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로이를 찾아낸 남자 — 하인리히 슐리만, 믿음이 역사를 바꾸다
1868년, 그리스 이타카 섬.
한 중년 남자가 올리브 나무 그늘 아래 앉아 낡은 책 한 권을 읽고 있습니다. 호메로스의 《일리아드》. 그는 이 책을 어린 시절부터 수백 번 읽었습니다. 독일어로, 영어로, 프랑스어로, 그리스어로. 그때마다 같은 확신이 그의 가슴을 채웠습니다.
이것은 신화가 아니다. 이것은 실제 역사다.
당대의 모든 학자들이 그를 비웃었습니다. 트로이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호메로스의 서사시는 문학적 상상의 산물일 뿐이라고. 3,000년 전에 사라진 도시를 찾겠다는 것은 어리석은 망상이라고.
그러나 하인리히 슐리만은 개의치 않았습니다.
그는 책을 덮고, 지도를 펼쳤습니다. 그리고 소아시아 해안, 지금의 터키 북서부, 히사를리크라는 이름의 언덕을 가리켰습니다. 저기다. 저 땅속 어딘가에 트로이가 있다.
5년 후, 그의 삽이 황금을 건드렸습니다.
반 룬은 슐리만의 이야기를 예술사 안에 배치하면서 한 가지 근본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예술을 발견한다는 것, 과거의 아름다움을 땅속에서 끌어올린다는 것, 그것 자체가 하나의 예술적 행위가 아닌가, 하고.

소년 슐리만의 꿈 — 크리스마스 선물과 트로이
1829년, 독일 메클렌부르크의 작은 마을 안케르스하겐.
일곱 살의 하인리히 슐리만은 아버지로부터 크리스마스 선물을 받았습니다. 《어린이를 위한 세계사》. 그 책의 한 페이지에 트로이가 불타는 장면이 삽화로 실려 있었습니다. 거대한 성벽, 화염, 도망치는 사람들.
소년은 아버지에게 물었습니다.
"아버지, 트로이 성벽이 이렇게 컸다면 완전히 사라질 수는 없잖아요. 분명히 땅속 어딘가에 남아 있을 거예요."
아버지는 웃으며 말했습니다. 그건 상상 속의 이야기란다. 그러나 소년 슐리만은 그날부터 결심했습니다. 언젠가 트로이를 찾아내겠다고.
반 룬은 이 일화를 소개하면서 특별한 감회를 표합니다. 위대한 발견의 씨앗이 어린 시절 한 장의 삽화에서 시작되었다는 사실. 예술이 — 그것이 아무리 조잡한 책 속의 삽화일지라도 — 한 인간의 일생을 바꿀 수 있다는 사실. 그래서 아이들에게 아름다운 것을 보여주는 일이 그토록 중요하다고.
상인에서 고고학자로 — 꿈을 위한 준비
슐리만의 삶은 파란만장했습니다. 가난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열네 살에 학업을 중단하고 식료품 가게 점원으로 일을 시작했습니다. 스물네 살에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으로 건너가 무역 회사에 취직했고, 탁월한 언어 습득 능력과 상업적 감각으로 빠르게 성공했습니다.
슐리만의 언어 능력은 전설적이었습니다. 그는 평생 동안 러시아어, 영어, 프랑스어, 스페인어, 포르투갈어, 아랍어, 고대 그리스어를 포함해 13개 언어를 유창하게 구사했습니다. 새 언어를 배울 때 그만의 독특한 방법을 사용했습니다. 원어로 된 책을 큰 소리로 읽고, 매일 한 페이지씩 그 언어로 작문하고, 원어민 선생과 매일 대화하는 것. 그는 새 언어 하나를 여섯 주 만에 익혔다고 전해집니다.
크림 전쟁 시기 러시아에서 군수품 무역으로 거대한 부를 축적한 그는, 미국으로 건너가 캘리포니아 골드러시 때 은행업으로 다시 한번 큰돈을 벌었습니다. 1858년, 마흔여섯의 나이에 그는 사업에서 완전히 손을 떼었습니다.
이제 진짜 삶을 시작할 때가 되었습니다.
어린 시절의 꿈, 트로이를 찾는 일.
반 룬은 슐리만의 이 결단에서 깊은 의미를 읽어냅니다. 수십 년간 부를 축적한 것은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었습니다. 그 모든 시간 동안 그는 한 번도 트로이를 잊은 적이 없었습니다. 그것이 슐리만을 단순한 사업가와 구별하는 지점입니다. 꿈을 위해 현실을 준비한 사람과, 현실에 묻혀 꿈을 잊은 사람의 차이.
파리에서 고고학을 배우다 — 늦깎이 학생
사업에서 은퇴한 슐리만은 파리로 갔습니다. 소르본 대학에 등록하고 고고학과 고대사를 본격적으로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나이 마흔여섯의 늦깎이 학생이었습니다.
그는 동시에 고대 그리스어를 완벽하게 익혔습니다. 이미 수백 번 읽은 《일리아드》를 이제 호메로스가 쓴 원어 그대로 읽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원문을 읽으며 그의 확신은 더욱 깊어졌습니다. 호메로스는 너무나 구체적인 지명, 지형, 거리를 묘사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상상으로 쓴 이야기가 아니었습니다.
1868년, 그는 직접 그리스와 소아시아를 답사했습니다. 이타카 섬에서 《오디세이》의 현장들을 확인하고, 트로이가 있었을 소아시아 해안 지대를 직접 발로 걸었습니다.
당시 학자들 사이에서 트로이의 위치에 대한 논쟁이 있었습니다. 영국 외교관 프랭크 칼버트는 히사를리크 언덕을 트로이의 유력한 후보지로 지목하고 있었습니다. 슐리만은 그를 만났고, 두 사람의 견해는 일치했습니다. 그러나 칼버트에게는 발굴을 진행할 충분한 자금이 없었습니다.
슐리만에게는 있었습니다.
히사를리크의 삽 — 트로이를 파헤치다
1871년 10월, 슐리만은 80명의 인부를 이끌고 히사를리크 언덕에서 발굴을 시작했습니다. 오스만 제국 정부의 허가를 받은 공식 발굴이었습니다.
그러나 곧 문제가 드러났습니다. 히사를리크 언덕은 단순한 하나의 도시 터가 아니었습니다. 수천 년에 걸쳐 여러 도시들이 같은 자리에 차례로 세워지고 무너진 층층의 유적이었습니다. 가장 위층이 가장 나중 시대, 가장 아래층이 가장 오래된 시대.
슐리만은 호메로스의 트로이가 가장 오래된 층에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습니다. 그는 위층의 유적들을 빠르게 걷어내며 아래로, 아래로 파고 들어갔습니다. 이 결정은 훗날 큰 비판을 받게 됩니다. 트로이보다 훨씬 후대의 귀중한 유적들을 파괴해버렸기 때문입니다. 현대 고고학의 기준으로 보면 슐리만의 발굴 방식은 지나치게 거칠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삽은 결국 무언가를 건드렸습니다.
1873년 5월의 어느 아침. 슐리만이 직접 현장을 감독하던 중 삽날이 금속에 닿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는 인부들을 물리고 아내 소피아와 단둘이 조심스럽게 흙을 걷어냈습니다.
드러난 것은 황금이었습니다.
황금 왕관, 황금 팔찌, 황금 잔, 황금 단추. 수천 점의 황금 유물들. 슐리만은 이것을 즉시 '프리아모스의 보물'이라고 선언했습니다. 호메로스의 서사시에 등장하는 트로이의 마지막 왕 프리아모스의 보물이라고.
그는 발굴 허가를 낸 오스만 제국 당국에 이 사실을 숨기고 유물들을 몰래 반출했습니다. 이 행위는 훗날 큰 외교적 분쟁을 일으켰습니다. 그리스로 밀반출된 이 유물들은 이후 독일 베를린으로 옮겨졌고, 제2차 세계대전 중 소련군이 접수해 현재 모스크바 푸시킨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한 점의 유물이 세 나라를 거치며 분쟁의 씨앗이 된 것입니다.

슐리만의 실수 — 그러나 방향은 옳았다
흥분에 사로잡힌 슐리만은 결정적인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나중에 밝혀진 바에 따르면, 그가 '프리아모스의 보물'이라고 선언한 황금 유물들은 호메로스의 트로이보다 무려 1,000년이나 앞선 시대의 것이었습니다. 기원전 2400년경의 유물들로, 호메로스가 묘사한 트로이 전쟁(기원전 1200년경으로 추정)과는 전혀 다른 시대의 것이었습니다.
게다가 그가 파고 들어간 가장 아래층이 트로이가 아니라는 사실도 드러났습니다. 호메로스의 트로이에 해당하는 층은 그가 성급하게 걷어낸 중간 어딘가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반 룬은 이 실수에도 불구하고 슐리만의 위대함을 강조합니다. 그는 핵심적인 진실을 맞혔습니다. 히사를리크 언덕이 트로이였다는 것. 호메로스의 서사시가 완전한 허구가 아니라 실제 역사적 기억을 담고 있다는 것. 모든 학자가 불가능하다고 말한 것을 그는 해냈습니다.
슐리만은 이후 미케네, 티린스 등 그리스 본토에서도 발굴을 계속했습니다. 미케네에서 그는 황금 마스크를 발견하고 흥분하여 아테네로 전보를 쳤습니다. "아가멤논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이 역시 훗날 연대가 맞지 않음이 밝혀졌지만, 청동기 시대 그리스 문명의 실체를 확인한 발견이었습니다.
슐리만이 예술사에 남긴 것
슐리만의 발굴이 예술사에 미친 영향은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 신화를 역사로 되돌렸습니다. 호메로스의 서사시가 단순한 문학이 아니라 실제 문명의 기억을 담고 있음을 증명했습니다. 이것은 서양 예술의 원천인 그리스 신화 전체를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게 했습니다. 신화 속의 이야기들이 실제 인간들의 삶과 연결되어 있다는 인식은, 그 이야기들을 소재로 한 모든 예술 작품에 새로운 층위의 의미를 부여했습니다.
두 번째, 고고학을 대중의 관심사로 만들었습니다. 슐리만의 발굴 소식은 전 세계 신문 1면을 장식했습니다. 땅속에서 황금이 나오고, 전설 속의 도시가 실재했다는 이야기는 유럽 전역 사람들을 흥분시켰습니다. 이 흥분이 이후 이집트학, 메소포타미아학 등 고대 문명 연구에 대한 폭발적인 관심과 투자로 이어졌습니다.
세 번째, 예술과 발굴의 관계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제기했습니다. 슐리만이 반출한 유물들은 오늘날까지도 소유권 분쟁의 중심에 있습니다. 터키는 히사를리크 유물의 반환을 요구하고 있으며, 그리스는 미케네 유물에 대한 권리를 주장합니다. 이것은 예술 작품이 누구의 것인가, 문화유산의 소유권은 어떻게 결정되는가라는 현재진행형의 물음입니다.
반 룬이 슐리만에서 읽어낸 것
반 룬은 슐리만 챕터를 예술사 안에 배치한 이유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예술은 만들어지는 것만이 아닙니다. 발견되는 것이기도 합니다. 땅속에 묻힌 수천 년 전의 아름다움을 끌어올려 다시 인간의 눈앞에 내놓는 행위. 그것은 새로운 작품을 창조하는 것 못지않게 중요한 예술적 행위입니다.
그리고 슐리만의 이야기는 꿈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일곱 살 소년이 책 속의 삽화를 보며 품은 꿈이 평생을 이끌었습니다. 수십 년의 현실적 준비 끝에 그 꿈은 땅속에서 황금으로 솟아올랐습니다.
반 룬은 여기서 독자들에게 조용히 묻습니다. 당신에게는 그런 꿈이 있었느냐고. 어린 시절 어떤 책의 어떤 삽화 앞에서, 언젠가 저것을 찾아내리라 결심한 순간이 있었느냐고.
그 꿈을 아직 기억하고 있다면, 슐리만의 이야기는 지금도 유효한 이야기입니다.
이번 화 감상 추천
슐리만의 세계, 트로이와 그리스 청동기 문명의 분위기와 맞닿은 음악들을 추천드립니다.
- 자크 오펜바흐, 오페라 《아름다운 헬레네》 — 트로이 전쟁의 발단이 된 헬레네와 파리스의 이야기를 풍자적으로 다룬 19세기 오페라 부파. 슐리만이 트로이를 발굴하던 시대와 같은 시기에 파리에서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일렉트라》 — 미케네 왕궁을 배경으로 한 그리스 비극. 슐리만이 발굴한 바로 그 미케네의 세계가 음악으로 펼쳐집니다.
- 헨델, 오라토리오 《세멜레》 — 그리스 신화의 세계를 장엄한 바로크 음악으로 구현한 작품. 신화가 살아있는 이야기임을 음악이 증명합니다.
다음 화 예고
다음 시간에는 슐리만이 그토록 사랑했던 호메로스의 나라, 그리스로 돌아갑니다. 슐리만의 발굴이 재발견해 준 청동기 그리스 문명에서 출발해, 그것이 어떻게 꽃피어 인류 예술사의 가장 빛나는 장을 이루었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신전, 조각, 도자기, 그리고 인간을 아름다움의 중심에 놓은 혁명적 세계관. 오늘 슐리만이 열어젖힌 문 너머로, 드디어 그리스의 빛이 쏟아져 들어옵니다.
EP.06 — 그리스인의 예술: 인간을 발견한 예술에서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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