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32년 봄, 영국 의회 조사위원회가 맨체스터의 한 면직물 공장을 방문했습니다.
위원들이 공장 주인에게 물었습니다. 몇 살부터 아이들을 고용합니까. 주인이 답했습니다. 대여섯 살부터입니다. 하루 몇 시간 일합니까. 열네 시간, 바쁠 때는 열여섯 시간입니다. 휴식은요. 식사 시간에 30분씩 두 번입니다. 임금은요. 일주일에 2~3실링입니다.
위원들이 열 살짜리 소년에게 직접 물었습니다. 발이 아프냐고. 소년이 대답했습니다. 예, 항상 아픕니다. 왜 그러냐고. 하루 종일 서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언제부터 일했냐고. 여섯 살 때부터입니다.
위원들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영국 의회가 아동 노동 규제법을 통과시키기 시작한 것이 이 조사들의 결과였습니다.
그러나 아동 노동은 증상이었습니다. 그 뒤에 있는 구조가 본질이었습니다. 공장이라는 새로운 권력 관계의 공간이었습니다.
마이클 만은 공장제의 등장을 단순한 생산 방식의 변화로 보지 않습니다. 그것은 인간이 인간에 대해 행사하는 권력의 완전히 새로운 형태의 탄생이었습니다. 봉건 영주와 농노의 관계와는 다른, 자본가와 노동자의 새로운 권력 관계가 만들어졌습니다. 이 관계가 이후 200년간 세계 정치의 핵심 갈등 축이 되었습니다.
공장 이전의 생산 : 선대제와 가내 수공업
공장제가 무엇을 바꾸었는지 이해하려면 그 이전이 어떠했는지를 먼저 알아야 합니다.
산업혁명 이전 섬유 생산의 주요 방식은 선대제(putting-out system)였습니다. 상인이 원료(실이나 원사)를 농촌의 가정들에 배달합니다. 가족들이 집에서 방적하거나 직조합니다. 상인이 완성품을 수거해 갑니다. 임금을 지불합니다. 이 과정이 반복됩니다.
이 방식에서 생산은 가정을 기반으로 했습니다. 노동자들이 언제, 얼마나 일할지를 어느 정도 스스로 결정할 수 있었습니다. 가족 전체가 함께 일했습니다. 농업과 수공업을 병행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이것이 이상적이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선대제 노동자들도 가난했고 착취당했습니다. 상인들이 원료 가격과 완성품 수거 가격을 통해 이익을 쥐어짰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노동자들은 자신의 시간과 공간을 어느 정도 통제했습니다.
공장이 이것을 근본적으로 바꾸었습니다.
공장의 탄생 : 권력의 새로운 공간
공장은 왜 만들어졌을까요. 표면적으로는 기술적 이유였습니다. 새로운 기계들 — 수력 방적기, 증기 기관 구동 직기 — 이 너무 크고 비싸서 가정에 둘 수 없었습니다. 집중된 동력원이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마이클 만은 기술적 이유가 전부가 아니었다고 봅니다. 공장에는 기술적 필요를 넘는 사회적 이유가 있었습니다.
감시와 통제였습니다.
선대제에서 상인들은 노동자들이 집에서 제대로 일하는지, 원료를 빼돌리는 것은 아닌지 확인하기 어려웠습니다. 공장에 노동자들을 집결시키면 감시가 가능해졌습니다. 언제, 얼마나, 어떻게 일하는지를 통제할 수 있었습니다.
영국의 경영학자 앤드류 유어가 1835년 공장의 철학에 대해 썼습니다. 공장의 본질은 다양한 성인 노동자들을 하나의 기계의 규칙적 동작에 복종하도록 훈련시키는 것이다. 솔직한 표현이었습니다.
마이클 만은 공장을 미셸 푸코가 분석한 규율 권력(disciplinary power)의 경제적 표현으로 봅니다. 푸코가 감옥, 학교, 병원에서 분석한 것과 같은 규율 메커니즘이 공장에서도 작동했습니다. 분류하고, 배치하고, 감시하고, 처벌하는 권력. 인간을 기계 시스템의 부품으로 만드는 과정이었습니다.
공장의 시간 : 새로운 권력의 규율
공장이 가져온 가장 심오한 변화 중 하나가 시간의 변화였습니다.
농업 사회에서 시간은 자연의 리듬을 따랐습니다. 해가 뜨면 일어나고, 해가 지면 쉬었습니다. 계절에 따라 일의 강도가 달랐습니다. 성인의 날, 장날, 월요일 성월요일(Saint Monday, 영국 장인들이 주말 술을 마신 후 월요일도 쉬는 관행) — 비공식적인 휴식이 있었습니다.
공장 시간은 달랐습니다. 시계가 지배했습니다. 조업 시작 시각에 맞추어 출근해야 했습니다. 지각하면 벌금이었습니다. 일하는 시간과 쉬는 시간이 외부에서 부과되었습니다. 식사 시간도 고정되었습니다. 화장실 가는 횟수도 제한될 수 있었습니다.
역사가 E. P. 톰슨은 이것을 과제 지향적 시간에서 시간 지향적 시간으로의 전환이라고 분석했습니다. 과제 지향적 시간에서는 일이 끝나면 쉬었습니다. 시간 지향적 시간에서는 정해진 시간을 채워야 했습니다. 일이 없어도 공장 안에 있어야 했습니다. 이것이 근본적으로 다른 권력 관계를 만들었습니다.
마이클 만은 공장의 시간 규율을 이념 권력과 경제 권력의 결합으로 봅니다. 시간은 돈이라는 이념이 노동자들에게 내면화되었습니다. 시간을 낭비하는 것이 도덕적 죄악이 되었습니다. 이 이념이 자발적 복종을 만들었습니다. 강제만이 아니라 내면화된 규율이 노동자들을 공장 시간에 맞게 바꾸었습니다.
임금 노동의 구조 : 경제 권력의 새로운 형태
공장제가 만들어낸 가장 결정적인 변화가 임금 노동(wage labor)의 보편화였습니다.
봉건제에서 농노는 영주의 토지에 묶여 있었습니다. 그러나 농노는 관습적 권리를 가졌습니다. 일정한 토지를 경작할 권리, 공유지를 사용할 권리, 특정 의무를 이행하면 보호를 받을 권리.
임금 노동자는 겉으로는 자유로운 존재였습니다. 원하면 일터를 바꿀 수 있었습니다. 계약을 맺고, 계약이 끝나면 떠날 수 있었습니다. 법적으로 자유인이었습니다.
그러나 마이클 만은 이 자유의 이면을 직시합니다. 임금 노동자는 생산 수단이 없었습니다. 기계도, 공장도, 원료도 가지지 못했습니다. 따라서 생존을 위해 자신의 노동력을 팔아야 했습니다. 선택의 자유가 있었지만, 실제로는 일해야 살 수 있는 구조였습니다.
마르크스는 이것을 이중적 의미의 자유(doubly free)라고 표현했습니다. 봉건적 예속에서 자유로운 동시에, 생산 수단에서 자유로운(즉, 아무것도 없는) 존재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이중적 자유가 노동자를 임금 노동에 구조적으로 의존하게 만들었습니다.
마이클 만은 마르크스의 이 분석이 핵심 진실을 담고 있다고 봅니다. 그러나 동시에 마르크스가 놓친 것도 있다고 봅니다. 임금 노동이 단순히 봉건 착취의 연속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새로운 권력 관계였습니다. 법적 자유와 계약의 형식이 의미를 가졌습니다. 노동자들이 단체를 만들고, 파업을 하고, 입법 투쟁을 벌이는 것이 가능해졌습니다. 봉건 농노는 이것이 불가능했습니다. 임금 노동의 법적 자유가 노동 운동의 이념적·제도적 기반이 되었습니다.
자본가 계급의 탄생 : 새로운 경제 권력
봉건제에서 경제 권력의 담지자는 토지를 소유한 귀족이었습니다. 산업혁명이 이것을 바꾸었습니다. 새로운 경제 권력의 담지자, 자본가(capitalist) 계급이 탄생했습니다.
초기 공장주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을까요.
놀랍게도 많은 수가 기존 귀족이 아니었습니다. 상인의 아들, 장인, 발명가, 자수성가한 사업가들이었습니다. 리처드 아크라이트는 이발사 출신이었습니다. 조지아 웨지우드는 도공 집안 출신이었습니다. 조지 스티븐슨은 광산 노동자 출신이었습니다.
이것이 중요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산업 자본가 계급이 처음에는 혈통이나 세습이 아니라 능력과 자본으로 규정되는 새로운 계급이었습니다. 이것이 능력주의(meritocracy) 이념의 현실적 기반이었습니다.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이념이 초기 자본주의에서 어느 정도 현실이었습니다.
그러나 마이클 만은 이 이념이 빠르게 신화가 되어갔다고 봅니다.
1세대 자본가들이 부를 축적하면서 2세대에게 물려주었습니다. 자본이 자본을 낳는 구조가 만들어졌습니다. 처음 자본이 없는 사람들이 성공하기는 갈수록 어려워졌습니다. 능력주의 이념이 구조적 불평등을 정당화하는 도구가 되었습니다.
자본가 계급은 경제 권력을 바탕으로 정치 권력도 장악해갔습니다. 1832년 영국 선거법 개혁이 상징적이었습니다. 산업 도시들에 의회 의석이 배분되었습니다. 버밍엄, 맨체스터, 리즈 같은 새로운 산업 중심지들이 처음으로 의회에서 목소리를 갖게 되었습니다. 산업 자본가 계급이 정치 권력을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습니다.
노동자 계급의 형성 : 이념 권력과 계급 의식
노동자들이 처음부터 하나의 계급으로 자신들을 인식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계급 의식의 형성은 과정이었습니다.
E. P. 톰슨의 고전적 연구 『영국 노동자 계급의 형성(1963년)』이 이것을 분석했습니다. 마이클 만도 그의 통찰을 중요하게 받아들입니다.
톰슨의 핵심 주장은 이것이었습니다. 노동자 계급은 경제적 조건에 의해 자동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노동자들이 공통의 경험을 이야기하고, 조직을 만들고, 이념을 발전시키는 능동적 과정을 통해 형성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무엇이 노동자 계급의 이념 권력을 형성했을까요.
첫째, 공통의 경험이었습니다. 공장에서 함께 일하면서 노동자들이 서로의 조건을 공유했습니다. 같은 공장주에게 같은 방식으로 착취당하는 경험이 연대의 기반이 되었습니다. 농촌의 고립된 가정에서 일할 때는 이 공통성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공장이 노동자들을 한 곳에 모음으로써 역설적으로 그들의 단결을 가능하게 했습니다.
둘째, 선술집과 채플의 역할이었습니다. 노동자들이 모이는 공간이 중요했습니다. 선술집에서 일과 후 함께 술을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비국교도 채플에서 함께 예배하고 토론했습니다. 이 비공식적 공간들이 노동자 문화와 이념이 형성되는 곳이었습니다. 마이클 만이 강조하는 이념 권력의 형성이 이 일상적 공간들에서 일어났습니다.
셋째, 급진적 이념의 확산이었습니다. 톰 페인의 『인간의 권리(1791년)』가 수십만 부 팔렸습니다. 공화주의, 평등, 자연권의 이념이 노동자들에게 퍼졌습니다. 그들이 자신의 처지를 단순한 불운이 아니라 구조적 부당함으로 인식하게 만드는 이념이 형성되었습니다.
러다이트에서 차티스트까지 : 저항의 진화
노동자들의 저항이 시간이 지나면서 진화했습니다.
28화에서 살펴본 러다이트 운동(1811~1812년)이 기계 파괴로 표현된 저항이었다면, 1830~40년대의 차티스트 운동(Chartism)은 정치적 권리를 요구하는 운동이었습니다.
1838년 인민헌장(People's Charter)이 발표되었습니다. 여섯 가지 요구가 담겨 있었습니다. 성인 남성 보통선거권, 비밀투표, 의회 의원에 대한 재산 요건 폐지, 의원 세비 지급, 동일 규모 선거구, 매년 의회 선거.
이것들이 오늘날에는 당연한 민주주의의 기본 원칙들입니다. 그러나 1838년 영국에서 이것들은 급진적 요구였습니다. 당시 영국에서 투표권을 가진 성인 남성은 전체의 약 7분의 1에 불과했습니다.
차티스트 운동이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노동자 계급이 경제적 요구에서 정치적 요구로 나아간 것이었습니다. 임금을 높이거나 노동 조건을 개선하는 것을 넘어, 정치 체제 자체를 바꾸려 했습니다. 경제 권력만이 아니라 정치 권력도 요구한 것이었습니다.
마이클 만은 차티스트 운동에서 이념 권력과 정치 권력의 결합을 읽어냅니다.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요구를 인간의 자연권이라는 이념적 틀로 표현했습니다. 이 이념적 무장이 단순한 이익 집단의 요구를 보편적 정의의 요구로 변환시켰습니다.
차티스트 운동은 1848년 사실상 실패로 끝났습니다. 주요 요구들이 관철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패배 속에서도 씨앗은 남았습니다. 이후 수십 년간 차티스트들의 요구들이 하나씩 영국 법제에 들어왔습니다. 1867년 선거법 개혁, 1884년 선거법 확대 — 점진적이지만 민주주의가 확장되었습니다.
노동조합의 탄생 : 집단 권력의 조직화
노동자들이 경제 권력을 만들어내는 가장 직접적인 수단이 노동조합(trade union)이었습니다.
영국에서 1799년과 1800년 단결금지법(Combination Acts)이 통과되었습니다. 노동자들이 임금 인상이나 노동 조건 개선을 위해 단결하는 것을 범죄로 규정한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자본가들의 이익을 정치 권력이 직접 보호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법의 금지에도 불구하고 비밀리에 조직을 만들었습니다. 우애 조합(friendly society), 저축 클럽, 선술집 모임 — 공식적으로는 다른 목적을 가진 단체들이 실질적으로 노동 조합의 기능을 했습니다.
1824~1825년 단결금지법이 폐지되었습니다. 노동자들이 합법적으로 단결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후 노동조합 운동이 공개적으로 성장했습니다.
노동조합이 경제 권력의 균형을 어떻게 바꾸었을까요.
개별 노동자는 자본가에 비해 협상력이 없었습니다. 노동자가 더 높은 임금을 요구하면, 자본가는 다른 노동자를 고용하겠다고 위협할 수 있었습니다. 일자리가 필요한 노동자들이 줄 서있는 상황에서 개별 노동자의 협상력은 거의 없었습니다.
그러나 노동자들이 집단으로 행동하면 달라졌습니다. 모든 노동자가 동시에 파업하면 공장이 멈추었습니다. 자본가에게 막대한 경제적 손실이 발생했습니다. 이 집단적 위협이 협상력을 만들었습니다.
마이클 만은 노동조합을 개별적으로 약한 경제 권력이 집단화를 통해 강해지는 메커니즘으로 봅니다. 이것이 경제 권력이 반드시 소유에서만 오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조직화된 집단 행동도 경제 권력의 원천이 될 수 있습니다.
동시에 마이클 만은 노동조합이 가진 구조적 한계도 지적합니다. 노동조합은 경제 영역에서의 권력이었습니다. 그러나 자본가들은 정치 영역에서도 강했습니다. 법률을 바꾸고, 군대를 동원하고, 파업 노동자들을 체포할 수 있었습니다. 경제적 집단 행동만으로는 구조적 변화를 이루는 데 한계가 있었습니다. 정치 권력과의 결합이 필요했습니다. 이것이 노동 운동이 정치 운동과 결합하는 방향으로 나아간 이유였습니다.
로버트 오언의 실험 : 다른 공장의 가능성
공장 시스템이 필연적으로 착취적이어야 하는가. 이 질문에 직접 도전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로버트 오언(Robert Owen, 1771~1858년)이었습니다.
웨일스 출신의 오언은 1800년 스코틀랜드 뉴라나크의 면직물 공장을 인수했습니다. 그리고 전혀 다른 방식으로 공장을 운영하기 시작했습니다.
아동 노동을 제한했습니다. 10세 이하 아동은 공장에서 일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학교에 다녔습니다. 노동 시간을 줄였습니다. 하루 10시간에서 10.5시간으로 당시 기준으로 짧은 편이었습니다. 노동자들에게 질 좋고 저렴한 식료품과 주거를 제공했습니다. 음주를 줄이도록 지원했습니다. 교육 기관을 만들었습니다.
결과가 놀라웠습니다. 노동자들의 생산성이 높아졌습니다. 품질이 개선되었습니다. 이직률이 낮아졌습니다. 무엇보다 공장이 수익을 냈습니다. 오언은 노동자를 인간적으로 대우하면서도 이익을 낼 수 있음을 증명했습니다.
유럽 전역에서 사람들이 뉴라나크를 방문했습니다. 차르 알렉산더 1세도, 귀족들도, 사회 개혁가들도 왔습니다. 모두 인상받았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이 자신의 공장에서 따라 하지 않았습니다. 더 많은 이익을 내는 기존 방식을 바꿀 이유가 없었습니다.
오언은 좌절하지 않고 더 나아갔습니다. 그는 이상적인 공동체를 만들려 했습니다. 1825년 미국 인디애나에 뉴하모니(New Harmony) 공동체를 설립했습니다. 모든 구성원이 평등하게 일하고 평등하게 나누는 공동체였습니다. 2년 만에 실패했습니다. 이상이 현실의 권력 구조와 맞닥뜨렸을 때 무너졌습니다.
마이클 만은 오언의 실험에서 이념 권력의 가능성과 한계를 동시에 읽어냅니다. 오언은 노동자를 다르게 대우할 수 있다는 것을 이념적으로, 그리고 실천적으로 보여주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실험이 예외로 남은 것은, 기존 경제 권력 구조가 다른 방식을 선택할 인센티브를 만들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개인의 도덕적 의지만으로는 구조적 권력 관계를 바꿀 수 없었습니다.
마르크스의 분석 : 경제 권력의 해부
1848년, 두 명의 젊은 독일인이 런던에서 소책자를 출판했습니다. 카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가 쓴 『공산당 선언(Communist Manifesto)』이었습니다.
"하나의 유령이 유럽을 배회하고 있다. 공산주의라는 유령이."
이 첫 문장으로 시작하는 이 문서가 이후 170년간 세계 역사를 규정했습니다. 마이클 만은 마르크스의 분석을 비판적으로 평가합니다. 무엇을 맞게 보았고 무엇을 놓쳤는가를.
마르크스가 맞게 본 것들이 있었습니다.
자본주의가 전례없는 생산력을 발전시키면서 동시에 새로운 형태의 착취와 불평등을 만들어낸다는 것. 이것은 맞았습니다.
노동자와 자본가 사이의 구조적 이해 충돌이 있다는 것. 이것도 맞았습니다. 이익을 늘리려는 자본가와 임금을 높이려는 노동자 사이의 갈등은 구조적이었습니다.
자본이 집중되는 경향이 있다는 것. 큰 자본이 작은 자본을 흡수하고, 독점이 형성되는 경향. 이것도 맞았습니다.
그러나 마르크스가 놓친 것들도 있었습니다.
마이클 만의 핵심 비판은 이것입니다. 마르크스는 경제 권력이 다른 모든 권력을 결정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국가, 법, 이념, 군대 — 이것들이 모두 지배 계급의 경제적 이익을 위한 도구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지나치게 단순했습니다.
국가는 단순한 자본가 계급의 도구가 아니었습니다. 국가는 자신의 논리와 이익을 가졌습니다. 때로 국가가 자본가들의 이익에 반하는 결정을 내렸습니다. 아동 노동 규제, 노동 시간 제한 — 이것들은 자본가들이 원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국가가 사회적 압력과 자신의 정당성 유지를 위해 자본가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도입한 것이었습니다.
이념도 단순히 지배 계급의 도구가 아니었습니다. 기독교 이념, 자유주의 이념, 민족주의 이념 — 이것들이 자본가 계급의 이익을 때로 지지하고 때로 제한했습니다. 이념은 자율적인 힘을 가졌습니다.
마이클 만은 자신의 IEMP 분석이 마르크스의 경제 환원론을 넘어선다고 봅니다. 경제 권력이 중요하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이념 권력, 군사 권력, 정치 권력이 각자의 논리를 가지고 경제 권력과 상호작용합니다. 역사는 경제 법칙이 아니라 이 복합적 권력들의 상호작용이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자유주의의 등장 : 경제 권력의 이념
새로운 경제 권력 구조가 새로운 이념 체계를 필요로 했습니다. 그것이 자유주의(liberalism)였습니다.
자유주의의 핵심 주장들을 살펴보겠습니다.
개인의 자유와 재산권이었습니다. 개인은 자유로운 존재이며, 자신의 노동과 재산에 대한 권리를 가진다. 국가는 이 권리를 침해해서는 안 된다. 이 주장이 자본가들의 재산권을 보호했습니다.
자유 시장의 우월성이었습니다. 국가의 간섭 없이 시장이 자유롭게 작동할 때 사회 전체의 이익이 극대화된다. 이 주장이 노동 규제를 반대하는 논거가 되었습니다. 아동 노동을 규제하면 시장의 자유가 침해된다는 주장이 실제로 제기되었습니다.
기회의 평등이었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경쟁할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 결과의 불평등은 능력의 차이를 반영하므로 정당하다. 이 주장이 자본주의적 불평등을 정당화했습니다.
마이클 만은 자유주의 이념을 경제 권력이 만들어낸 이념 권력으로 봅니다. 자유주의는 산업 자본가 계급의 이해관계를 보편적 원칙으로 포장했습니다. 자신들의 재산 보호 요구를 인간의 자연권이라는 언어로 표현했습니다. 시장의 자유를 위한 주장을 자유 일반에 대한 옹호로 제시했습니다.
그러나 자유주의는 단순한 이데올로기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중요한 진실도 담고 있었습니다. 개인의 자유와 재산권 보호가 실제로 경제 혁신을 촉진했습니다. 법의 지배가 자의적 권력으로부터 시민을 보호했습니다. 이것들이 가치 있는 것이었습니다. 자유주의를 단순히 자본가 계급의 이념으로 환원하는 것은 그것의 복잡성을 놓치는 것이었습니다.
자선과 빈민 통제 : 이념 권력의 도덕화
산업화가 만들어낸 도시 빈곤에 대한 지배 계급의 대응이 자선(philanthropy)이었습니다.
19세기 영국에서 자선이 폭발적으로 성장했습니다. 빈민 학교, 고아원, 야간 학교, 주일 학교 — 이것들이 모두 자선 활동이었습니다. 부유한 공장주와 귀족들이 자신의 재산 일부를 빈민 구제에 사용했습니다.
마이클 만은 이 자선의 이중적 성격을 분석합니다.
한편으로 자선은 진정한 인도주의적 충동에서 나왔습니다. 빈곤의 참상을 목격한 중산층과 상류층 중 많은 수가 진심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을 돕고 싶었습니다. 복음주의적 기독교가 이 충동을 강화했습니다. 가난한 자들을 돕는 것이 기독교인의 의무라는 이념이 자선 활동의 이념적 동기가 되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자선은 사회적 통제의 수단이기도 했습니다. 빈민들에게 교육을 제공하는 것은 그들에게 중산층의 가치관 (근면, 절약, 절제, 복종)을 주입하는 과정이기도 했습니다. 기존 질서를 정당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만드는 이념 교육이었습니다. 주일 학교에서 가르친 것이 성경만이 아니었습니다. 현재의 사회 질서에 순응하고 근면하게 일하는 것이 신의 뜻이라는 메시지도 담겨 있었습니다.
1834년 신구빈법(New Poor Law)이 상징적이었습니다. 구빈원(workhouse)을 만들어 빈민들을 수용했습니다. 구빈원 안의 생활 조건을 의도적으로 최악으로 만들었습니다. 배고프고 굴욕적인 구빈원에 가느니 어떤 임금이라도 받고 일하는 것이 낫다는 계산이었습니다. 복지가 노동 윤리를 해친다는 19세기의 주장이 이미 여기에 있었습니다.
마이클 만은 이것을 이념 권력이 경제 권력을 위해 작동하는 방식으로 봅니다. 자선과 빈민법이 노동자들을 도덕적으로 형성하고, 노동 시장의 규율을 유지하고, 체제의 정당성을 강화하는 이념적 기능을 수행했습니다.
공장 검열관 : 국가 권력의 경제 개입
그러나 국가가 자본가들의 이익만을 위해 작동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국가가 자본가들의 이익에 반하는 방향으로 개입하기도 했습니다.
1833년 공장법이 통과되었습니다. 핵심 내용은 9세 이하 아동의 면직물 공장 고용 금지, 9~13세 아동의 하루 9시간 노동 제한이었습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이것을 집행할 공장 검열관이 임명되었다는 것입니다.
공장 검열관이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이전에도 아동 노동을 제한하는 법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집행 수단이 없어 사문화되어 있었습니다. 이번에는 달랐습니다. 국가 권력이 실제로 공장에 들어가 법을 집행했습니다.
마이클 만은 공장 검열관 제도를 하부구조적 권력의 경제 영역 침투로 봅니다. 국가가 처음으로 사적 경제 영역에 직접 개입하여 규율을 집행했습니다. 이것이 근대적 경제 규제의 시작이었습니다. 작업장 안전법, 환경 규제, 소비자 보호법 — 오늘날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모든 경제 규제가 이 시작점에서 자라났습니다.
왜 국가가 자본가들에게 불리한 이 규제를 도입했을까요.
첫째, 정치적 정당성의 필요였습니다. 아동 노동의 참상이 알려지면서 대중의 분노가 높아졌습니다. 이 분노를 무시하면 국가의 정당성이 흔들렸습니다. 최소한의 규제를 도입하여 가장 심각한 학대를 막는 것이 국가 권력 유지에 필요했습니다.
둘째, 장기적 경제 이익의 계산이었습니다. 일부 선각적 자본가들은 지나친 착취가 오히려 생산성을 해친다는 것을 이해했습니다. 건강한 노동력이 더 생산적이었습니다. 최소한의 규제가 장기적으로 자본주의 체제를 안정시킨다는 계산이 작동했습니다.
셋째, 의회 내 세력 균형이었습니다. 산업 자본가들이 의회를 장악했지만 전부가 아니었습니다. 지주 귀족들이 여전히 의회의 상당 부분을 차지했습니다. 이들은 도시 산업 자본가들과 이해관계가 달랐습니다. 아동 노동 규제에 찬성한 것이 부분적으로는 도시 산업가들에 대한 농촌 귀족들의 견제이기도 했습니다.
맨체스터 자유주의 대 개혁주의 : 이념의 충돌
19세기 중반 영국에서 두 개의 경제 이념이 충돌했습니다.
맨체스터 자유주의(Manchester Liberalism)였습니다. 리처드 코브던과 존 브라이트가 이끄는 이 운동은 자유 무역과 국가 불개입을 주장했습니다. 노동 규제 반대, 곡물법 폐지(식량 수입 자유화), 제국주의 반대 — 이것들이 그들의 주장이었습니다. 이름은 자유주의였지만 실질적으로는 산업 자본가 계급의 이익을 대변했습니다.
개혁주의(Reformism)였습니다. 토리당의 일부 귀족들과 기독교 사회주의자들이 이끄는 이 흐름은 국가의 적극적 개입을 통한 사회 개혁을 지지했습니다. 아동 노동 규제, 노동 시간 단축, 공중 보건 개선, 도시 위생 시설 확충이 이들의 요구였습니다.
흥미롭게도 귀족 보수주의자들이 때로 노동자들의 편을 들었습니다. 조지 오스틴 같은 토리당 귀족들이 공장법을 지지했습니다. 그들의 동기가 순수한 인도주의만은 아니었습니다. 부르주아 산업 자본가들을 견제하려는 정치적 계산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노동 규제가 강화되었습니다.
마이클 만은 이 충돌에서 경제 권력이 단일하지 않다는 것을 읽어냅니다. 지주 귀족의 경제 권력과 산업 자본가의 경제 권력이 달랐습니다. 이 내부 분열이 지배 계급이 단일한 이익을 가진 것처럼 보이는 마르크스주의적 분석의 한계를 보여주었습니다. 지배 계급 내부의 갈등이 피지배 계급에게 유리한 개혁을 가능하게 하는 공간을 만들었습니다.
노동 귀족과 계급 분열 : 노동자 계급 내부의 위계
노동자 계급이 단일하지 않았다는 것도 중요합니다.
19세기 중반 영국에서 노동 귀족(labour aristocracy)이라고 불리는 계층이 형성되었습니다. 숙련 노동자들이었습니다. 기계공, 인쇄공, 조선공, 건설 노동자, 이들은 특정한 기술을 가지고 있었고, 그 기술이 협상력을 주었습니다.
노동 귀족의 임금은 비숙련 노동자보다 두세 배 높았습니다. 이들은 노동조합을 만들고 의원들과 협상했습니다.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이 분열이 노동 운동의 발전에 복잡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노동 귀족들은 체제의 근본적 변혁보다 자신들의 조건 개선에 더 관심이 있었습니다. 비숙련 노동자들과 연대하기보다 자신들의 특권적 지위를 유지하려 했습니다. 이것이 영국 노동 운동이 혁명적 방향보다 개량주의적 방향으로 발전한 이유 중 하나였습니다.
마이클 만은 이 계층화를 경제 권력이 노동자 내부에서도 불균등하게 분포된다는 것으로 봅니다. 기술이 노동자 내부에서 협상력의 차이를 만들었습니다. 이 내부 분열이 자본에 대한 노동의 통일된 저항을 어렵게 만들었습니다. 이것이 자본주의가 혁명 없이 지속될 수 있는 구조적 이유 중 하나였습니다.
복지국가의 씨앗 : 국가의 역할 확대
19세기 말 독일의 비스마르크가 전혀 예상치 못한 정책을 도입했습니다. 사회 보험이었습니다.
1883년 건강 보험, 1884년 산업 재해 보험, 1889년 노령 연금 — 이것들이 세계 최초의 국가 사회 보험 체계였습니다.
왜 보수적인 귀족 재상 비스마르크가 이런 진보적 정책을 도입했을까요.
이유는 복잡했습니다.
첫째, 사회주의 운동을 약화시키기 위해서였습니다. 비스마르크는 직접 말했습니다. "나는 독일 노동자를 사회주의로부터 빼앗고 싶다." 국가가 노동자들의 기본적 필요를 충족시켜주면, 그들이 혁명을 원하지 않을 것이라는 계산이었습니다.
둘째, 국가 효율성의 향상이었습니다. 건강하고 안정된 노동력이 군대와 공장에서 더 효율적이었습니다. 국가의 장기적 이익을 위해 단기적 비용이 정당화되었습니다.
셋째, 민족주의적 통합이었습니다. 독일이 1871년 통일된 지 얼마 안 되었습니다. 사회 보험이 독일 노동자들에게 독일 국가에 대한 소속감과 충성심을 만들어줄 수 있었습니다.
마이클 만은 비스마르크의 사회 보험을 이념 권력과 정치 권력이 경제 권력을 길들이는 과정으로 봅니다. 자본주의가 만들어내는 불평등과 불안정이 정치적으로 폭발하기 전에 국가가 개입하여 완충 장치를 만든 것이었습니다. 복지 국가는 사회주의에 대한 최고의 방어였습니다.
이 전략이 성공했습니다. 독일 사회민주당이 가장 강한 사회주의 운동을 가졌지만, 독일 노동자들은 결국 혁명보다 개혁을 선택했습니다. 비스마르크의 계산이 맞았습니다.
공장에서 현재로 : 변형되는 권력 관계
마이클 만은 공장제가 만들어낸 권력 관계가 오늘날 어떻게 변형되어 지속되는지를 묻습니다.
오늘날 공장은 많이 사라졌습니다. 적어도 선진국에서. 대신 사무실, 콜 센터, 물류 창고, 긱 경제의 플랫폼이 새로운 노동의 공간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본질적 권력 관계는 바뀌었을까요.
아마존 물류 창고 노동자들이 화장실 갈 시간을 허락받지 못한다는 보고가 있습니다. 우버 운전기사들이 알고리즘의 통제 아래 일합니다. 콜 센터 노동자들이 통화 시간을 초 단위로 측정당합니다. 디지털 기술이 19세기 공장 감독의 역할을 더 정밀하고 광범위하게 수행하고 있습니다.
동시에 새로운 저항도 있습니다. 아마존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을 만들었습니다. 우버 기사들이 법적 지위 인정을 요구하며 소송을 냅니다. 기후 위기 앞에서 그린 뉴딜이 자본주의적 생산 방식 자체를 문제 삼습니다.
마이클 만이 공장제의 역사에서 이끌어내는 가장 중요한 교훈은 이것입니다. 경제 권력 관계는 주어진 것이 아니다. 그것은 역사적으로 형성되었고, 끊임없이 도전받았으며, 부분적으로 변화했습니다. 19세기 초의 착취적 공장 노동이 오늘날의 (불완전하지만) 더 나은 노동 조건으로 변화한 것은 자연스러운 진보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노동 운동, 정치 투쟁, 법제화, 국제 경쟁이라는 복잡한 권력 게임의 결과였습니다.
그리고 그 게임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공장 종소리가 울린다
19세기 공장에서 하루 일과는 종소리와 함께 시작되었습니다. 새벽 다섯 시, 종이 울렸습니다. 노동자들이 잠을 깨고 공장으로 걸어갔습니다. 그들의 삶이 종소리에 의해 규정되었습니다.
그 종소리가 만들어낸 세계가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입니다. 임금 노동, 자본 시장, 노동조합, 사회 보험, 소비 사회 — 이것들이 모두 그 종소리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마이클 만이 공장제의 역사를 통해 우리에게 전달하는 메시지는 이것입니다. 경제 관계는 인간이 만든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이 바꿀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변화는 경제 권력만이 아니라 이념 권력, 군사 권력, 정치 권력의 복합적 상호작용 속에서만 가능합니다.
종소리가 누구의 시간을 위해 울리는가. 이 질문이 19세기 노동자들의 질문이었고, 오늘날에도 여전히 우리의 질문입니다.
다음 화 예고 30화 철도가 바꾼 권력 지형 : 속도와 거리가 정치·군사 권력을 어떻게 변형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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