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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두 개의 독일, 하나의 역사

EP.08 · 전쟁의 또 다른 얼굴 : 민간인 피해의 기록

by 책으로떠나는여행 2026. 6. 4.

두 개의 독일, 하나의 역사

EP.08 · 전쟁의 또 다른 얼굴 : 민간인 피해의 기록


1945년 난민들: 수많은 난민들이 서쪽으로 이동하고 있다

1945년 1월 30일, 동프로이센 필라우 항구.
영하 20도의 혹한 속에서 수만 명의 사람들이 부두에 줄지어 서 있었습니다. 노인, 여성, 아이들. 등에는 보따리를 지고, 팔에는 어린아이를 안고 있었습니다. 소련군이 동쪽에서 빠르게 밀려오고 있었습니다. 배를 타지 못하면 남겨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날 저녁 독일 해군 여객선 '빌헬름 구스틀로프'호가 항구를 떠났습니다. 정원의 열 배가 넘는 약 1만 명이 배에 실려 있었습니다. 대부분 피란민이었습니다. 새벽 1시, 소련 잠수함 S-13이 발사한 어뢰 세 발이 배에 명중했습니다. 배는 45분 만에 침몰했습니다. 생존자는 약 1,200명이었습니다.
이 사건은 오랫동안 세상에 잘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전쟁 중 독일이 저지른 일들 앞에서, 독일인의 피해를 말하는 것은 불편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역사는 불편한 이야기도 기록해야 합니다.


침묵의 이유

전후 수십 년간, 독일 민간인의 피해는 공론장에서 거의 다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복잡합니다. 첫째, 독일이 저지른 홀로코스트와 전쟁 범죄의 압도적 규모 앞에서, 독일인의 피해를 말하는 것은 자칫 가해를 희석하거나 면죄부를 구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었습니다. 둘째, 동독에서는 소련을 해방군으로 공식화한 체제 아래 이 주제 자체가 금기였습니다. 셋째, 서독에서도 피해자들 스스로가 침묵을 택한 경우가 많았습니다. 말해도 믿어지지 않았고, 말하는 것이 또 다른 상처가 되었으며, 시대 분위기가 피해 사실을 공개적으로 드러내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침묵이 50년 가까이 이어진 뒤, 1990년대와 2000년대에 들어서야 독일 역사학계는 이 주제를 본격적으로 다루기 시작했습니다. 과거사 청산이 충분히 이루어진 사회만이 자국민의 피해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을, 독일은 그렇게 긴 시간을 거쳐 보여주었습니다.


동프로이센 : 가장 먼저 불탄 땅

1945년 1월, 소련군의 첫 번째 대규모 진격 목표는 동프로이센이었습니다.
오늘날 폴란드 북동부와 러시아 칼리닌그라드 지역에 해당하는 이 땅은 수백 년간 독일인들이 살아온 곳이었습니다. 임마누엘 칸트가 태어나고 평생을 보낸 쾨니히스베르크가 이 땅에 있었습니다. 1945년 1월, 약 250만 명의 독일인이 살고 있었습니다.
소련군의 진격 소식이 전해지자 대탈출이 시작되었습니다. 나치 당국은 처음에 민간인의 탈출을 금지했습니다. 도망치는 것은 패배주의이며 사기 저하라는 논리였습니다. 명령을 어기고 먼저 탈출한 관리들도 있었습니다. 허가가 내려졌을 때는 이미 소련군이 탈출로를 차단한 뒤였습니다.
영하의 날씨 속에서 얼어붙은 발트해 연안 도로를 따라 수십만 명이 걸었습니다. 말이 끄는 마차, 자전거, 두 발. 소련 공군이 이 행렬을 공격했습니다. 얼어붙은 호수 위를 건너다 빠져 죽은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추위와 굶주림으로 쓰러진 사람들의 시신이 도로 옆에 쌓였습니다.
쾨니히스베르크는 1945년 4월 9일 함락되었습니다. 전투 직전 30만 명이었던 인구는 전투 후 수만 명으로 줄었습니다. 살아남은 독일인들은 이후 수년에 걸쳐 추방되었고, 도시 이름은 소련에 의해 '칼리닌그라드'로 바뀌었습니다. 칸트의 무덤만이 남아 있습니다.


네메르스도르프 : 최초의 기록

1944년 10월, 소련군이 처음으로 독일 영토에 일시적으로 진입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동프로이센의 작은 마을 네메르스도르프였습니다. 소련군이 며칠 머물다 독일군의 반격으로 물러난 뒤, 독일 당국과 종군기자들이 마을에 들어갔습니다. 그들이 발견한 것은 민간인 학살의 현장이었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시신, 마차 바퀴에 깔린 여성의 시신 등이 기록되었습니다.
나치 선전부는 이 사진과 기록을 즉시 활용했습니다. 독일 전 국민에게 소련군이 얼마나 잔인한지를 알리는 선전 도구로 삼았습니다. 그러나 이 선전은 역효과를 낳기도 했습니다. 네메르스도르프 소식을 들은 동프로이센 주민들이 더욱 공황 상태에 빠져 혼란이 가중되었습니다.
나치 선전의 도구로 사용되었다는 사실이 이 사건의 역사적 평가를 복잡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학살이 실제로 있었다는 사실 자체는 이후 다수의 역사 연구로 확인되었습니다.


브레슬라우 : 히틀러가 만든 지옥

슐레지엔의 중심 도시 브레슬라우, 오늘날 폴란드의 브로츠와프는 또 다른 비극의 무대였습니다.
1945년 2월, 소련군이 도시를 포위했습니다. 히틀러는 브레슬라우를 '요새 도시(Festung Breslau)'로 선포하고 항복을 금지했습니다. 민간인 대피는 이미 늦었습니다. 영하의 날씨 속에서 강제 대피 명령을 받은 수만 명의 민간인, 특히 여성과 아이들이 눈보라 속으로 내몰렸습니다. 이 과정에서 수천 명이 동사했습니다.
브레슬라우는 1945년 5월 6일까지, 독일이 공식 항복한 이틀 후까지도 버텼습니다. 도시의 역사 지구는 전투로 거의 완전히 파괴되었습니다. 살아남은 독일인들은 전후 모두 추방되었고, 폴란드인들이 이 도시를 채웠습니다. 브레슬라우는 브로츠와프가 되었습니다. 수백 년의 역사가 지명 하나로 지워졌습니다.


1945년의 난민들: 이 난민들은 베를린에서 강제 이송을 기다리고 있다.

강제 추방 : 1,200만 명의 이동

전쟁이 끝난 뒤 시작된 독일인 강제 추방은 인류 역사상 가장 대규모의 민족 이동 중 하나였습니다.
포츠담 합의는 독일인들의 '질서 있고 인도적인 이송'을 규정했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달랐습니다.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헝가리, 유고슬라비아에서 독일계 주민들이 집에서 쫓겨났습니다. 주어진 시간은 몇 시간, 혹은 하루. 가져갈 수 있는 짐은 손에 들 수 있는 것뿐이었습니다. 집과 농지와 수백 년간 쌓인 삶의 흔적을 두고 떠나야 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폭력이 수반된 경우도 많았습니다. 특히 체코슬로바키아의 '브르노 죽음의 행진'은 역사에 기록된 사례입니다. 1945년 5월, 브르노의 독일계 주민 약 2만 7,000명이 오스트리아 국경까지 강제 도보 행진을 해야 했습니다. 도중에 수백 명에서 수천 명이 사망했습니다. 정확한 희생자 수는 오늘날까지 체코와 독일 역사가들 사이에 논쟁 중입니다.
1950년까지 서독으로 이주하거나 추방된 독일인의 수는 약 1,200만 명. 이 과정에서 사망한 독일인은 추산에 따라 수십만에서 200만 명 사이로 다양하게 기록됩니다. 정확한 수치는 지금도 확정되지 않았습니다.


제2차 세계 대전 말 유럽 전선에서 협상 회담에 참석하기 위해 항복 깃발을 들고 있는 독일 국방군 장교 대표단.

피해자이면서 가해자였던 사람들

이 역사를 다룰 때 마주치는 가장 어려운 질문이 있습니다.
독일인들은 이 모든 것을 어느 정도까지 알고 있었는가. 그리고 알면서도 침묵했다면, 그 침묵은 어떤 의미인가.
독일인 피해자들 중 상당수는 나치 치하에서 평범하게 살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명시적으로 나치에 가담하지 않았지만, 나치 체제가 유지되는 데 암묵적으로 동조했거나 적어도 저항하지 않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을 순수한 피해자로만 볼 수 있는가, 아니면 가해 체제의 일부로 보아야 하는가. 역사는 쉬운 답을 주지 않습니다.
역사가 한나 아렌트가 제시한 '악의 평범성' 개념은 바로 이 지점을 건드립니다. 거대한 악은 특별한 괴물들이 저지르는 것이 아니라, 생각 없이 명령에 따르는 평범한 사람들이 만들어낸다는 것. 그리고 그 평범한 사람들이 역사의 피해자가 되기도 한다는 것.
전쟁은 모두를 피해자로, 동시에 어떤 의미에서는 모두를 가해의 구조 안에 가두었습니다.


역사가 기억해야 하는 이유

독일인 민간인의 피해를 기록하는 것은 나치의 범죄를 희석하거나 피해자와 가해자를 동등하게 놓으려는 시도가 아닙니다.
홀로코스트는 인류 역사에서 전례 없는 계획적 학살이었고, 그 책임은 명확합니다. 동시에, 전쟁이 만들어낸 모든 민간인의 고통은 (그것이 어느 민족의 것이든 ) 기록되고 이해될 자격이 있습니다. 고통에 위계를 두는 것은 또 다른 비인간화입니다.
독일이 전후 수십 년에 걸쳐 나치 과거사를 직시하고 청산한 뒤에야, 비로소 자국민의 피해도 담담하게 바라볼 수 있는 역사적 성숙에 이른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가해를 인정하는 것과 피해를 기억하는 것은 모순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둘을 함께 할 수 있을 때, 역사는 비로소 온전해집니다.
그리고 그것이, 역사를 공부하는 이유입니다.


📌 다음 화 예고 EP.09 · 오데르-나이세 선 : 지도에서 지워진 동부 독일 동프로이센은 소련 영토가 되었고, 슐레지엔과 포메른은 폴란드에 넘어갔습니다. 수백 년간 독일인이 살았던 땅에 새로운 국경선이 그어졌습니다. 그 선의 이름은 오데르-나이세. 이 선이 어떻게 그어졌는지, 그리고 독일이 그 선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기까지 무려 45년이 걸린 이유는 무엇인지, 다음 화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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