구조


마이클 만이 1968년에서 읽어내는 핵심 분석들이 있습니다.

이념 권력이 제도 없이도 변화를 만들 수 있습니다. 1968년 운동들이 국가 권력을 장악하지 못했습니다. 혁명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문화, 의식, 일상이 바뀌었습니다. 이것이 나중에 제도 변화로 이어졌습니다.

의식의 변화가 제도 변화를 선행합니다. 이것이 1968년이 보여준 것이었습니다.

물질적 풍요가 새로운 이념적 요구를 만듭니다. 황금기의 경제 성장이 마스로우 욕구 피라미드를 올라가게 했습니다. 생존과 안전이 어느 정도 충족되자 자아 실현, 자유, 의미를 요구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경제 발전과 사회 변화의 관계입니다. 번영이 사회를 안정시키는 것만이 아닙니다. 번영이 새로운 욕구와 새로운 갈등을 만들기도 합니다.

1968년이 기존 좌파 패러다임을 변환시켰습니다. 전통 좌파가 경제적 계급 갈등에 집중했습니다. 1968년 이후 좌파가 더 복잡해졌습니다. 젠더, 인종, 환경, 문화가 정치의 의제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좌파를 더 풍부하게 만들었습니다. 동시에 더 분열되게 만들었습니다.

마이클 만의 결론이 있습니다.

1968년이 혁명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문화 혁명이었습니다. 문화 혁명이 때로 정치 혁명보다 더 깊고 더 오래가는 변화를 만듭니다.

권위주의적 사회 구조, 성적 위계, 인종 차별, 환경 파괴, 이것들에 이름이 붙고 이념적 도전을 받은 것이 1968년이었습니다. 이름이 붙으면 더 쉽게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것이 1968년의 유산입니다.


1969년 여름, 세계가 달 착륙을 보았습니다.

닐 암스트롱이 달 표면에 첫 발을 내디뎠습니다. "인류의 거대한 도약."

같은 해 우드스탁 페스티벌이 열렸습니다. 40만 명이 뉴욕 농장에 모였습니다. 음악. 자유. 공동체.

같은 달 스톤월 항쟁이 뉴욕에서 일어났습니다. 동성애자들이 경찰 폭력에 맞서 싸웠습니다. 현대 성소수자 권리 운동의 시작.

이 세 사건이 같은 해에 일어났습니다.

인류가 달에 갔습니다. 그리고 지구에서 더 자유로운 사회를 향해 싸웠습니다. 두 가지가 함께.

마이클 만이 1968~69년에서 읽는 것이 있습니다.

이념이 가장 강력할 때는 제도를 통하지 않고 사람들의 의식에 직접 말을 걸 때입니다. 1968년의 반란들이 이것을 했습니다. 아직 이름 없던 억압에 이름을 붙였습니다. 불가능한 것을 상상하게 했습니다.

"상상력에 권력을."

그 상상력이 수십 년에 걸쳐 현실을 바꾸었습니다.

이것이 이념 권력의 힘이고 이념 권력의 가능성입니다.


다음 화 예고 72화, 석유 위기 : 경제 권력의 역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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