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5년 영국 보수당 대표 선거.
마거릿 대처가 에드워드 히스를 물리치고 당 대표가 되었습니다.
한 회의에서 그녀가 핸드백에서 책을 꺼냈습니다.
프리드리히 하이에크의 『자유의 헌법(The Constitution of Liberty)』이었습니다.
그녀가 테이블 위에 책을 내려쳤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믿는 것입니다."
그녀가 말했습니다.
같은 해 미국에서 밀턴 프리드먼이 노벨 경제학상을 받았습니다.
5년 후 대처가 영국 총리가 되었습니다.
1년 후 레이건이 미국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신자유주의 혁명이 시작되었습니다.
이것이 단순한 정권 교체가 아니었습니다. 세계를 운영하는 이념의 교체였습니다. 케인스주의가 30년간 지배했습니다. 그것이 끝나고 새로운 이념이 시작되었습니다.
마이클 만은 신자유주의의 탄생을 이념 권력이 경제 권력의 위기를 이용하여 기존 정치 권력의 틀을 바꾼 과정으로 봅니다. 이념이 먼저였습니다. 경제 조건이 그 이념에 기회를 주었습니다. 그리고 정치가 그 이념을 실행했습니다.
1장. 케인스주의의 위기 : 공간이 열리다
72화에서 살펴보았듯 1970년대 스태그플레이션이 케인스주의의 위기를 만들었습니다.
실업도 높고 인플레이션도 높은 상황. 케인스주의 처방이 맞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이념적 공간을 열었습니다.
케인스주의에 대한 불만이 누적되었습니다.
재정 지출이 인플레이션을 유발한다는 비판. 복지 국가가 노동 유인을 줄인다는 비판. 노조가 임금을 인위적으로 높여 경쟁력을 해친다는 비판. 규제가 기업의 혁신과 성장을 막는다는 비판.
이 비판들이 1950~60년대에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황금기의 번영 앞에 설득력이 없었습니다.
1970년대 번영이 멈추자 비판이 힘을 얻었습니다.
이념의 저장소가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신자유주의 이념이 갑자기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수십 년간 소수 경제학자들이 개발하고 지켜온 것이었습니다.
1947년 하이에크가 몽 펠레린 협회를 창설했습니다. 자유 시장 경제학자들의 국제 네트워크. 케인스주의가 지배하던 시절에도 이들이 대안 이념을 개발했습니다.
시카고 대학교 경제학과. 밀턴 프리드먼이 이끄는. 통화주의 이론을 발전시켰습니다. 인플레이션은 화폐 공급의 문제다. 정부 지출을 줄이고 통화 공급을 통제해야 한다.
마이클 만은 이 준비 기간을 이념이 지배적이지 않을 때도 살아남아 조건을 기다리는 방식으로 봅니다. 신자유주의가 1970년대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수십 년 전부터 개발되어 기회를 기다렸습니다.

2장. 시카고학파 : 이념의 지적 기반
신자유주의의 지적 기반이 어디서 왔을까요.
**밀턴 프리드먼(1912~2006년)**이 핵심이었습니다.
그의 주장들이 있었습니다.
통화주의였습니다. 인플레이션이 항상 화폐적 현상이다. 화폐 공급을 안정적으로 늘리면 인플레이션을 통제할 수 있다. 케인스주의의 재정 정책보다 통화 정책이 중요하다.
자연 실업률이었습니다. 경제에 자연 실업률이 존재한다. 이것을 인위적으로 낮추려 하면 인플레이션만 높아진다. 정부가 완전 고용을 목표로 삼아서는 안 된다.
소비자 주권이었습니다. 개인이 자신에게 무엇이 좋은지 가장 잘 안다. 정부의 온정적 개입보다 개인의 선택이 더 좋은 결과를 만든다.
교육 바우처였습니다. 공립학교 독점을 깨야 한다. 학부모에게 바우처를 주어 학교를 선택하게 한다. 경쟁이 교육 질을 높인다.
1962년 『자본주의와 자유』를 썼습니다. 자유 시장이 정치적 자유의 기반이라는.
하이에크의 기여였습니다. 『노예의 길(The Road to Serfdom)』(1944년). 계획 경제가 필연적으로 전체주의로 이어진다는. 경제적 자유와 정치적 자유가 불가분이라는.
이것이 신자유주의의 가장 강력한 이념적 주장이었습니다. 경제 자유가 정치 자유의 전제 조건이다. 따라서 경제 규제는 자유에 대한 위협이다.
마이클 만은 시카고학파를 경제학이 이념 권력이 되는 과정의 사례로 봅니다. 경제학이 중립적 과학처럼 보이지만 특정 정치 이념을 담고 있습니다. 시카고학파가 자유 시장 이념을 과학의 언어로 포장했습니다.

3장. 칠레 실험 : 신자유주의의 첫 실험실
신자유주의가 처음으로 국가 규모에서 실험된 곳이 칠레였습니다.
1973년 9월 11일, 피노체트 장군의 쿠데타.
아옌데 사회주의 정부가 전복되었습니다. CIA가 관여했습니다. 미국 구리 회사 이익이 걸려있었습니다.
피노체트가 권력을 잡았습니다. 그가 경제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시카고 보이즈가 등장했습니다. 1950년대부터 시카고 대학교가 칠레 경제학자들을 훈련시키는 프로그램을 운영했습니다. 미국 국무부가 자금을 댔습니다. 이들이 시카고 보이즈였습니다.
이들이 피노체트 정부의 경제 정책을 설계했습니다.
정책 내용이었습니다.
국영 기업 민영화. 가격 통제 철폐. 관세 인하. 노조 권한 축소. 공공 지출 삭감. 외국 자본 유치.
프리드먼이 칠레를 방문했습니다. 1975년. 피노체트를 만났습니다. "경제 쇼크 치료"를 조언했습니다.
결과가 복잡했습니다. 인플레이션이 잡혔습니다. 경제 성장이 이루어졌습니다. 가난이 줄었습니다.
그러나 불평등이 심화되었습니다. 사회 지출 삭감으로 교육과 의료가 악화되었습니다. 그리고 정치적 억압이 계속되었습니다. 수천 명이 고문받고 실종되었습니다.
역설이었습니다. 경제적 자유를 확대하기 위해 정치적 자유를 억압하는 독재가 필요했습니다. 하이에크의 이론이 뒤집혔습니다. 자유 시장이 자유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독재가 자유 시장을 만들었습니다.
마이클 만은 칠레 실험을 신자유주의 이념의 첫 국가적 실험이 민주주의 없이 진행된 아이러니로 봅니다. 자유를 표방하는 이념이 억압 아래서 실행되었습니다. 이것이 신자유주의의 이념적 모순을 드러냈습니다.

4장. 대처 : 영국의 신자유주의 혁명
1979년 5월 4일, 마거릿 대처가 영국 총리가 되었습니다.
그녀가 다우닝 가 10번지 앞에서 프란치스코 성인의 기도를 인용했습니다. 분열이 있는 곳에 조화를, 오류가 있는 곳에 진실을.
그러나 그녀가 조화보다 충돌을 만들었습니다.
경제 철학이 있었습니다. 대처가 말했습니다. "사회라는 것은 없습니다. 개인 남성과 여성, 그리고 가족만 있습니다."
이것이 신자유주의 이념의 핵심이었습니다. 사회적 연대보다 개인 책임.
대처리즘의 정책들이었습니다.
통화주의 적용이었습니다. 인플레이션을 잡기 위해 금리를 극단적으로 높였습니다. 1980~81년 경기 침체. 실업률이 12퍼센트로 올랐습니다. 비판이 쏟아졌습니다.
그녀가 말했습니다. "돌아서지 않습니다. 원하신다면 돌아서세요."
인플레이션이 잡혔습니다.
민영화 물결이었습니다. 영국 텔레콤. 영국 가스. 브리티시 에어웨이. 영국 철강. 수자원. 전기. 국영 기업들이 민영화되었습니다.
처음에 낮은 가격으로 주식이 발행되었습니다. 일반 시민들이 샀습니다. "주주 민주주의"를 만든다는 취지였습니다. 실제로 대기업들이 더 많은 주식을 사들였습니다.
광부 파업(1984~85년)이었습니다. 광산 폐쇄 계획에 맞서 광부들이 파업했습니다. 거의 1년. 역사상 가장 긴 산업 분쟁 중 하나.
대처가 광부 노조를 "내부의 적"이라고 불렀습니다. 경찰을 동원했습니다. 광부들이 굶주리며 버텼습니다. 결국 패배했습니다. 영국 광산 산업이 사실상 끝났습니다.
노조 권한 약화였습니다. 파업 권리를 제한하는 법률. 클로즈드 샵(노조 가입 의무) 금지. 노조의 법적 면책 특권 축소.
이것이 영국 노동 운동에 결정적 타격이었습니다.
빅뱅(1986년)이었습니다. 런던 금융 시장 규제 완화. 금융 서비스 산업이 폭발했습니다. 런던이 세계 금융의 중심으로 부상했습니다. 금융 부문이 영국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급격히 늘었습니다. 제조업이 쇠퇴했습니다.
마이클 만은 대처리즘을 이념 권력이 정치 권력을 통해 경제 권력 구조를 근본적으로 재편한 과정으로 봅니다. 대처가 단순히 정책을 바꾼 것이 아니었습니다. 경제의 기본 게임 규칙을 바꾸었습니다. 노조와 국가의 역할을 줄이고 시장과 자본의 역할을 늘렸습니다.
5장. 레이건 : 미국의 신자유주의 혁명
1981년 1월 20일, 로널드 레이건이 취임했습니다.
취임 연설에서 그가 선언했습니다.
"정부가 문제의 해결책이 아닙니다. 정부가 문제입니다."
이것이 레이거니즘의 핵심이었습니다.
레이거노믹스의 내용이었습니다.
감세가 핵심이었습니다. 최고 한계 세율을 70퍼센트에서 28퍼센트로 낮추었습니다. 이것이 공급 측 경제학(Supply-Side Economics)이었습니다. 부자들의 세금을 낮추면 그들이 더 투자한다. 그 투자가 일자리를 만든다. 그 효과가 가난한 사람들에게 떨어진다. 낙수 효과(Trickle-Down Economics).
비판자들이 다르게 불렀습니다. 부두 경제학(Voodoo Economics)이라고. 아버지 부시가 공화당 경선에서 레이건에 맞서며 쓴 표현이었습니다.
규제 완화였습니다. 기업 규제를 줄였습니다. 환경 규제. 금융 규제. 노동 안전 규제.
군비 확장이었습니다. 이것이 신자유주의와 모순처럼 보였습니다. 정부 지출을 줄인다면서 군비는 늘렸습니다. 재정 적자가 폭증했습니다.
항공 관제사 파업(1981년)이었습니다. 레이건이 파업한 관제사들을 해고했습니다. 11,000명. 다시는 연방 정부 직원으로 고용하지 않겠다고 선언했습니다.
이것이 미국 노동 운동에 충격을 주었습니다. 대처가 광부들을 무찌른 것처럼 레이건이 관제사들을 무찔렀습니다.
레이건의 이념적 혁신이었습니다. 레이건이 낙관주의와 민족주의를 신자유주의와 결합했습니다. 감세와 규제 완화를 아메리칸 드림의 회복으로 포장했습니다. 정부를 적으로 시장을 친구로.
이것이 노동 계층 백인들에게도 호소력을 가졌습니다. "레이건 민주당원들." 전통적 민주당 지지자들이 레이건에게 투표했습니다.
마이클 만은 레이거니즘을 이념이 물질적 이익과 무관하게 작동할 수 있음의 사례로 봅니다. 레이건의 감세가 주로 부자들에게 혜택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많은 중산층과 노동 계층이 레이건을 지지했습니다. 이념이 경제적 자기 이익을 압도했습니다.

6장. 워싱턴 컨센서스 : 신자유주의의 세계화
신자유주의가 영국과 미국에서 시작했지만 전 세계로 퍼졌습니다.
워싱턴 컨센서스였습니다. 1989년 경제학자 존 윌리엄슨이 이름을 붙였습니다. IMF, 세계은행, 미국 재무부가 공유하는 경제 정책 패키지.
내용이 있었습니다. 재정 긴축. 금리 자유화. 환율 자유화. 무역 자유화. 외국인 직접 투자 자유화. 민영화. 규제 완화. 재산권 보호.
이것들이 개발도상국이 따라야 할 표준 처방이었습니다.
채무 위기와 구조 조정이었습니다. 1970년대 석유 달러가 넘쳐났습니다. 서방 은행들이 이 돈을 개발도상국에 빌려주었습니다. 1980년대 미국 금리가 급등했습니다. 개발도상국들의 채무 이자가 폭등했습니다.
1982년 멕시코 채무 불이행. 연쇄 위기가 라틴아메리카를 덮쳤습니다.
IMF가 구제 금융을 제공했습니다. 조건이 있었습니다. 구조 조정. 워싱턴 컨센서스 처방을 따르라는.
정부 지출 삭감. 공기업 민영화. 시장 자유화. 이것들이 강요되었습니다.
결과가 논쟁적이었습니다. 일부 나라에서 인플레이션이 잡히고 거시 경제가 안정되었습니다. 그러나 사회적 비용이 컸습니다. 빈곤이 심화되었습니다. 불평등이 늘었습니다. 사회 서비스가 악화되었습니다.
1990년대 아시아 금융 위기(1997년). IMF가 다시 구제 금융을 주었습니다. 조건이 다시 구조 조정.
한국, 인도네시아, 태국. 이 나라들이 강요된 긴축으로 더 심한 경기 침체를 경험했다는 비판이 나왔습니다.
마이클 만은 워싱턴 컨센서스를 경제 이념이 국제 제도를 통해 강제되는 방식의 가장 명확한 사례로 봅니다. 신자유주의가 이론적으로 자발적 시장 선택을 주장합니다. 그러나 워싱턴 컨센서스는 채무 조건으로 강요되었습니다. 이것이 이념과 현실의 모순이었습니다.

7장. 신자유주의의 성과와 비용 : 무엇이 좋았고 무엇이 나빴나
신자유주의가 세계에 무엇을 했을까요.
이것이 논쟁적 질문입니다. 지지자와 비판자들이 서로 다른 그림을 보여줍니다.
성과가 있었습니다.
인플레이션이 잡혔습니다. 1970년대 말 두 자릿수 인플레이션이 1980년대 말 한 자릿수로 낮아졌습니다.
경제 성장이 이루어졌습니다. 1990년대 미국 경제가 황금기를 경험했습니다. 정보 기술 혁명과 결합하여. 실업률이 낮아졌습니다.
무역이 폭발했습니다. 자유 무역이 세계 무역을 성장시켰습니다. 동아시아가 수출 주도 성장으로 빈곤을 줄였습니다.
소련이 붕괴했습니다. 물론 신자유주의만의 공이 아니지만 자유 시장 이념의 승리로 해석되었습니다.
비용도 컸습니다.
불평등이 심화되었습니다. 1980년대 이후 선진국들에서 소득 불평등이 증가했습니다. 중산층이 상대적으로 축소되었습니다. 상위 1퍼센트가 가져가는 몫이 늘었습니다.
금융화가 심해졌습니다. 금융 규제 완화로 금융 부문이 비대해졌습니다. 2008년 금융 위기의 씨앗이 되었습니다.
공공재가 약화되었습니다. 공공 투자 감소. 인프라 노후화. 교육, 의료의 불평등.
일자리의 질이 악화되었습니다. 규제 완화와 노조 약화로 고용 불안정이 늘었습니다. 비정규직, 긱 경제의 전신이었습니다.
마이클 만은 이 성과와 비용을 신자유주의가 어떤 사람들에게 좋았고 어떤 사람들에게 나빴는가의 문제로 봅니다. 자본 소유자들에게 더 좋았습니다. 노동자들에게는 복잡했습니다. 효율성이 높아졌지만 안정성이 줄었습니다. 이 결과 분배가 신자유주의의 정치적 지속 가능성을 결정했습니다.

8장. 신자유주의의 이념적 기반 : 왜 사람들이 믿었나
신자유주의가 왜 그렇게 광범위하게 받아들여졌을까요.
자유의 이념이었습니다. 신자유주의가 자유의 언어를 사용했습니다. 시장 선택의 자유. 기업의 자유. 정부 간섭으로부터의 자유.
자유가 20세기 가장 강력한 정치 이념이었습니다. 신자유주의가 이 이념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기술 언어의 포장이었습니다. 신자유주의가 경제학의 언어로 포장되었습니다. 중립적이고 과학적인 것처럼 보였습니다. 정치적 이념이 아니라 경제적 진실처럼.
이것이 비판을 어렵게 만들었습니다. 신자유주의를 비판하면 경제학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소련의 실패가 대안을 제거했습니다. 1989~1991년 소련 붕괴가 신자유주의에게 이념적 승리를 주었습니다. 사회주의의 실패가 자본주의가 옳다는 증거로 해석되었습니다.
후쿠야마의 "역사의 종말." 자유민주주의와 자유 시장이 인류 역사의 종착점이라는.
중산층의 지지였습니다. 많은 중산층이 세금 감소와 개인 선택의 확대를 환영했습니다. 단기적으로 자신들에게 이익이 되는 정책처럼 보였습니다.
마이클 만은 신자유주의의 이념적 성공을 이념이 물질적 이익뿐만 아니라 문화, 정체성, 자유 욕구와 결합할 때 더 강력해진다는 것으로 봅니다. 신자유주의가 단순히 부자들의 이념이 아니었습니다. 광범위한 대중에게 특정 종류의 자유와 기회를 약속했습니다.

9장. 마이클 만의 분석 : 신자유주의 혁명의 구조
마이클 만이 신자유주의 탄생에서 읽어내는 핵심 분석들이 있습니다.
이념이 선행했습니다. 신자유주의 이념이 1970년대 위기 이전에 이미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위기가 공간을 열었을 때 이 이념이 들어왔습니다. 우연이 아니라 준비된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이념 권력의 작동 방식입니다. 지배적이지 않을 때도 이념이 살아남아야 합니다. 그 이념을 지탱하는 제도적 기반이 필요합니다. 몽 펠레린 협회, 시카고 대학교, 싱크탱크들이 이 역할을 했습니다.
경제 위기가 이념 전환의 기회를 만들었습니다. 스태그플레이션이 케인스주의를 약화시켰습니다. 이 약화가 대안 이념의 부상을 가능하게 했습니다. 경제 권력의 실패가 이념 권력의 변화를 촉발했습니다.
계급 이해가 이념 선택을 완전히 결정하지 않습니다. 많은 노동자들이 자신의 경제적 이익에 반하는 것처럼 보이는 신자유주의를 지지했습니다. 이념이 계급 이익보다 더 복잡한 방식으로 작동합니다. 자유, 정체성, 문화적 가치가 경제 계산을 압도할 수 있습니다.
신자유주의가 권력 구조를 바꿨습니다. 노조가 약화되었습니다. 금융 자본이 강화되었습니다. 국가의 역할이 축소되었습니다. 이 구조 변화가 이후 수십 년간 지속되었습니다.
마이클 만의 결론이 있습니다.
신자유주의 혁명이 케인스주의만큼 급진적인 이념 변화였습니다. 그러나 반대 방향으로. 케인스주의가 국가가 시장을 규제하는 방향이었습니다. 신자유주의가 시장이 국가를 규제하는 방향이었습니다.
이 전환이 부분적으로 옳았습니다. 케인스주의가 지나쳤던 측면들이 있었습니다. 국가 지출의 비효율. 노조의 과도한 권력.
그러나 동시에 신자유주의도 지나쳤습니다. 불평등이 심화되었습니다. 금융 위기가 왔습니다. 사회 안전망이 약화되었습니다.
모든 이념이 자신의 성공 안에 실패의 씨앗을 품고 있습니다. 케인스주의가 그랬습니다. 신자유주의도 그러했습니다.
그 실패가 74화에서 살펴볼 소련 붕괴와 80화에서 살펴볼 2008년 금융 위기로 이어졌습니다.

1979년, 대처가 취임했습니다.
1981년, 레이건이 취임했습니다.
두 사람이 만났을 때 레이건이 말했습니다. "마거릿, 우리가 해야 할 것들이 많습니다."
대처가 답했습니다. "그것들을 이미 했습니다, 로니."
그들이 했습니다. 세계를 바꾸었습니다.
그러나 마이클 만이 지적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들이 했던 것들이 결국 새로운 문제들을 만들었습니다. 불평등. 금융화. 공공재 약화. 2008년 금융 위기. 포퓰리즘의 부상.
이것이 이념이 권력을 잡을 때의 패턴입니다. 이념이 문제를 해결하면서 동시에 새로운 문제를 만들어냅니다. 그 새로운 문제들이 다음 이념 변화의 조건이 됩니다.
역사는 이렇게 움직입니다.
한 이념이 지배하고, 그 지배가 모순을 만들고, 새로운 이념이 그 모순에서 나옵니다.
이것이 마이클 만의 핵심 통찰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세계를 이해하는 열쇠입니다.
다음 화 예고 74화, 소련 붕괴 : 이념 권력의 자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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