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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예술, 인간을 말하다

EP.13 황금빛 모자이크 : 비잔틴 예술, 신성함을 돌로 빚다

by 책으로떠나는여행 2026. 4. 12.

「예술, 인간을 말하다」 

기원후 537년 12월 27일, 콘스탄티노플.
유스티니아누스 황제가 새로 완공된 성당 안으로 걸어 들어갑니다. 그 순간 그는 걸음을 멈추었습니다. 그리고 두 팔을 벌리며 외쳤습니다.
"솔로몬이여, 내가 당신을 능가했도다."
그의 눈앞에 펼쳐진 것은 인류가 그때까지 본 적 없는 공간이었습니다. 지름 31미터의 거대한 돔이 마치 허공에 떠 있는 것처럼 빛 속에 솟아 있었습니다. 돔 밑단을 따라 뚫린 40개의 창문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햇빛이 황금빛 모자이크 벽면에 부딪혀 온 공간을 빛으로 채웠습니다. 마치 돔이 땅 위에 서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서 내려온 것처럼.
성 소피아 대성당. 그리스어로 하기아 소피아, 신성한 지혜의 성당.
반 룬은 이 건물 앞에서 오랫동안 말을 잃습니다. 그는 씁니다. 인간이 만들 수 있는 것의 한계가 어디인지를 이 건물이 보여준다고. 그리고 동시에 그 한계 너머를 향한 인간의 갈망이 얼마나 강렬한지도.
비잔틴 예술은 그 갈망으로 만들어진 예술입니다.


비잔티움 : 두 세계의 교차로

서로마 제국이 476년 게르만족의 침입으로 무너졌습니다. 그러나 동로마 제국은 살아남았습니다.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330년에 세운 새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중심으로, 동로마 제국은 이후 무려 1,000년을 더 존속했습니다. 서로마가 무너진 476년부터 오스만 제국에 함락된 1453년까지.
이 제국을 우리는 비잔틴 제국이라 부릅니다. 콘스탄티노플의 옛 그리스식 이름인 비잔티움에서 따온 명칭입니다. 그러나 정작 비잔틴인들 자신은 스스로를 로마인이라 불렀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로마 제국의 정통 계승자라고 믿었습니다.
비잔티움의 지정학적 위치는 독특했습니다. 유럽과 아시아가 만나는 곳. 지중해와 흑해를 잇는 곳. 그리스 문화와 로마 제도와 기독교 신앙이 합류하는 곳. 이 세 가지 전통의 충돌과 융합이 비잔틴 예술을 만들어냈습니다.
반 룬은 비잔틴 문명을 서양도 동양도 아닌 독특한 제3의 세계로 봅니다. 그리스의 지적 전통, 로마의 행정 체계, 동방의 신비주의적 종교성. 이 세 가지가 하나로 녹아든 곳에서 서양 예술사의 그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독특한 아름다움이 탄생했습니다.


하기아 소피아 : 하늘이 내려온 건물

비잔틴 건축의 정점이자 인류 건축사의 기적, 하기아 소피아를 먼저 살펴보아야 합니다.
황제 유스티니아누스는 532년 니카 반란으로 이전 성당이 불타자 전혀 새로운 성당을 짓기로 결심했습니다. 건축가 이시도루스와 안테미우스에게 명령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건물을 지으라고. 5년 10개월. 1만 명의 노동자. 당시 제국 연간 세수의 수배에 달하는 비용.
하기아 소피아의 건축적 혁신은 판테온을 넘어섭니다. 판테온의 돔은 원통형 기반 위에 놓여 있습니다. 그러나 하기아 소피아의 돔은 네 개의 거대한 아치가 만드는 사각형 공간 위에 떠 있습니다. 이 전환이 얼마나 어려운 기술적 문제인지는 건축가라면 누구나 압니다. 원형 돔을 사각형 기반 위에 올리려면 삼각형의 곡면 구조물, 펜던티브(pendentive)가 필요합니다. 비잔틴 건축가들이 이 문제를 처음으로 완벽하게 해결했습니다.
그러나 하기아 소피아의 진정한 혁명은 기술이 아닌 빛입니다.
돔 밑단을 따라 뚫린 40개의 창문. 이 창문들로 쏟아져 들어오는 햇빛이 돔을 허공에 떠 있는 것처럼 만들었습니다. 당대의 역사가 프로코피우스는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돔이 황금 사슬에 매달려 하늘에서 내려온 것 같았다고. 이것이 우연이 아닙니다. 비잔틴 건축가들은 빛 자체를 건축 재료로 사용했습니다.
반 룬은 하기아 소피아의 이 빛의 효과에서 비잔틴 신학을 읽어냅니다. 신은 빛이다. 빛이 있는 곳에 신이 있다. 건물 안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빛은 단순한 조명이 아닙니다. 그것은 신성한 임재의 시각적 표현입니다. 비잔틴 예술은 처음부터 끝까지 이 신학적 확신 위에 세워져 있습니다.

소피아 사원


모자이크 : 빛을 짜다

비잔틴 예술의 가장 중요한 매체는 모자이크입니다. 그러나 비잔틴 모자이크는 로마의 모자이크와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로마 모자이크는 바닥에 깔렸습니다. 발밑의 예술. 그러나 비잔틴 모자이크는 벽과 천장과 돔을 채웠습니다. 눈높이에서, 혹은 위에서 내려다보는 예술.
재료도 달랐습니다. 로마 모자이크가 주로 자연석과 도자기를 사용했다면, 비잔틴 모자이크는 유리를 사용했습니다. 특히 황금 유리 테세라(tessera, 모자이크 조각). 얇은 황금 박을 두 장의 유리 사이에 끼워 구운 이 특수한 조각들이 황금빛 배경을 만들었습니다.
황금 배경은 비잔틴 예술의 핵심 언어입니다. 황금색은 현실의 공간이 아닙니다. 그것은 시간을 초월한 신성한 공간, 영원의 빛입니다. 그 안에 있는 인물들은 역사 속의 특정 순간이 아니라 영원한 진리의 표현으로 존재합니다.
그리고 비잔틴 장인들은 테세라를 완전히 수평으로 놓지 않았습니다. 미세하게 각도를 달리하여 빛이 다양한 방향으로 반사되도록 했습니다. 그 결과 모자이크 표면은 살아서 떨리는 것처럼 빛을 발합니다. 촛불이 켜지면 황금빛 벽 전체가 흔들리며 숨을 쉽니다.
라벤나의 산 비탈레 성당. 이스탄불의 카리예 자미. 시칠리아 팔레르모의 팔라티나 예배당. 이 건축물들의 내부를 가득 채운 비잔틴 모자이크들 앞에서 반 룬은 말합니다. 이것들을 보지 않고서는 비잔틴 예술을 이해했다고 말할 수 없다고. 사진으로는 그 빛의 떨림을 전달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아래에서 본 하기아 소피아의 돔과 펜던티브


이콘 : 신성을 담은 창문

비잔틴 예술의 또 다른 핵심은 이콘(Icon)입니다.
이콘은 단순한 종교 그림이 아닙니다. 그리스어로 이콘은 '이미지', '형상'을 뜻합니다. 비잔틴 신학에서 이콘은 그것이 묘사하는 신성한 존재와 신비로운 연결을 가진다고 믿어졌습니다. 이콘을 통해 성인에게 기도하면 그 기도가 성인에게 닿는다고. 이콘 앞에서 예배하는 것은 이콘을 예배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가리키는 신성한 실재를 예배하는 것이라고.
이콘 제작은 단순한 예술 행위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영적 행위였습니다. 이콘 화가는 작업을 시작하기 전에 금식하고 기도했습니다. 성인의 이콘을 그리기 전에 그 성인의 삶을 묵상했습니다. 그림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기도를 드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콘 화가를 이코노그라포스, 즉 이콘을 쓰는 사람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리는 것이 아니라 쓰는 것.
비잔틴 이콘의 양식적 특성들은 모두 신학적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황금 배경은 신성한 빛을 나타냅니다. 역원근법, 즉 먼 것이 더 크게 표현되는 방식은 영적으로 중요한 것이 더 강조되어야 한다는 믿음에서 나옵니다. 크고 깊은 눈은 영혼의 창입니다. 작은 입과 좁은 코는 육체적 욕망의 절제를 나타냅니다. 납작하게 표현된 몸은 삼차원적 현실이 아닌 이차원적 영원의 세계에 속한다는 표시입니다.
반 룬은 이 양식들의 비사실성을 무지나 기술 부족으로 보는 시각을 단호하게 거부합니다. 비잔틴 화가들은 사실적으로 그릴 수 없었던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사실적으로 그리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현실을 모방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현실 너머의 진리를 가리키는 것이 목적이었기 때문입니다.


성상파괴 논쟁 : 이미지를 둘러싼 전쟁

비잔틴 예술사에서 가장 극적인 사건은 8~9세기에 일어난 성상파괴 논쟁, 이코노클라즘(Iconoclasm)입니다.
726년, 황제 레오 3세가 칙령을 내렸습니다. 교회와 공공장소의 모든 이콘을 제거하라고. 이콘 숭배는 우상숭배이며, 그것이 하나님의 진노를 불러 제국에 재앙을 가져온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습니다. 이웃한 이슬람 세력과 유대교 모두 형상 숭배를 금지하고 있었고, 그것이 더 강한 신앙의 표시라는 생각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황제의 명령에 따라 군인들이 교회로 들어갔습니다. 수백 년에 걸쳐 만들어진 이콘들이 끌어내려지고 불태워졌습니다. 모자이크들이 회칠로 덮였습니다. 이콘을 지키려 한 수도사들과 신자들이 처형되거나 추방되었습니다.
이 논쟁은 120년 이상 지속되었습니다. 이콘을 지지하는 성상옹호파와 이콘을 반대하는 성상파괴파 사이의 투쟁. 황제들과 황후들이 번갈아 가며 어느 편을 들었습니다. 843년 마침내 성상옹호파가 승리했습니다. 이콘은 복원되었고, 이 승리의 날이 오늘날까지 정교회에서 '정교회의 승리' 축일로 기념됩니다.
반 룬은 이 논쟁에서 예술이 단순한 장식이 아님을 보여주는 가장 극적인 증거를 봅니다. 이미지 하나를 걸어두느냐 마느냐의 문제로 제국이 분열하고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예술은 언제나 권력과 신앙과 정체성의 핵심에 있습니다. 그것이 예술을 위험하게 만들고, 동시에 소중하게 만듭니다.


유스티니아누스의 초상 — 황제와 신의 경계

라벤나 산 비탈레 성당의 후진 모자이크는 비잔틴 예술이 도달한 최고의 경지 중 하나입니다.
왼쪽 벽면에는 황제 유스티니아누스가 신하들과 성직자들에 둘러싸여 성찬 예물을 봉헌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오른쪽 벽면에는 황후 테오도라가 시녀들과 함께 같은 행위를 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이 모자이크들의 구성을 자세히 보면 비잔틴의 정치신학이 읽힙니다. 황제의 머리 위에는 후광이 있습니다. 황제가 신성한 존재임을 선언하는 표시. 그러나 그것은 성인의 후광과 같은 형태입니다. 황제는 신과 인간 사이의 경계에 서 있는 존재입니다.
유스티니아누스의 얼굴을 봅니다. 이것은 실제 초상이 아닙니다. 이상화된 황제의 얼굴. 황금빛 배경 속에서, 보라색 예복을 입고, 황금 왕관을 쓴 채, 그는 영원한 시간 속에 존재합니다. 나이가 없습니다. 감정이 없습니다. 그것이 신성한 황제의 표현 방식입니다.
반 룬은 이 모자이크에서 비잔틴 문명의 본질을 봅니다. 종교와 정치의 완전한 융합. 황제는 신의 대리인이고, 예술은 그 신성한 권위를 가시화하는 도구입니다. 이 체제에서 예술가는 개인적 표현이 아닌 신학적 진술을 만들었습니다. 자신의 이름을 남기는 것이 아니라 신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비잔틴 공예 : 손끝의 천국

비잔틴 예술은 모자이크와 이콘에만 있지 않았습니다. 금속 공예, 상아 조각, 직물, 필사본 채색화. 이 모든 영역에서 비잔틴 장인들은 눈부신 성취를 이루었습니다.
비잔틴 금 세공의 기법은 경이롭습니다. 클루아조네(cloisonné) 기법. 가느다란 금 띠로 구획을 나누고 그 안에 색유리 가루를 넣어 구운 것. 그 결과물은 빛에 따라 색이 변하는 살아있는 보석 같습니다. 베네치아 산 마르코 성당의 팔라 도로(Pala d'Oro)는 비잔틴 금 세공의 최고 걸작으로 꼽힙니다. 수백 개의 클루아조네 패널이 황금 틀 안에 배치된 이 제단화는 바라보고 있으면 시간이 멈추는 것 같습니다.
상아 조각도 비잔틴 예술의 중요한 영역이었습니다. 황제의 기념 서판인 디프티크(diptych). 영사 취임을 기념하는 이 상아 서판들은 정교한 부조로 가득합니다. 경기장 장면, 황제의 행렬, 신화 이야기들. 이 작은 상아판들이 당대의 삶을 전하는 귀한 기록입니다.
반 룬은 이 공예품들에서 비잔틴 문명의 특성을 봅니다. 크기에 구애받지 않는 완벽함 추구. 거대한 돔과 손바닥만 한 상아판에 같은 정성을 쏟는 장인 정신. 신을 위한 것이라면 어떤 규모든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믿음.


비잔틴의 영향 — 동과 서로 퍼지다

비잔틴 예술은 콘스탄티노플에만 머물지 않았습니다. 제국의 영토를 따라, 그리고 선교사들의 발길을 따라 사방으로 퍼져나갔습니다.
서쪽으로는 이탈리아. 라벤나, 시칠리아, 베네치아가 비잔틴 예술의 서방 거점이었습니다. 베네치아 산 마르코 성당은 비잔틴 건축의 걸작이면서 동시에 이탈리아 르네상스 예술의 요람이 되었습니다. 다음 에피소드에서 살펴볼 러시아로도 비잔틴 예술이 깊이 흘러들었습니다.
동쪽으로는 아르메니아, 조지아, 시리아. 이 지역들은 비잔틴 예술을 받아들이되 자신들의 전통과 결합하여 독자적인 변형을 만들어냈습니다. 아르메니아의 카치카르(khachkar), 즉 십자가 돌은 비잔틴 십자가와 중앙아시아 문양이 결합된 독특한 예술 형식입니다.
반 룬은 이 확산에서 비잔틴 예술의 역설적 생명력을 봅니다. 엄격한 신학적 규범 안에서 만들어진 예술이 오히려 가장 넓게 퍼져나갔습니다. 형식의 통일성이 오히려 다양한 문화들이 자신들의 방식으로 수용하고 변형할 수 있는 공통 언어를 제공했습니다.


1453년 : 제국의 종말, 예술의 부활

1453년 5월 29일, 오스만 제국의 술탄 메흐메트 2세의 군대가 콘스탄티노플을 함락했습니다. 1,000년의 동로마 제국이 끝났습니다.
하기아 소피아는 모스크로 전환되었습니다. 모자이크들은 회칠로 덮였습니다. 기독교의 황금빛 성당이 이슬람의 예배 공간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비잔틴 예술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되기 전부터, 많은 비잔틴 학자와 예술가들이 이탈리아로 피난했습니다. 그들이 가져온 그리스 필사본들, 그들이 전한 고대 그리스 지식들이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불을 더욱 강하게 지폈습니다.
그리고 러시아로 피난한 비잔틴 문화는 러시아 정교회를 통해 오늘날까지 살아 있습니다. 모스크바의 총대주교가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의 계승자임을 자처하고, 러시아가 제3의 로마임을 선포한 것은 비잔틴 제국의 정신적 유산을 이어받겠다는 선언이었습니다.
반 룬은 비잔틴 제국의 종말에서 예술의 불멸성을 봅니다. 제국은 사라졌습니다. 수도는 함락되었습니다. 황금빛 돔은 회칠로 덮였습니다. 그러나 비잔틴 예술이 세상에 심어놓은 씨앗들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이탈리아 르네상스로, 러시아 예술로, 동방 정교회의 이콘 전통으로 계속 살아 숨 쉬었습니다.


반 룬이 비잔틴 예술에서 읽어낸 것

반 룬은 비잔틴 예술 챕터를 마무리하면서 예술과 초월성의 관계에 대한 핵심적인 통찰을 제시합니다.
비잔틴 예술은 인간을 위한 예술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신을 위한 예술이었습니다. 그리스 예술이 인간의 몸을 아름답게 표현하려 했다면, 비잔틴 예술은 인간의 몸을 초월한 신성한 존재를 표현하려 했습니다. 그리스 예술이 이 세상을 향했다면, 비잔틴 예술은 저 세상을 향했습니다.
그 결과 탄생한 것이 황금빛 모자이크의 세계입니다. 현실의 공간이 아닌 영원의 공간. 살과 피가 아닌 빛과 황금. 순간이 아닌 영원.
반 룬은 묻습니다. 이 예술이 오늘날 우리에게도 여전히 말을 건네는가. 종교가 없는 사람에게도, 다른 신앙을 가진 사람에게도.
그의 답은 그렇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비잔틴 예술이 표현하려 한 것, 즉 이 세상 너머의 무언가에 대한 갈망은 종교적 신념에 앞서는 인간의 보편적인 감각이기 때문입니다. 하기아 소피아의 돔 아래 서면 종교가 있든 없든 누구나 같은 것을 느낍니다. 자신이 어떤 더 큰 것의 일부라는 감각. 그 감각을 만들어낸 것이 예술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예술이 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일입니다.


이번 화 감상 추천

비잔틴 예술의 장엄함과 신성한 빛의 세계를 음악으로 경험해 보시기를 권합니다.

    • 아르보 패르트, 《베를린 미사》 : 현대 작곡가가 비잔틴 성가의 정신을 현대 음악으로 되살린 작품. 단순함과 깊이가 공존하는 이 음악은 이콘 앞에서의 명상을 닮았습니다.

    • 러시아 정교회 성가, 《케루빔 찬가》 : 비잔틴 전례 음악에서 직접 발전한 러시아 정교회 합창. 인간의 목소리만으로 하기아 소피아의 황금빛을 재현하려는 듯한 장엄함이 있습니다.


다음 화 예고

다음 시간에는 비잔틴 예술의 빛이 북쪽으로 퍼져나간 곳으로 향합니다. 988년 키예프의 공후 블라디미르가 기독교를 받아들이면서 러시아는 비잔티움의 정신적 후계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러시아인들은 비잔틴 예술을 단순히 모방하지 않았습니다. 혹독한 북방의 자연, 슬라브 민족의 정서, 독자적인 역사 경험이 비잔틴 이콘 전통과 만나 전혀 새로운 예술 세계를 만들어냈습니다. 안드레이 루블료프의 이콘 앞에서 숨을 멈추게 되는 이유를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EP.14  이콘과 돔: 러시아에서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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