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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두 개의 독일, 하나의 역사

EP.06 · 뉘른베르크의 법정 : 전쟁범죄를 심판하다

by 책으로떠나는여행 2026. 6. 2.

두 개의 독일, 하나의 역사

EP.06 · 뉘른베르크의 법정 : 전쟁범죄를 심판하다


뉘른베르크 재판 피고석에 앉은 피고인들

1945년 11월 20일, 뉘른베르크.
법정 600번실에 21명의 남자들이 앉았습니다.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유럽의 운명을 쥐락펴락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헤르만 괴링은 여전히 오만한 눈빛을 거두지 않았습니다. 루돌프 헤스는 넋을 잃은 것처럼 허공을 바라보았습니다.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는 창백한 얼굴로 손을 떨었습니다.
피고석 뒤로 헬멧을 쓴 미군 헌병들이 줄지어 섰습니다. 방청석은 세계 각국의 기자와 외교관으로 가득 찼습니다. 카메라 플래시가 터졌습니다.
인류는 처음으로 전쟁의 가해자를 법정에 세웠습니다. 전례가 없는 일이었습니다. 선례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것이 논쟁이었습니다.


왜 뉘른베르크였나

재판 장소로 뉘른베르크가 선택된 것은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뉘른베르크는 나치즘의 상징적 심장부였습니다. 히틀러는 이 도시를 '제국의 도시'로 지정하고, 매년 이곳에서 수십만 명이 운집하는 나치당 전당대회를 열었습니다. 1935년에는 유대인의 시민권을 박탈하는 이른바 '뉘른베르크 법'이 이 도시의 이름을 달고 공포되었습니다.
그 도시에서 나치를 심판한다. 상징적 응보였습니다.
실용적 이유도 있었습니다. 뉘른베르크의 법원 건물은 전쟁 피해가 비교적 적었고, 인근에 대규모 수감 시설이 있었습니다. 네 나라 대표단이 모두 참여하기 좋은 위치이기도 했습니다.
재판은 1945년 11월 20일에 시작되어 1946년 10월 1일 최종 판결이 내려졌습니다. 열 달에 걸친 대장정이었습니다.


전례 없는 죄목들

뉘른베르크 재판이 역사에서 갖는 가장 큰 의미는 새로운 법적 개념의 탄생입니다.
기소 내용은 크게 네 가지였습니다. 평화에 반한 죄, 전쟁범죄, 인도에 반한 죄, 그리고 공동 모의. 이 중 '인도에 반한 죄(Crime against Humanity)'는 국제법 역사상 처음 등장한 개념이었습니다. 민간인을 대규모로 학살하거나 박해하는 행위는, 설령 그것이 자국 국민을 대상으로 했더라도, 국제사회가 심판할 수 있다는 선언이었습니다.
이것은 혁명적인 주장이었습니다. 그때까지 국제법의 기본 원칙은 '주권 불간섭'이었습니다. 한 나라가 자국 내에서 무슨 짓을 하든 다른 나라가 간섭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뉘른베르크는 그 원칙에 처음으로 균열을 냈습니다.
그러나 비판도 즉각 나왔습니다. 가장 강력한 비판은 '사후법 적용'이었습니다. 행위 당시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법으로 사람을 심판하는 것은 법치주의의 근본 원칙에 어긋난다는 것이었습니다. 피고측 변호인들은 이 점을 집요하게 파고들었습니다. 재판부는 결국 '인류의 보편적 양심'이라는 개념으로 이 비판을 넘어서려 했습니다. 성공적인 논리였는지는 오늘날까지도 법학자들 사이에서 논쟁 중입니다.


헤르만 괴링 - 뉘른베르크

괴링 : 법정을 지배하려 한 남자

피고석의 21명 중 가장 강렬한 존재감을 뿜어낸 인물은 헤르만 괴링이었습니다.
나치 공군 총사령관이자 히틀러의 후계자로 지명되었던 괴링은, 체포 당시 모르핀 중독 상태였습니다. 수용소에서 마약을 끊으면서 체중이 줄고 정신이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법정에서 그는 놀라운 모습을 보였습니다.
그는 검사들의 질문에 조목조목 반박했습니다. 때로는 검사를 몰아붙였고, 방청석에서 웃음을 끌어내기도 했습니다. 미국 수석 검사 로버트 잭슨과의 교차 심문은 법정 드라마의 절정이었습니다. 잭슨이 괴링의 페이스에 말려들어 당황하는 장면도 있었습니다. 괴링은 자신의 죄를 부인하지 않았지만, 그것이 죄라는 사실 자체를 부정했습니다. 자신은 독일을 위해 싸웠을 뿐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최종적으로 사형 선고를 받은 괴링은 집행 전날 밤 청산가리 캡슐을 삼켜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어떻게 독약을 손에 넣었는지는 오늘날까지 미스터리입니다. 법정에서도, 죽음에서도, 그는 끝까지 자신의 방식을 고집했습니다.


헤스 : 기억을 잃은 남자

루돌프 헤스는 정반대의 방식으로 법정을 혼란에 빠뜨렸습니다.
히틀러의 부관이자 나치당 부총재였던 헤스는 1941년 혼자 비행기를 몰고 영국으로 날아가 단독 평화 협상을 시도하다 체포된 인물이었습니다. 재판이 시작되었을 때 그는 기억상실을 주장했습니다. 자신이 누구인지도, 무엇을 했는지도 모른다고 했습니다.
정신과 전문가들이 감정했습니다. 의견은 엇갈렸습니다. 일부는 진짜 기억상실이라 했고, 일부는 연기라 했습니다. 재판 도중 헤스는 갑자기 기억이 돌아왔다고 선언하며 자신을 소개했습니다. "나는 루돌프 헤스입니다." 법정이 술렁였습니다.
그는 종신형을 선고받았습니다. 그리고 서베를린의 슈판다우 교도소에서 무려 46년을 홀로 복역하다, 1987년 93세의 나이에 목을 매 사망했습니다. 수십 년간 소련이 석방을 거부했습니다. 마지막 나치 전범 수감자였습니다.


소련의 역할 : 법정 안의 모순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가장 불편한 진실 중 하나는 소련의 역할이었습니다.
소련은 네 나라 중 하나로 재판에 참여했습니다. 소련 측 수석 검사 로만 루덴코는 나치의 전쟁범죄를 강하게 추궁했습니다. 그러나 법정 밖에서는 아무도 공개적으로 말하지 못하는 진실이 있었습니다.
1940년 봄, 소련 내무인민위원회(NKVD)는 폴란드 장교와 지식인 약 2만 2,000명을 카틴 숲에서 학살했습니다. 스탈린의 명령이었습니다. 소련은 이 학살을 나치 독일의 소행으로 뒤집어씌우려 했습니다. 실제로 뉘른베르크 기소장에는 카틴 학살이 나치의 범행이라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증거가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독일 측 변호인들이 반박 증거를 제출했습니다. 결국 재판부는 카틴 학살에 관한 소련의 주장을 기소 내용에서 조용히 삭제했습니다. 누구도 그 이유를 공식적으로 설명하지 않았습니다. 승전국의 편의가 진실보다 중요했습니다.
카틴 학살이 소련의 범행이라는 사실을 소련 스스로 공식 인정한 것은 1990년, 고르바초프 시대의 일이었습니다. 뉘른베르크 재판으로부터 44년이 지난 뒤였습니다.


판결 : 그리고 교수대

1946년 10월 1일, 최종 판결이 내려졌습니다.
사형: 괴링, 리벤트로프, 카이텔, 요들, 카울텐브루너 등 12명. 종신형: 헤스, 풍크, 레더 3명. 유기 징역: 4명. 무죄 방면: 3명.
사형 선고를 받은 자들은 10월 16일 새벽 교수형에 처해졌습니다. 괴링은 앞서 말씀드렸듯 전날 밤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나머지 10명이 차례로 교수대에 올랐습니다. 리벤트로프가 마지막으로 한 말은 이것이었습니다. "신의 자비를 구합니다. 독일 만세."
시신들은 뮌헨 외곽의 화장터에서 소각되었고, 재는 이자르강에 뿌려졌습니다. 무덤이 성지가 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습니다.


뉘른베르크가 남긴 것

재판은 끝났지만, 뉘른베르크가 제기한 질문들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명령에 따랐을 뿐'이라는 변명은 용납될 수 없다는 원칙이 확립되었습니다. 개인은 국가의 명령 뒤에 숨을 수 없다는 것. 이것이 '뉘른베르크 원칙'으로 국제법에 편입되었고, 훗날 유고슬라비아 전범 재판, 르완다 학살 재판, 국제형사재판소(ICC) 창설로 이어지는 길을 열었습니다.
그러나 비판도 남았습니다. 승전국이 패전국을 심판하는 재판이, 과연 진정한 정의일 수 있는가. 연합국의 전쟁범죄(드레스덴 폭격, 히로시마 원폭, 카틴 학살)는 왜 심판받지 않는가. '승자의 재판(victor's justice)'이라는 비판은 오늘날까지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정의는 완전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는 나았습니다. 인류는 적어도 '다음번에는 더 잘하겠다'는 약속을 법의 언어로 남겼습니다.
그 약속이 지켜지고 있는지는, 역사가 계속 묻고 있습니다.


📌 다음 화 예고 EP.07 · 소련군이 온다 : 점령의 첫 얼굴 1945년 봄, 소련군이 베를린에 입성했습니다. 해방군으로 환영받은 곳도 있었고, 점령군으로 공포의 대상이 된 곳도 있었습니다. 전쟁에서 2,700만 명을 잃은 소련군 병사들과 패전국 독일 민간인들 사이에서 벌어진 일들, 역사가 오랫동안 침묵해 온 그 이야기를, 다음 화에서 균형 있게 마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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