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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예술, 인간을 말하다

EP.26 : 벌거벗은 어린이상 : 푸토, 르네상스가 되찾은 기쁨

by 책으로떠나는여행 2026. 4. 30.

「예술, 인간을 말하다」 

도나텔로 칸토리아 — 춤추는 푸토 전체 (1433~39년) — 피렌체 두오모 오페라 박물관

1430년대, 피렌체 두오모 오페라 박물관.
두 개의 조각 작품이 나란히 놓여 있습니다. 하나는 도나텔로의 작품. 다른 하나는 루카 델라 로비아의 작품. 둘 다 대성당 오르간 위를 장식하기 위해 만들어진 성가대 난간(Cantoria)입니다.
루카 델라 로비아의 난간을 먼저 봅니다. 질서정연합니다. 소년들이 줄지어 서서 악기를 연주하거나 노래를 부릅니다. 우아하고 침착합니다. 고대 그리스 조각의 이상적 아름다움이 기독교적 경건함과 결합되어 있습니다.
그 옆에 도나텔로의 난간이 있습니다.
전혀 다릅니다. 아이들이 춤을 춥니다. 달리고, 뛰어오르고, 서로 밀치고, 웃습니다. 어떤 아이는 몸을 비틀며 춤을 추고, 어떤 아이는 다른 아이의 등에 올라타려 합니다. 배경의 모자이크 문양 위로 이 아이들이 폭발하듯 움직입니다.
이 아이들은 벌거벗었습니다.
그들은 기도하지 않습니다. 엄숙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그냥 기쁩니다. 살아있는 것이 기쁘고, 움직이는 것이 기쁘고, 함께 있는 것이 기쁩니다.
반 룬은 이 두 작품을 나란히 두고 오랫동안 생각합니다. 루카 델라 로비아의 아이들이 중세와 르네상스의 경계에 있다면, 도나텔로의 아이들은 완전히 새로운 세계에 속한다고. 그 새로운 세계에서 인간의 몸은 아름답습니다. 어린 시절의 기쁨은 신성합니다. 그리고 벌거벗은 것은 죄가 아닙니다.
이것이 르네상스가 세상에 선언한 것이었습니다.


도나텔로 칸토리아 — 춤추는 푸토 세부 (1433~39년)

푸토란 무엇인가 : 작은 존재의 큰 의미

푸토(Putto, 복수형 Putti). 이탈리아어로 '아이', '소년'이라는 뜻입니다.
예술에서 푸토는 통통하고 날개가 달리거나 달리지 않은 벌거벗은 어린 남자아이의 형상입니다. 이 이미지는 고대 그리스와 로마 예술에서 에로스(Eros) 혹은 쿠피도(Cupido)로 등장했습니다. 사랑의 신의 어린 형태.
그러나 르네상스에서 푸토는 단순한 신화적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기쁨 자체의 상징이었습니다. 순수한 생명력의 표현이었습니다. 중세가 억눌렀던 육체적 기쁨과 어린 시절의 자유로움이 예술 속에서 당당하게 귀환한 것이었습니다.
반 룬이 이 주제에 별도의 챕터를 할애한 것은 이유가 있습니다.
푸토는 단순한 장식적 모티프가 아닙니다. 그것은 르네상스 세계관의 가장 솔직한 표현이었습니다. 중세가 인간의 몸을 죄의 그릇으로 보았다면, 르네상스는 그것을 아름다움의 그릇으로 보았습니다. 그 전환이 가장 직접적이고 가장 순수하게 드러나는 형태가 바로 벌거벗은 아이, 푸토였습니다.
어른의 나체는 복잡합니다. 에로틱한 함의가 있고, 도덕적 판단이 따라옵니다. 그러나 아이의 나체는 다릅니다. 그것은 순수합니다. 아담과 이브가 타락하기 전의 상태, 즉 벌거벗었으나 부끄럽지 않은 상태를 가장 자연스럽게 표현할 수 있는 형태입니다.
르네상스 예술가들은 이 이미지를 통해 말했습니다. 몸은 아름답습니다. 기쁨은 죄가 아닙니다. 이 세상의 삶은 가치 있습니다.


고대의 기억 : 에로스에서 푸토로

푸토의 역사는 고대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고대 그리스에서 에로스는 처음에 우주적인 힘이었습니다. 헤시오도스의 신화에서 에로스는 카오스에서 탄생한 원초적 존재였습니다. 아름다운 청년의 모습으로 그려졌습니다.
그러나 기원전 4~3세기를 지나면서 에로스는 어린아이로 변했습니다. 작고 통통하고 장난스러운 아이. 황금 화살로 신과 인간의 마음에 사랑을 심는 장난꾸러기. 이 형태가 로마 시대에 쿠피도(큐피드)로 이어졌습니다.
로마 예술에서 쿠피도들은 어디에나 있었습니다. 벽화에, 모자이크에, 석관에, 공예품에. 그들은 포도주를 만들고, 경주를 하고, 새를 잡고, 서로 싸우며 놀았습니다. 신화적 존재이면서 동시에 일상의 장식적 모티프였습니다.
그러나 기독교 시대가 오면서 이 이미지들은 사라졌습니다. 이교적 에로티즘과 연결된 나체 아이의 이미지는 기독교 예술에서 설 자리가 없었습니다.
중세에도 아이들이 예술에 등장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언제나 작은 어른처럼 그려졌습니다. 아기 예수조차 어른의 표정을 가진 작은 성인처럼 표현되었습니다. 중세의 신학적 세계관에서 어린 시절은 아직 이성과 덕을 갖추지 못한 미완성 상태였습니다. 그 미완성이 아름다울 수는 없었습니다.
반 룬은 이 공백에 주목합니다. 수백 년 동안 예술에서 사라졌던 아이다운 아이, 즉 기쁨에 넘쳐 뛰노는 어린 생명. 그것이 르네상스에서 귀환했을 때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했을지를.


도나텔로의 발명 : 기쁨을 돌로 빚다

르네상스 푸토의 진정한 발명자는 도나텔로(Donatello, 1386~1466)입니다.
그는 고대 로마의 쿠피도 이미지를 연구했습니다. 로마 석관에 새겨진 장난스러운 아이들, 고대 프리즈를 장식한 통통한 소년들. 이 이미지들이 중세에 사라진 이후 처음으로 도나텔로의 손에서 되살아났습니다.
피렌체 두오모를 위한 성가대 난간(1433~1438). 이것이 그의 가장 혁명적인 푸토 작품입니다.
이 난간의 아이들을 보면 충격을 받습니다. 그들은 통제되지 않습니다. 경계가 없습니다. 화면의 틀을 무시하고 넘쳐흐릅니다. 춤이 너무 격렬해서 어떤 아이의 발이 땅을 떠난 것 같습니다. 어떤 아이는 웃다가 쓰러질 것 같습니다.
이것은 기도하는 아이들이 아닙니다. 이것은 그냥 기쁜 아이들입니다. 아무 이유 없이 기쁜. 존재 자체가 기쁜.
도나텔로는 이 작품을 단순히 장식으로 만들지 않았습니다. 그는 신학적 진술을 만들었습니다. 기쁨이 신성하다. 어린 시절의 순수한 기쁨이 신 앞에서 가장 아름다운 찬양이다. 다윗 왕이 주님 앞에서 힘껏 춤을 추었듯이.
시편 150편이 이 조각에 새겨져 있습니다. "할렐루야. 신의 성소에서 그를 찬양하라. 그의 권능의 창공에서 그를 찬양하라. 춤으로 그를 찬양하라."
도나텔로의 아이들은 그 찬양을 몸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반 룬은 이 작품에서 예술이 신학을 어떻게 변화시킬 수 있는지를 봅니다. 글로 쓰인 신학은 때로 딱딱합니다. 그러나 기쁨에 넘쳐 춤추는 아이를 돌로 빚어내면, 그 신학이 살아납니다. 숨을 쉽니다. 보는 사람의 마음에 직접 들어옵니다.


루카 델라 로비아 : 또 다른 목소리

도나텔로와 같은 시기에 같은 두오모를 위해 성가대 난간을 만든 루카 델라 로비아(Luca della Robbia, 1399~1482). 이 두 작품을 나란히 보면 르네상스 예술의 다양성이 선명해집니다.
루카의 난간은 다릅니다. 아이들이 더 차분합니다. 더 질서정연합니다. 음악을 연주하거나 노래하는 자세가 정확하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아이들의 얼굴에 집중하는 표정이 있습니다.
도나텔로의 폭발적 기쁨과 루카의 절제된 우아함. 이 대비 자체가 르네상스 예술의 풍성함입니다. 기쁨을 표현하는 방법이 하나가 아닙니다.
루카 델라 로비아는 또한 유약 테라코타(glazed terracotta) 기법으로 유명합니다. 흰색 인물에 파란 배경. 이 조합이 그의 작업실, 델라 로비아 작업실의 특징이 되었습니다. 가족들이 대를 이어 이 기법으로 수많은 작품들을 만들었습니다. 마돈나와 아기 예수, 천사들, 푸토들. 이 작품들이 피렌체와 토스카나 전역의 교회와 건물 외벽을 장식했습니다.
반 룬은 루카의 유약 테라코타에서 예술의 민주화를 봅니다. 대리석과 청동은 비쌉니다. 그러나 테라코타는 상대적으로 저렴했습니다. 루카의 기법 덕분에 부유한 귀족의 궁전뿐 아니라 작은 교회와 일반 가정에도 아름다운 예술 작품이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아름다움이 더 넓은 곳으로 퍼진 것입니다.


천사가 된 푸토 : 케루빔과 푸토의 만남

르네상스에서 푸토가 폭발적으로 증가한 데는 흥미로운 신학적 이유가 있었습니다.
성경은 천사들에 대해 여러 형태를 언급합니다. 그 중 케루빔(Cherubim)이 있습니다. 에제키엘서와 창세기에 등장하는 이 존재들은 원래 강력하고 위엄 있는 존재로 묘사됩니다. 에덴 동산을 지키는 불검을 든 수호자.
그런데 르네상스 화가들이 이 케루빔을 통통한 아기 천사의 모습으로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은 신학적으로 정확한 표현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 이미지가 너무 매력적이었기 때문에 빠르게 퍼져나갔습니다.
반 룬은 이 신학적 오류에서 예술의 힘을 봅니다. 예술 이미지는 텍스트보다 더 강력합니다. 한번 눈에 박힌 이미지는 수백 년간 지속됩니다. 오늘날 우리가 케루빔을 생각할 때 떠오르는 이미지, 즉 볼이 통통하고 날개가 달린 아기 천사는 성경에서 온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르네상스 예술가들이 만들어낸 것입니다.
그리고 이 이미지가 왜 이토록 오래 살아남았을까요. 반 룬의 답은 명확합니다. 그것이 인간의 무언가에 깊이 반응하기 때문입니다. 순수한 기쁨, 보호받고 싶은 욕구, 그리고 신성한 것이 친근하고 귀여운 형태로 다가오기를 바라는 마음. 이 보편적인 인간적 감정을 푸토가 표현했기 때문입니다.


라파엘로 《시스티나 성모》 하단 두 천사 (1512년) — 드레스덴 게멜데갈레리

라파엘로의 케루빔 : 역사상 가장 유명한 아기 천사들

르네상스 푸토의 역사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작품은 아마도 라파엘로(Raphael, 1483~1520)의 《시스티나 성모》(1512) 하단에 있는 두 천사일 것입니다.
원래 이 그림은 산 시스토 성당을 위해 그려진 제단화입니다. 성모 마리아가 아기 예수를 안고 구름 위에 서 있고, 양쪽에 성 식스토와 성 바르바라가 있습니다. 그 아래에 두 명의 작은 천사들이 팔꿈치를 괴고 위를 올려다보고 있습니다.
이 두 천사가 지난 500년 동안 세계에서 가장 많이 복제된 이미지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엽서로, 포스터로, 머그잔으로, 핸드폰 케이스로.
왜일까요.
반 룬은 이 질문에 신중하게 답합니다. 이 두 천사는 완벽하게 계산된 순진함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의 표정은 지루함과 경이로움 사이 어딘가에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아이들이 무언가를 멍하니 바라볼 때 짓는 그 표정. 이것이 보는 모든 사람의 마음속 어린 시절을 건드립니다.
그러나 반 룬은 조심스러운 평가도 합니다. 라파엘로의 천사들은 너무 매끄럽습니다. 도나텔로의 폭발적 생명력이 없습니다. 라파엘로는 보는 사람을 안심시킵니다. 도나텔로는 보는 사람을 흔들어 깨웁니다.
둘 다 위대합니다. 그러나 다른 방식으로 위대합니다.


보티첼리 《비너스의 탄생》(1484~86년) — 우피치 미술관, 피렌체

보티첼리의 푸토들 : 이교와 기독교 사이

보티첼리(Sandro Botticelli, 1445~1510)의 그림들에는 수많은 푸토가 등장합니다.
《봄(Primavera)》에서 눈을 가린 에로스가 화살을 겨누고 있습니다. 《비너스의 탄생》에서 서풍의 신 제피로스와 함께 날아다니는 작은 존재들이 있습니다. 그의 성모 그림들에는 천사로 변한 푸토들이 마돈나 주위를 맴돕니다.
보티첼리의 푸토들은 도나텔로의 것보다 더 우아합니다. 더 서정적입니다. 그들은 고대 이교 신화의 에로스이면서 동시에 기독교 천사입니다. 두 전통 사이 어딘가에 떠 있습니다.
이것이 신플라톤주의의 영향입니다. 피치노의 철학에서 고대 이교의 에로스와 기독교의 신성한 사랑은 근본적으로 같은 것의 다른 표현이었습니다. 이교의 에로스도 신성한 사랑을 향한 인간 영혼의 갈망을 나타냅니다. 그렇다면 이교의 날개 달린 아이도 기독교의 천사와 같은 존재가 될 수 있습니다.
보티첼리는 이 융합을 그림으로 표현했습니다. 그의 푸토들이 이교적이면서 기독교적인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반 룬은 보티첼리의 이 융합 작업에서 르네상스 문화의 핵심 프로젝트를 봅니다. 고대와 기독교의 통합. 이교적 아름다움과 기독교적 신앙의 화해. 이것이 성공했는지는 논쟁의 여지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시도가 만들어낸 예술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는 논쟁의 여지가 없습니다.


건축 속의 푸토 : 공간을 채운 기쁨

푸토는 회화와 조각에만 있지 않았습니다. 르네상스 건축에서도 푸토는 중요한 장식 요소가 되었습니다.
기둥 머리(Capital)에 새겨진 푸토들. 출입구 위의 삼각형 박공(Pediment)을 장식하는 푸토들. 천장의 스투코(stucco) 장식 속에서 날아다니는 푸토들.
특히 브라만테(Bramante)와 라파엘로 이후 로마 르네상스 건축에서 푸토는 건축적 장식의 핵심 요소가 되었습니다. 성 베드로 대성당의 내부, 파르네세 궁전의 홀, 빌라 파르네시나의 프레스코. 이 공간들에서 푸토들이 기둥 사이를 날고, 화환을 들고, 방패를 붙잡고, 문장(紋章)을 받치고 있습니다.
이 건축적 푸토들이 만들어내는 효과는 독특합니다. 엄숙할 수 있는 공간이 생기를 얻습니다. 권위 있는 공간이 친근해집니다. 장엄한 것과 귀여운 것이 공존합니다.
반 룬은 이 공존에서 르네상스 건축의 인간적 차원을 봅니다. 고딕 성당이 신의 압도적인 위엄을 표현했다면, 르네상스 건물은 인간의 척도를 유지하려 했습니다. 푸토가 그 인간적 척도의 표시였습니다. 어린 생명이 있는 공간은 너무 차갑거나 너무 위압적일 수 없습니다.


미켈란젤로의 푸토 : 힘과 기쁨

미켈란젤로(Michelangelo, 1475~1564)도 초기에 푸토를 만들었습니다.
《계단의 마돈나》(1490~1492). 로렌초 데 메디치의 정원에서 공부하던 열다섯 살 소년이 만든 부조. 마리아 뒤에 계단에서 잠든 아기 예수. 그리고 계단 위쪽에 몇 명의 작은 아이들. 이미 이 초기 작품에서 미켈란젤로 특유의 강인함이 느껴집니다.
《바쿠스》(1496~1497). 로마에서 만든 이 작품에서 바쿠스 옆에 작은 사티로스 아이가 포도송이를 먹고 있습니다. 이 어린 사티로스는 도나텔로의 장난스러운 에너지와 미켈란젤로의 조형적 힘이 결합된 놀라운 존재입니다.
시스티나 천장화(1508~1512)에도 이냐이들이 있습니다. 예언자들과 무녀들이 앉아 있는 옥좌 양쪽에 앉은 이냐디(ignudi), 즉 벌거벗은 청년들. 이들은 엄밀히 말해 푸토가 아닙니다. 더 성숙한 형태입니다. 그러나 이들 역시 같은 전통에서 왔습니다. 벌거벗은 인체의 아름다움을 찬양하는 르네상스적 충동.
반 룬은 미켈란젤로의 작품들에서 푸토 전통이 어떻게 진화했는지를 봅니다. 도나텔로의 푸토들이 기쁨의 표현이었다면, 미켈란젤로의 나체 인물들은 인간 능력의 절정에 대한 찬가입니다. 같은 방향, 다른 강도.


바로크로의 전이 : 멈추지 않은 기쁨

르네상스의 푸토는 바로크 시대에도 계속되었습니다. 오히려 더욱 번성했습니다.
루벤스(Rubens)의 그림들. 루벤스가 그린 풍성하고 관능적인 세계에서 푸토들이 넘쳐납니다. 그들은 더 통통하고, 더 살아있고, 더 감각적입니다. 루벤스의 푸토들 앞에서는 르네상스의 절제된 이상미가 폭발적인 생명력으로 변환되었음을 느낍니다.
베르니니(Bernini)의 조각들. 로마 바로크 조각의 거장이 만든 천사들. 〈성녀 테레사의 환희〉에서 황금 화살을 들고 있는 천사. 발다키노를 둘러싼 천사들. 이들은 르네상스 푸토의 직계 후손이지만 훨씬 더 극적이고 감정적입니다.
베르니니의 천사들은 느낍니다. 그들의 표정에 감정이 있습니다. 경이로움, 헌신, 때로는 인간적인 아름다움에 가까운 관능성까지. 이것이 바로크입니다. 르네상스가 이상을 향했다면 바로크는 감정을 향합니다.
반 룬은 이 전이에서 예술 형식의 생명력을 봅니다. 푸토라는 이미지가 르네상스에서 탄생하고 바로크에서 변형되고, 18세기 로코코에서 절정에 달합니다. 프라고나르와 부셰의 그림들에서 푸토들은 더 이상 신학적 존재가 아닙니다. 그들은 순수한 장식의 기쁨이 됩니다. 그리고 그 기쁨이 또한 아름답습니다.


푸토의 의미 : 왜 인류는 이 이미지를 사랑하는가

반 룬은 이 챕터의 핵심 질문으로 돌아옵니다. 왜 이 이미지가 이토록 오랫동안 사랑받는가.
그의 답은 여러 층위를 가집니다.
첫 번째, 순수함의 갈망. 어른의 세계는 복잡하고 타락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이의 세계는 다릅니다. 벌거벗은 아이는 문명의 무게를 지지 않습니다. 계급도, 편견도, 죄의식도 없습니다. 이 순수함에 대한 갈망이 보편적입니다.
두 번째, 기쁨의 정당화. 중세 기독교에서 육체적 기쁨은 의심받았습니다. 그러나 아이의 기쁨은 누구도 죄라고 부를 수 없습니다. 푸토는 기쁨이 정당하다는 선언이었습니다. 이 선언이 억눌렸던 인간의 무언가를 해방했습니다.
세 번째, 사랑받고 싶은 욕구. 통통하고 귀여운 아기의 이미지는 인간의 보호 본능을 자극합니다. 돌봐주고 싶은 마음. 이것이 이 이미지에 대한 즉각적이고 본능적인 반응입니다.
네 번째, 시간을 초월한 시작. 아이는 아직 결정되지 않은 존재입니다. 모든 가능성이 열려 있습니다. 푸토를 볼 때 우리는 시작을 봅니다. 새로운 시작,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가능성. 이것이 희망입니다.
반 룬은 이 네 가지 이유가 모두 르네상스의 정신과 연결되어 있음을 봅니다. 순수함의 회복, 기쁨의 정당화, 사랑의 긍정, 새로운 시작. 이것이 르네상스가 세상에 가져온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푸토가 그 모든 것을 하나의 작은 형상 안에 담아냈습니다.


일상 속의 푸토 : 예술의 민주화

푸토가 르네상스 예술의 중요한 기여인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예술을 일상으로 가져왔습니다.
거대한 제단화나 웅장한 건축물만이 르네상스 예술이 아니었습니다. 루카 델라 로비아의 유약 테라코타 작품들, 문 위를 장식한 작은 부조들, 어린이 무덤의 기념물들. 이런 작품들에도 푸토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작품들이 부유한 귀족의 저택에만 있지 않았습니다. 동네 교회에, 길가의 작은 성당에, 일반 가정의 테라코타 장식에. 푸토는 르네상스 예술을 사회의 모든 층위로 퍼뜨리는 데 기여했습니다.
반 룬은 이 민주화의 의미를 강조합니다. 예술은 박물관 안에만 있어서는 안 됩니다. 예술은 일상 속에서 살아야 합니다. 르네상스 피렌체에서 그것이 가능했던 이유 중 하나가 푸토였습니다. 크고 비싼 것이 아닌 작고 친근한 이미지가 예술의 경계를 허물었습니다.


반 룬이 푸토에서 읽어낸 것

반 룬은 푸토 챕터를 마무리하면서 이 작은 존재가 가르쳐주는 큰 진실을 이야기합니다.
중세는 인간의 몸을 두려워했습니다. 그것이 죄로 이어질 수 있다고. 기쁨을 경계했습니다. 그것이 신을 잊게 만들 수 있다고. 어린 시절을 폄하했습니다. 아직 이성과 덕을 갖추지 못한 미완성 상태라고.
르네상스의 푸토는 이 모든 것에 반박했습니다.
벌거벗은 아이의 몸은 아름답습니다. 기쁨은 신성합니다. 어린 시절은 타락하기 전의 순수함, 즉 인간이 가장 신을 닮은 상태입니다.
이것이 도나텔로의 성가대 난간 아이들이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보티첼리의 눈 가린 에로스가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라파엘로의 두 천사가 팔꿈치를 괴고 위를 바라보며 말하는 것입니다.
반 룬은 묻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이 메시지를 얼마나 기억하고 있는가. 어른이 된다는 것이 기쁨을 잃어가는 과정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복잡한 세상 속에서도 통통한 아이처럼 순수하게 기뻐할 수 있는 능력, 그것이 예술이 지키려 하는 것 중 하나라고.
도나텔로의 아이들은 500년이 지난 오늘도 춤을 춥니다. 그 춤이 멈추지 않는 한, 인간의 기쁨도 멈추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기쁨이 예술의 가장 깊은 뿌리 중 하나입니다.


🎵 이번 화 감상 추천

푸토가 표현하는 순수한 기쁨과 생명력을 음악으로 경험해 보시기를 권합니다.

    • 비발디, 《글로리아 RV 589》 중 〈글로리아 인 엑첼시스〉 : 천사들의 찬양을 담은 이 합창곡은 도나텔로의 성가대 아이들이 부르는 노래처럼 들립니다. 폭발하는 기쁨, 억누를 수 없는 생명력. 바로크 음악이 르네상스 푸토의 에너지를 음표로 옮긴 것 같습니다.

    •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21번 K.467》 2악장 : 이 느린 악장의 서정적 아름다움은 라파엘로의 두 천사가 위를 올려다보는 그 표정과 같습니다. 경이로움과 고요함이 공존하는 순간. 천상의 것이 인간적으로 친근하게 느껴지는 순간.

    • 하이든, 《천지창조》 중 〈하느님 보시기에 좋았더라〉 : 창조의 기쁨을 노래하는 이 합창에서 새로 탄생한 것들이 존재 자체로 기뻐하는 에너지가 느껴집니다. 르네상스 푸토들이 표현하려 했던 그 기쁨, 즉 존재 자체가 아름답다는 감각이 음악으로 표현됩니다.


✏️ 다음 화 예고

다음 시간에는 르네상스 예술의 또 하나의 혁명으로 넘어갑니다. 수천 년간 벽에 물을 개어 그리던 프레스코화가 지배하던 회화의 세계에, 전혀 다른 재료와 기법이 등장했습니다. 기름에 안료를 개는 유화. 이 기법이 가져온 변화는 단순한 기술적 혁신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빛을 화폭 안으로 가두는 혁명이었습니다. 플랑드르에서 시작된 이 혁명이 어떻게 이탈리아로, 그리고 유럽 전체로 퍼져나갔는지를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EP.27 : 빛을 담은 물감: 유화의 발명에서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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