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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사회적 권력의 원천

「권력의 지도」 68화, 제3세계와 탈식민 : 새로운 행위자의 등장

by 책으로떠나는여행 2026. 6. 20.

1955년 4월, 인도네시아 반둥.

29개국 대표들이 모였습니다.

아시아와 아프리카에서 온 사람들이었습니다. 인도의 네루. 이집트의 나세르. 중국의 저우언라이. 인도네시아의 수카르노.

이들이 공통점을 가졌습니다. 모두 식민 지배를 경험했습니다. 모두 최근에 독립했거나 독립을 추구하고 있었습니다.

수카르노가 개막 연설을 했습니다.

"식민주의가 오늘날 많은 형태를 취하고 있습니다. 경제적 지배로, 지식 지배로, 실제 물리적 지배로. 이것들을 모두 끝내야 합니다."

그의 말이 박수를 받았습니다.

이것이 반둥 회의였습니다. 제3세계 개념의 탄생 순간 중 하나였습니다.

제1세계도 아니고 제2세계도 아닌. 자본주의 서방도 아니고 공산주의 소련도 아닌. 자신들의 길을 가겠다는.

마이클 만은 탈식민화와 제3세계 운동을 새로운 행위자들이 국제 권력 체계에 등장하는 과정으로 봅니다. 이것이 단순히 정치적 독립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새로운 이념들이 만들어졌습니다. 새로운 군사 전략들이 발전했습니다. 새로운 경제 요구들이 제기되었습니다. 냉전이라는 이분법적 세계에서 제3의 공간을 만들려는 시도였습니다.


1장. 탈식민화의 물결 : 왜 1945년 이후에 가속되었나


1945년 이전 세계 인구의 약 3분의 1이 식민 지배 아래 있었습니다.

1975년 주요 식민지가 거의 모두 독립했습니다.

30년 만에 일어난 변화였습니다.

왜 이 시기에 가속되었을까요.

전쟁이 유럽 제국주의를 약화시켰습니다. 2차 세계대전이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벨기에를 소진시켰습니다. 식민지를 유지하는 물리적·경제적 능력이 줄었습니다.

일본이 동남아시아를 점령하면서 유럽인들의 무적 신화를 깼습니다. 59화에서 살펴보았듯. 아시아인들이 유럽인들을 군사적으로 이길 수 있다는 것이 증명되었습니다.

식민지인들의 전쟁 참여가 의식을 바꾸었습니다. 수백만 명의 인도인, 아프리카인, 아시아인들이 유럽의 전쟁에 참전했습니다.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해 싸웠습니다.

전쟁 후 그들이 물었습니다. 우리가 자유를 위해 싸웠다. 그렇다면 우리 자신의 자유는 언제 오는가.

이 질문이 강력한 이념적 정당성을 가졌습니다.

미국과 소련 모두 식민주의에 반대했습니다. 각자의 이유로. 미국이 자유민주주의 이념으로. 소련이 반제국주의 이념으로.

냉전의 두 강대국이 모두 식민지 해방을 지지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었습니다. 이것이 식민 제국들이 버틸 이념적 공간을 더 좁혔습니다.

유엔이 새로운 규범을 만들었습니다. 유엔 헌장이 민족자결을 원칙으로 선언했습니다. 이것이 식민 지배에 대한 법적·이념적 정당성을 제거했습니다.

마이클 만은 탈식민화를 이념 권력의 변화가 제국의 물리적 유지를 불가능하게 만든 과정으로 봅니다. 군사력이 없어서 제국들이 무너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군사력을 사용하는 것의 이념적 정당성이 사라졌을 때 무너졌습니다.


2장. 인도의 독립 : 비폭력 저항의 힘


1947년 8월 15일, 인도가 독립했습니다.

이것이 탈식민화의 가장 중요한 사건이었습니다. 세계 인구의 5분의 1이 식민 지배에서 벗어났습니다.

간디의 비폭력 저항이었습니다. 모한다스 간디가 발전시킨 사티아그라하(Satyagraha) — 진리의 힘, 영혼의 힘. 비폭력 불복종을 통해 불의에 저항한다.

소금 행진(1930년). 간디가 인도 해안까지 385킬로미터를 걸었습니다. 소금세에 반대하여. 수천 명이 따라왔습니다. 바닷물에서 소금을 만들었습니다. 영국 식민법을 어기는 상징적 행위였습니다.

이것이 어떻게 효과적이었을까요. 비폭력이 영국의 폭력적 대응을 도덕적으로 부당하게 만들었습니다. 국제 여론이 인도 편이 되었습니다. 영국 내에서도 비판이 높아졌습니다.

그러나 독립이 비폭력만으로 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2차 세계대전이 결정적이었습니다. 영국이 소진되었습니다. 인도를 유지하는 비용이 이익을 넘어섰습니다.

분단의 비극이었습니다. 독립이 분할과 함께 왔습니다. 인도와 파키스탄으로. 힌두교와 이슬람교의 분리. 약 1000만~1500만 명이 이주했습니다. 약 20만~200만 명이 종파 폭력으로 사망했습니다.

간디가 분할을 반대했습니다. 그리고 1948년 힌두 극단주의자에게 암살되었습니다.

독립 인도의 외교 노선이었습니다. 네루가 제1대 총리였습니다. 그가 비동맹을 선택했습니다. 미국도 소련도 아닌. 독자적 길.

이것이 반둥 회의로 이어졌습니다.

마이클 만은 인도 독립을 이념 권력(비폭력 저항)이 군사 권력의 열세를 극복하는 방식의 가장 중요한 사례로 봅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념 권력이 분열의 이념(종교 민족주의)에 의해 파괴되는 방식도 보여주었습니다.


3장. 알제리 독립 전쟁 : 폭력으로 쟁취한 자유


인도와 다른 방식의 탈식민화가 있었습니다.

알제리였습니다.

알제리의 특수성이었습니다. 알제리가 단순한 식민지가 아니었습니다. 프랑스가 알제리를 자국 영토로 선언했습니다. 약 100만 명의 프랑스 정착민(피에 누아, Pieds-Noirs)이 살았습니다. 이들이 경제와 정치를 지배했습니다.

1200만 명의 알제리 무슬림들이 2등 시민이었습니다.

민족해방전선(FLN)이 독립 투쟁을 이끌었습니다. 1954년 봉기를 시작했습니다. 게릴라 전쟁이었습니다. 프랑스 군사 시설, 경찰서, 때로 민간인을 공격했습니다.

프랑스가 강경하게 대응했습니다. 약 50만 명의 군대를 파병했습니다. 고문이 사용되었습니다. 마을들이 파괴되었습니다. 약 200만 명의 알제리인이 강제 수용소로 보내졌습니다.

전쟁이 프랑스를 분열시켰습니다. 프랑스 내에서 고문 사용에 대한 비판이 터져나왔습니다. 철학자 사르트르가 전쟁을 비판했습니다. 반전 운동이 성장했습니다.

1958년 정치 위기였습니다. 알제리의 프랑스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켰습니다. 드골을 권력으로 복귀시켰습니다. 알제리 독립을 막기 위해.

역설이었습니다. 드골이 결국 알제리 독립을 허용했습니다.

1962년 에비앙 협정. 알제리가 독립했습니다. 8년간의 전쟁. 약 20~40만 명의 알제리인이 사망했습니다.

마이클 만은 알제리를 탈식민화가 때로 대규모 폭력 없이는 불가능했던 방식의 사례로 봅니다. 비폭력 저항이 인도에서 효과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알제리처럼 정착민 식민지에서는 달랐습니다. 정착민들이 권력을 포기하지 않으려 했습니다. 폭력이 불가피했습니다.


4장. 아프리카의 해 : 1960년의 충격


1960년이 아프리카 역사의 전환점이었습니다.

이 한 해에 17개 아프리카 국가가 독립했습니다.

카메룬. 토고. 말리. 세네갈. 마다가스카르. 콩고(프랑스). 소말리아. 베냉. 니제르. 부르키나파소. 코트디부아르. 차드. 중앙아프리카공화국. 콩고(벨기에). 가봉. 나이지리아. 모리타니.

이것이 **아프리카의 해(Year of Africa)**였습니다.

왜 이렇게 한꺼번에 독립했을까요. 프랑스가 전략을 바꾸었습니다. 1958년 드골이 프랑스 연합을 제안했습니다. 각 식민지가 자치권을 가지되 프랑스와 연합을 유지한다. 대부분이 이것을 택했습니다. 기니만 완전 독립을 선택했습니다.

그 후 연합이 완전 독립으로 가는 과도기가 되었습니다.

콩고의 독립과 혼란이었습니다. 벨기에령 콩고가 1960년 6월 30일 독립했습니다. 벨기에가 극히 짧은 준비 기간을 주었습니다. 콩고에 아프리카인 장교가 단 한 명도 없었습니다. 대학 졸업자가 30명 미만이었습니다.

독립 직후 혼란이 왔습니다. 군대가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카탕가 지방이 분리를 선언했습니다. 벨기에가 다시 군대를 보냈습니다. 유엔이 개입했습니다.

총리 파트리스 루뭄바가 소련에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이것이 CIA의 주의를 끌었습니다. 루뭄바가 1961년 암살되었습니다. CIA가 관여했다는 증거가 있습니다.

모부투 세세 세코가 집권했습니다. 친서방 독재자. 1965~1997년. 32년간. 미국이 지원했습니다. 반공이라는 이유로.

마이클 만은 아프리카의 독립을 공식 주권이 실질적 자율성을 보장하지 않는 방식으로 봅니다. 국기가 바뀌었습니다. 그러나 경제 구조, 채무 관계, 강대국 개입이 지속되었습니다. 신식민주의라는 개념이 여기서 나왔습니다.


5장. 게릴라 전쟁의 이론 : 마오, 체, 기아프의 전략


탈식민화가 새로운 군사 전략을 만들었습니다.

약한 세력이 강한 세력에 맞서는 방법. 게릴라 전쟁이었습니다.

마오쩌둥의 이론이었습니다. 중국 공산당이 국민당과 일본에 맞서 싸우면서 발전시킨 전략이었습니다.

인민 전쟁의 세 단계. 처음에 적이 강하고 우리가 약할 때는 방어하면서 민중의 지지를 얻는다. 다음에 균형이 잡히면 적극적으로 게릴라 작전을 펼친다. 마지막에 우리가 강해지면 정규전으로 결전을 한다.

민중이 물고 적이 물고기라면 민중은 물이다. 물 없이 물고기가 살 수 없듯 민중의 지지 없이 혁명군이 존재할 수 없다.

체 게바라의 포코 이론이었습니다. 쿠바 혁명의 경험에서 나왔습니다. 소수의 혁명 전위대(foco)가 먼저 활동을 시작한다. 그 활동이 민중의 혁명 의식을 깨운다. 민중이 합류한다. 혁명이 완성된다.

마오와 달리 체는 조건이 무르익기를 기다리지 않았습니다. 혁명 전위대가 그 조건을 만들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보 응우옌 지압의 전략이었습니다. 베트남 독립 전쟁과 대미 전쟁을 이끈 북베트남 장군. 그는 말했습니다. "적이 공격하면 우리는 후퇴한다. 적이 멈추면 우리는 교란한다. 적이 지치면 우리는 공격한다. 적이 후퇴하면 우리는 추격한다."

끝없는 소모전. 적의 물질적 우위를 인내와 정치적 의지로 극복한다.

마이클 만은 이 전략들을 군사 권력이 절대적 열세에서도 이념 권력과 결합할 때 어떻게 효과적이 될 수 있는지의 이론화로 봅니다. 게릴라 전쟁이 단순히 전술이 아니었습니다. 정치적 전략이었습니다. 군사적 승리보다 정치적 의지의 소진을 목표로 했습니다.


6장. 비동맹 운동 : 제3의 길을 찾아서


반둥 회의(1955년)가 시작이었습니다.

비동맹 운동(NAM, Non-Aligned Movement)이 1961년 유고슬라비아 베오그라드에서 공식 출범했습니다. 25개국.

세 명의 지도자가 중심이었습니다.

인도의 네루였습니다. 냉전의 이분법을 거부했습니다. 두 진영 모두 제국주의 논리를 가졌습니다. 인도는 독자적 길을 간다.

이집트의 나세르였습니다. 1956년 수에즈 운하를 국유화했습니다. 영국, 프랑스, 이스라엘이 군사 개입했습니다. 미국이 이것을 막았습니다. 나세르가 아랍 민족주의의 영웅이 되었습니다.

유고슬라비아의 티토였습니다. 소련의 통제를 거부한 유일한 동유럽 지도자. 독자적 사회주의를 추구했습니다.

비동맹이 무엇을 의미했을까요. 군사 동맹 거부. 두 강대국 모두에게 거리 유지. 독립적 외교 정책.

그러나 현실에서 비동맹이 완전하지 않았습니다.

인도가 소련제 무기를 구입했습니다. 이집트가 소련 원조를 받았습니다. 많은 비동맹 국가들이 사실상 한쪽에 가까웠습니다.

비동맹의 한계가 있었습니다. 두 강대국이 비동맹을 허용하지 않으려 했습니다. "우리 편이 아니면 적"이라는 논리. CIA가 중립적 지도자들을 전복했습니다. KGB가 친소 운동을 지원했습니다.

마이클 만은 비동맹 운동을 정치 권력이 강대국 체계에서 자율성을 유지하려는 약소국들의 시도로 봅니다. 부분적으로 성공했습니다. 유엔에서 목소리를 냈습니다. 국제 규범 형성에 기여했습니다.

그러나 경제적 자립 없이 진정한 정치적 자율성이 어렵다는 한계를 보여주었습니다.


7장. 베트남 : 탈식민 전쟁의 완성


베트남이 탈식민화와 냉전이 가장 극적으로 충돌한 전장이었습니다.

호치민의 투쟁이었습니다. 호치민이 1919년 파리 강화 회의에 청원서를 냈습니다. 베트남 독립을 요구하며. 무시되었습니다.

그가 공산주의자가 되었습니다. 마르크스주의가 민족 해방의 이념적 도구를 제공했습니다. 레닌의 제국주의론이 베트남 상황을 설명해주었습니다.

1차 인도차이나 전쟁(1946~1954년)이었습니다. 베트남이 프랑스에 맞서 싸웠습니다.

1954년 디엔비엔푸 전투. 보 응우옌 지압이 이끄는 베트남 독립군이 프랑스 요새를 포위했습니다. 프랑스가 항복했습니다.

같은 해 제네바 협정. 베트남이 17도선으로 분단되었습니다. 2년 후 통일 선거를 한다는 약속.

선거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미국이 공산당이 이길 것을 알고 막았습니다.

2차 인도차이나 전쟁(미국-베트남 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69화에서 더 상세히 살펴볼 것입니다.

여기서는 이것이 탈식민 전쟁이라는 차원을 강조합니다.

호치민이 말했습니다. "우리가 죽여야 하는 적보다 10배 더 죽어도 우리는 이기고 그들은 진다." 이것이 탈식민 민족주의의 논리였습니다. 이 땅이 우리 것이다. 우리가 더 오래 버틴다.

마이클 만은 베트남을 민족해방운동의 이념 권력이 초강대국의 군사 권력과 경제 권력을 이긴 사례로 봅니다. 그러나 그 승리의 비용이 엄청났습니다. 수백만 명이 사망했습니다. 국토가 파괴되었습니다. 전쟁이 수십 년간 지속되었습니다.


8장. 신식민주의 : 독립 이후의 권력 구조


많은 나라들이 독립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자유를 얻었을까요.

가나 초대 대통령 크와메 은크루마가 1965년 『신식민주의: 제국주의의 마지막 단계』를 썼습니다.

그의 주장이 있었습니다. 공식 식민 지배가 끝났습니다. 그러나 경제적 지배가 계속됩니다. 다국적 기업들이 천연 자원을 착취합니다. 금융이 개발도상국을 채무로 묶습니다. 이것이 신식민주의입니다.

구체적 메커니즘들이 있었습니다.

원자재 의존이었습니다. 독립 후에도 아프리카, 아시아, 라틴아메리카가 원자재를 수출하고 공산품을 수입했습니다. 원자재 가격이 낮고 공산품 가격이 높았습니다. 불평등 교환이었습니다.

채무 사슬이었습니다. IMF와 세계은행이 개발 대출을 제공했습니다. 그 대출에 조건이 붙었습니다. 구조 조정 프로그램. 정부 지출 삭감. 국영 기업 민영화. 관세 철폐. 이것들이 외채 조건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조건들이 종종 개발도상국 경제를 더 취약하게 만들었습니다.

정치 개입이었습니다. CIA가 친서방 정권을 지원했습니다. 반서방 정권을 전복했습니다. 과테말라, 이란, 칠레. 경제 자원이 걸린 곳에서.

마이클 만은 신식민주의를 경제 권력이 공식 정치 지배 없이도 지배를 유지하는 방식으로 봅니다. 이것이 42화에서 살펴본 비공식 제국과 유사했습니다. 영국이 19세기에 경제로 지배했습니다. 미국이 20세기에 같은 방식으로 지배했습니다.


9장. 마이클 만의 분석 : 새로운 행위자들이 바꾼 것


마이클 만이 탈식민화와 제3세계 운동에서 읽어내는 핵심 분석들이 있습니다.

새로운 이념 권력들이 등장했습니다. 반제국주의. 민족 자결. 남-남 연대. 이것들이 새로운 이념들이었습니다. 기존 냉전의 이분법을 도전하는.

이 이념들이 완전히 실현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국제 규범을 바꾸었습니다. 식민 지배가 더 이상 정당화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새로운 군사 전략들이 발전했습니다. 게릴라 전쟁이 약자의 무기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강대국의 군사 우위를 상대화했습니다. 미국이 베트남에서 배웠습니다. 군사력 우위가 전쟁에서 승리를 보장하지 않는다는.

경제 구조가 변화에 저항했습니다. 이것이 탈식민화의 가장 큰 한계였습니다. 정치적 독립은 가능했습니다. 경제적 독립이 어려웠습니다. 원자재 의존, 채무, 다국적 기업의 구조가 독립 이후에도 지속되었습니다.

제3세계가 국제 체계를 민주화하려 했습니다. 유엔에서 다수를 이용하여 새로운 규범을 만들려 했습니다. 신국제경제질서(NIEO, 1974년 UN 결의). 개발도상국에게 더 유리한 무역 조건. 이것이 강대국들에 의해 막혔습니다.

마이클 만의 결론이 있습니다.

탈식민화가 세계 권력 구조를 근본적으로 바꾸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부분적으로 바꾸었습니다. 공식 식민 지배가 불가능해졌습니다. 새로운 국가들이 국제 무대에 등장했습니다. 기존 강대국들이 이들을 완전히 무시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완전한 변화는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무의미하지 않은 변화였습니다.

탈식민화의 물결이 보여주는 것이 있습니다. 권력 구조가 영원하지 않다는. 이념이 현실을 바꿀 수 있다는. 강압이 결국 이념 정당성을 이길 수 없다는.

이것이 마이클 만이 탈식민화에서 읽는 권력의 교훈입니다.

 


1960년, 17개 아프리카 국가들이 독립했습니다.

그해 유엔 총회에서 아프리카 대표들이 처음으로 대거 등장했습니다. 총회의 성격이 바뀌었습니다.

기존 강대국들이 더 이상 혼자 결의를 통과시킬 수 없었습니다. 새로운 목소리들이 있었습니다.

이것이 작은 변화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상징이었습니다. 세계가 더 이상 소수 강대국들만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마이클 만이 탈식민화의 역사에서 마지막으로 읽는 것이 있습니다.

권력이 아래로부터도 변화할 수 있습니다. 총을 가진 사람들이 항상 이기지 않습니다. 이념이 총보다 오래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민족 해방 운동들이 이것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경고가 있습니다.

정치적 해방이 경제적 해방 없이 완성되지 않습니다. 국기를 바꾸는 것이 구조를 바꾸는 것이 아닙니다.

이 미완의 해방이 오늘날도 계속됩니다.


다음 화 예고 69화, 한국전쟁·베트남전쟁 : 냉전의 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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