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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사회적 권력의 원천

「권력의 지도」 25화, 종교 개혁

by 책으로떠나는여행 2026. 4. 21.

종교 개혁 : 이념 권력의 분열과 전쟁, 루터·칼뱅과 30년 전쟁의 권력 지형


1521년 4월, 보름스 제국의회에서 마르틴 루터가 황제 카를 5세 앞에 섰습니다.

황제, 제후들, 교회 고위 성직자들이 지켜보는 자리였습니다. 루터의 책들이 탁자 위에 쌓여 있었습니다. 질문은 단순했습니다. 이 책들의 내용을 철회하겠는가.

루터는 하루의 시간을 달라고 했습니다. 다음 날 그는 돌아와 답했습니다.

"성경의 증거나 명백한 이성으로 나의 오류가 설득되지 않는 한, 나는 교황이나 공의회의 권위를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양심이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취소할 수도 없고 취소하지도 않겠습니다. 여기 내가 서 있습니다. 달리 할 수 없습니다. 신이여, 나를 도우소서."

이 짧은 선언이 유럽을 둘로 갈랐습니다.

카를 5세는 루터를 이단으로 선고했습니다. 보름스 칙령으로 루터를 제국 밖으로 추방했습니다. 그를 잡는 자에게 보상을 약속했습니다. 그러나 이미 늦었습니다. 루터의 말은 인쇄기를 타고 독일 전역에, 유럽 전역에 퍼져 있었습니다.

황제도, 교황도 더 이상 이 이념의 물결을 막을 수 없었습니다.

마이클 만은 종교 개혁을 단순한 신학 논쟁이나 종교적 사건으로 보지 않습니다. 그것은 이념 권력의 독점이 붕괴하면서 군사·정치·경제 권력이 모두 재편된 역사상 가장 복잡한 권력 변동 중 하나였습니다. 그 변동의 결과가 근대 유럽의 국가 체계, 자본주의 윤리, 개인의 자유, 세속 민주주의의 토대를 만들었습니다.


종교 개혁의 구조적 배경

루터가 95개 논제를 붙인 것이 1517년이었습니다. 그러나 종교 개혁은 루터 한 사람의 천재성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마이클 만은 그것이 오랫동안 쌓인 구조적 모순들의 폭발이었다고 봅니다.

첫째, 교회의 도덕적 위기였습니다.

15세기 말~16세기 초 교회는 심각한 부패에 빠져 있었습니다. 교황 알렉산데르 6세(보르자 가문)는 성직을 공개적으로 매매하고, 사생아들에게 교회 직위를 주었습니다. 율리우스 2세는 갑옷을 입고 전쟁터에서 싸웠습니다. 레오 10세는 사냥과 연회를 즐기며 성 베드로 대성당 건축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면죄부를 대규모로 판매했습니다.

면죄부란 무엇이었을까요. 연옥의 형벌을 면제해준다는 교회의 증서였습니다. 돈을 내면 자신과 죽은 가족의 죄를 사해준다는 것이었습니다. 도미니크회 수도사 테첼이 독일을 돌아다니며 외쳤습니다. "헌금함에 동전이 딸랑 소리를 내면, 연옥에서 영혼이 날아오릅니다."

이것이 루터의 분노를 폭발시켰습니다. 구원이 돈으로 살 수 있는 것인가. 교황이 인간의 영혼을 상품으로 만들고 있는가.

둘째, 지식인 계층의 비판적 성장이었습니다.

르네상스 인문주의가 성경을 비판적으로 읽는 방법을 발전시켰습니다. 에라스무스가 라틴어 불가타 성경의 오류를 지적했습니다. 그리스어 원전과 비교하면 교회가 수백 년간 잘못된 번역에 기반하여 교리를 가르쳤음이 드러났습니다. 이 발견들이 교회의 이념적 권위에 균열을 냈습니다.

셋째, 세속 군주들의 이해관계였습니다.

교회는 유럽 최대의 토지 소유자였습니다. 독일에서만 교회가 전체 토지의 약 3분의 1을 소유했습니다. 교황청에 매년 막대한 세금이 흘러갔습니다. 독일 제후들과 신흥 민족 군주들에게 교황청의 경제적 지배는 참을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종교 개혁은 이들에게 교회 재산을 몰수하고 교황 권위에서 벗어날 수 있는 이념적 명분을 제공했습니다.

마이클 만은 이 세 가지 요인의 결합이 종교 개혁이 단순한 신학 논쟁으로 끝나지 않고 역사를 바꾸는 힘이 된 이유라고 봅니다. 이념적 비판, 지식인의 도전, 세속 권력의 이해관계가 하나로 모였을 때, 그 결합이 교황권의 이념적 독점을 붕괴시켰습니다.


루터의 신학 : 이념 권력의 재구성

루터의 신학적 핵심은 세 가지 라틴어 원칙으로 요약됩니다.

솔라 스크립투라(Sola Scriptura) : 성경만으로.

구원의 유일한 권위는 성경이다. 교황의 결정도, 공의회의 결의도, 교부들의 전통도 성경보다 우위에 있을 수 없다. 인간이 만든 어떤 권위도 신의 말씀에 덧붙여질 수 없다.

이것이 이념 권력에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생각해보겠습니다. 교회의 이념적 독점은 성경의 해석 독점에 기반했습니다. 성경을 해석하는 권한이 교회에 있었기 때문에 교회가 무엇이 진리인가를 결정했습니다. 솔라 스크립투라는 이 독점을 깨뜨렸습니다. 모든 기독교인이 성경을 직접 읽고 해석할 수 있다면, 교회의 독점적 이념 권력은 근거를 잃습니다.

솔라 피데(Sola Fide) : 믿음만으로.

구원은 인간의 행위가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만 얻어진다. 선행, 금식, 고해성사, 순례, 면죄부, 이것들이 구원에 기여하지 않는다. 신이 인간에게 믿음을 선물로 주신다.

이것이 교회의 경제 권력에 직격탄이었습니다. 교회는 성사(聖事)의 독점을 통해 신자들의 경제적 자원을 끌어냈습니다. 고해성사를 받으려면 성직자가 필요했습니다. 면죄부를 사야 했습니다. 미사 비용을 내야 했습니다. 솔라 피데는 이 모든 것이 구원에 불필요하다고 선언했습니다. 교회의 이념적 주장과 경제적 이익이 동시에 흔들렸습니다.

만인 제사장론(Priesthood of All Believers).

모든 기독교인이 동등하게 신 앞에 설 수 있다. 사제와 평신도의 구분은 신학적 근거가 없다. 모든 신자가 사제다. 중개자 없이 신과 직접 소통할 수 있다.

이것이 교회의 정치 권력에 도전하는 것이었습니다. 교회 조직의 위계가 신학적으로 정당화되지 않는다면, 교황이 황제보다 높다는 중세적 이념도 근거를 잃습니다. 이념 권력의 탈제도화였습니다.

마이클 만은 루터의 세 원칙이 각각 교회의 이념 권력, 경제 권력, 정치 권력의 기반을 동시에 공격했다고 봅니다. 이것이 루터의 신학이 단순한 신학 혁신이 아니라 권력 구조의 혁명이었던 이유입니다.


독일 제후들의 선택 : 정치 권력의 개입

루터의 이념이 폭발적으로 퍼질 수 있었던 데는 독일 제후들의 정치적 지지가 결정적이었습니다.

왜 제후들이 루터를 지지했을까요. 신학적 확신 때문이었을까요. 일부는 그랬을 것입니다. 그러나 마이클 만은 더 냉철한 이해관계의 계산이 작동했다고 봅니다.

첫째, 교회 재산 몰수의 기회였습니다. 개신교를 채택한 제후는 자신의 영지 안에 있는 수도원, 교회, 교회 토지를 몰수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엄청난 재정적 이익을 의미했습니다. 실제로 루터교화된 지역에서 교회 재산의 상당 부분이 세속 귀족들에게 넘어갔습니다.

둘째, 교황청의 간섭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중세 내내 교황청이 독일 교회 인사권과 세금에 간섭해왔습니다. 영주 교회(Landeskirche) 체제(각 제후가 자신의 영지 내 교회를 통제하는 체제)는 제후들의 오랜 꿈이었습니다. 루터교가 이것을 신학적으로 정당화해주었습니다.

셋째, 황제 카를 5세에 대한 견제였습니다. 독일 제후들은 강력한 중앙집권화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황제의 권력 강화를 우려했습니다. 교황과의 갈등에 빠진 황제를 약화시키는 것이 제후들의 이해관계에 부합했습니다. 종교 분쟁이 황제의 에너지를 분산시키는 효과가 있었습니다.

1555년 아우크스부르크 화의(Peace of Augsburg)가 이 상황을 제도화했습니다. 핵심 원칙은 "군주의 신앙이 곧 영지의 신앙(Cuius regio, eius religio)"이었습니다. 각 제후가 자신의 영지에서 가톨릭이나 루터교 중 하나를 선택하는 권한을 갖는다는 것이었습니다.

마이클 만은 이 화의의 의미를 이렇게 봅니다. 그것은 이념 권력이 정치 권력에 종속되는 것을 공식화한 것이었습니다. 어떤 신앙이 옳은가가 아니라 어느 군주가 다스리는가에 따라 신앙이 결정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념이 정치의 도구가 되었습니다.


칼뱅과 제네바 : 이념 권력의 재독점 시도

루터가 독일에서 종교 개혁을 시작했다면, 장 칼뱅은 그것을 전혀 다른 방향으로 발전시켰습니다.

프랑스 출신의 법학도였던 칼뱅은 1536년 『기독교 강요(Institutio Christianae Religionis)』를 발표했습니다. 체계적이고 논리적인 이 신학 저작이 칼뱅을 루터 다음의 가장 중요한 종교 개혁자로 만들었습니다.

칼뱅 신학의 핵심은 예정론(predestination)이었습니다. 누가 구원받을지는 신이 이미 결정해놓았습니다. 인간의 행위나 믿음이 구원을 결정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루터의 솔라 피데보다 더 극단적인 주장이었습니다.

이 교리가 역설적인 결과를 낳았습니다. 자신이 구원받은 자인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칼뱅은 세상에서의 성공과 근면한 삶이 구원의 증거(sign)가 된다고 시사했습니다. 노동을 신성한 소명으로 여기고, 절약하고,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이 신의 은총을 받은 자의 표시라는 생각이 퍼졌습니다.

막스 베버는 이것을 자본주의 정신의 기원으로 분석했습니다. 마이클 만도 이 연결을 중요하게 봅니다. 칼뱅주의 이념이 경제 권력의 문화적 기반을 만들었습니다. 부를 추구하는 것이 도덕적으로 정당할 뿐만 아니라 신앙의 증거가 되었습니다. 이 이념이 네덜란드, 영국, 북아메리카의 칼뱅주의 지역에서 자본주의 발전을 이끌었습니다.

1541년 칼뱅이 제네바에서 권력을 잡으면서 그의 이념이 정치 체계로 구현되었습니다.

칼뱅의 제네바는 놀라운 실험이었습니다. 성직자들로 구성된 당회(consistoire)가 시민들의 도덕과 종교 생활을 엄격하게 감시했습니다. 부적절한 노래, 춤, 도박, 성적 문란이 처벌받았습니다. 이단자들이 화형당했습니다. 스페인의 이단자 세르베투스가 제네바에서 화형당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였습니다.

마이클 만은 칼뱅의 제네바를 이념 권력의 재독점 시도로 봅니다. 루터가 교회의 이념 독점을 깨뜨렸다면, 칼뱅은 개신교 이념의 새로운 독점을 만들려 했습니다. 가톨릭 교황의 권위 대신 성경 해석의 권위를, 가톨릭 교회의 도덕 통제 대신 칼뱅주의 당회의 통제를 세우려 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시도의 핵심 모순이 있었습니다. 솔라 스크립투라의 원칙 (성경이 유일한 권위다)을 인정하면, 성경을 해석하는 권한을 누군가 독점할 수 없었습니다. 루터는 성경 해석의 개방성을 선언했지만, 그 개방성이 필연적으로 무한한 분열을 낳았습니다. 루터교, 칼뱅교, 츠빙글리교, 재세례파, 성공회, 개신교는 출발부터 분열의 씨앗을 품고 있었습니다.


영국의 종교 개혁 : 정치 권력이 이끈 이념 변화

영국의 종교 개혁은 독일, 스위스와 전혀 다른 패턴을 보였습니다. 그것은 신학적 확신이 아니라 정치 권력의 필요에서 시작되었습니다.

헨리 8세는 교황이 아니라 자신이 영국 교회의 수장이 되기를 원했습니다. 이유는 간단했습니다. 왕비 캐서린과의 이혼을 원했는데, 교황 클레멘스 7세가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클레멘스 7세는 캐서린의 조카인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의 압력을 받고 있었습니다.

헨리 8세는 해결책을 찾았습니다. 교황의 권위를 아예 부정하면 됩니다. 1534년 수장령(Act of Supremacy)으로 자신을 영국 교회(성공회)의 최고 수장으로 선언했습니다.

영국 종교 개혁의 신학적 내용은 처음에 매우 모호했습니다. 헨리 8세는 교황의 권위는 거부했지만 가톨릭 교리 대부분은 유지했습니다. 수도원을 해산하고 재산을 몰수했습니다. 귀족들과 젠트리 계층에게 수도원 토지를 팔았습니다. 이것이 영국 지주 계층의 구성을 바꾸고 나중에 의회 민주주의의 사회적 기반이 되었습니다.

마이클 만은 영국 종교 개혁을 정치 권력이 이념 권력을 재편한 사례로 봅니다. 독일에서 이념이 정치를 이끌었다면, 영국에서는 정치가 이념을 이끌었습니다. 왕의 필요가 신학을 결정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영국 특유의 실용적·타협적 종교 문화가 형성되었습니다. 교리보다 제도를, 신학보다 실천을 중시하는 성공회의 성격이 이렇게 만들어졌습니다.


가톨릭의 반종교 개혁 : 이념 권력의 재정비

종교 개혁에 대응하여 가톨릭 교회도 스스로를 혁신했습니다. 이것을 반종교 개혁(Counter-Reformation)이라고 합니다.

1545년부터 1563년까지 열린 트리엔트 공의회가 중심이었습니다. 이 공의회는 교회의 교리를 명확하게 재정비하고, 개신교의 비판에 대응했습니다. 성직자 교육을 강화했습니다. 부패를 개혁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개신교의 핵심 주장들(솔라 스크립투라, 솔라 피데)을 명시적으로 거부했습니다. 전통과 교회의 권위도 성경과 동등한 권위를 가진다고 재확인했습니다.

반종교 개혁의 또 다른 중요한 요소는 예수회(Society of Jesus)였습니다. 이냐시오 데 로욜라가 1540년 설립한 예수회는 반종교 개혁의 첨병이었습니다. 엄격한 교육, 탁월한 지적 훈련, 교황에 대한 절대 복종, 이것들이 예수회의 특징이었습니다.

예수회는 두 가지 전략을 구사했습니다.

첫째, 교육을 통한 이념 권력의 재건이었습니다. 예수회가 유럽 전역에 학교를 세웠습니다. 최고 수준의 교육을 제공하면서 가톨릭 이념을 심었습니다. 귀족과 부르주아 자제들을 예수회 학교에서 교육함으로써 다음 세대 지도층의 이념적 방향을 결정하려 했습니다.

둘째, 선교를 통한 이념 권력의 확장이었습니다. 유럽에서 개신교에 잃은 것을 아시아, 아메리카, 아프리카에서 얻으려 했습니다. 프란시스코 하비에르가 인도와 일본에서, 마테오 리치가 중국에서 선교했습니다. 유럽 내에서의 이념 권력 손실을 세계적 팽창으로 보완하려 한 것이었습니다.

마이클 만은 반종교 개혁을 이념 권력의 재조직화로 봅니다. 교회는 단순히 방어적으로 반응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내부를 개혁하고, 새로운 조직을 만들고, 새로운 전략을 채택했습니다. 이념 권력이 도전에 직면했을 때 스스로를 혁신하는 능력을 보여준 것이었습니다.


종교 전쟁들 : 이념이 군사 권력과 만날 때

종교 개혁이 군사 충돌로 이어지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독일 농민 전쟁(1524~1525년)이 먼저였습니다.

루터의 자유의 이념이 독일 농민들에게 영감을 주었습니다. 만인의 평등, 성경에 기반한 정의, 이것들이 봉건적 착취에 시달리던 농민들에게 저항의 이념적 근거가 되었습니다. 토마스 뮌처가 이끄는 농민군이 독일 전역에서 봉기했습니다. 귀족의 성들이 불탔습니다.

그런데 루터의 반응이 충격적이었습니다. 그는 농민 봉기를 강력하게 비난했습니다. 「살인하고 약탈하는 농민들에 대하여」라는 글에서 제후들에게 농민들을 "때리고 죽이고 찌르라"고 촉구했습니다. 제후들이 가혹하게 진압했습니다. 약 10만 명의 농민이 죽었습니다.

마이클 만은 루터의 이 선택을 이념 권력과 정치 권력의 타협으로 봅니다. 루터의 종교 개혁은 제후들의 정치적 지지 없이는 불가능했습니다. 제후들의 지지를 유지하기 위해 루터는 사회 혁명을 거부해야 했습니다. 이념의 해방적 잠재력이 정치적 현실 앞에서 제한된 것이었습니다. 루터는 영적 자유를 설파했지만 사회적 자유는 부정했습니다.

프랑스 종교 전쟁(1562~1598년)이 이어졌습니다.

칼뱅주의(위그노파)가 프랑스에 깊이 뿌리를 내리면서 가톨릭 왕권과 충돌했습니다. 40년간 단속적으로 이어진 내전이었습니다. 1572년 8월 성 바르톨로메오의 날 학살이 가장 끔찍한 사건이었습니다. 왕실의 명령으로 파리에서 수천 명의 위그노가 이틀 만에 학살당했습니다. 이후 지방으로 퍼진 학살에서 수만 명이 죽었습니다.

1598년 앙리 4세의 낭트 칙령으로 전쟁이 끝났습니다. 위그노에게 예배의 자유와 요새 도시들의 자치권을 허용하는 타협이었습니다. 이것은 한 국가 안에서 두 개의 종교가 공존하는 전례 없는 실험이었습니다.

마이클 만은 낭트 칙령에서 중요한 이념적 혁신을 읽어냅니다. 완전한 종교적 통일이 불가능할 때, 공존과 관용이 현실적 대안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나중에 종교적 관용이라는 근대적 이념으로 발전합니다. 존 로크의 관용론, 근대 자유주의의 핵심 원리가 이 쓰라린 경험에서 싹텄습니다.


30년 전쟁 : 이념 전쟁의 극한과 종료

종교 전쟁의 정점이 30년 전쟁(1618~1648년)이었습니다.

1618년 보헤미아(지금의 체코)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개신교 귀족들이 가톨릭 황제의 대리인들을 프라하 성의 창문 밖으로 던진 것이 불씨였습니다. 이것을 프라하 창문 투척 사건이라고 합니다.

처음에는 보헤미아의 종교·정치 갈등이었습니다. 그러나 빠르게 유럽 전체를 끌어들였습니다. 덴마크, 스웨덴, 프랑스, 스페인, 네덜란드, 모든 강대국이 개입했습니다.

그런데 전쟁이 진행되면서 이상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전쟁이 점점 종교적 성격을 잃어갔습니다. 프랑스는 가톨릭 국가였지만 개신교 스웨덴을 지원했습니다. 왜였을까요. 합스부르크 왕조(신성 로마 제국)를 약화시키는 것이 프랑스의 정치적 이익이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마이클 만이 30년 전쟁에서 읽는 핵심 전환이었습니다. 이념 전쟁이 국가 이익의 전쟁으로 변했습니다. 가톨릭 대 개신교의 신앙 전쟁이 합스부르크 대 반합스부르크의 세력 균형 전쟁으로 변했습니다.

30년 전쟁의 결과는 참혹했습니다. 독일 인구의 약 3분의 1이 사라졌습니다. 일부 지역은 인구의 절반 이상이 죽었습니다. 도시들이 초토화되었습니다. 경제가 황폐화되었습니다.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전쟁이 끝났습니다.

이 조약의 의미는 18화에서 이미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나 종교 개혁의 맥락에서 한 가지 더 주목할 점이 있습니다. 베스트팔렌 조약은 실질적으로 이렇게 선언했습니다. 어떤 종교도 다른 종교를 강제로 제거할 수 없다. 국가 주권이 종교적 통일보다 우선한다. 종교는 국가 간의 전쟁 원인이 되어서는 안 된다.

이것이 이념 권력의 정치적 중립화였습니다. 종교가 국가 간 관계를 규정하는 원리에서 물러난 것이었습니다. 정치가 이념에서 독립하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세속 근대 국가 체계의 출발점이었습니다.


종교 개혁과 자본주의 : 이념이 경제를 만들다

막스 베버가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1905년)』에서 제시한 테제는 지금도 논쟁적입니다. 그러나 마이클 만은 그 핵심 통찰이 여전히 유효하다고 봅니다.

베버의 주장은 이렇습니다. 칼뱅주의의 예정론이 특유의 심리적 긴장을 만들었습니다. 자신이 구원받은 자인지 알 수 없는 불안이, 세상에서 성공함으로써 구원의 증거를 찾으려는 강박을 낳았습니다. 이것이 금욕적 노동, 합리적 이익 추구, 이윤의 재투자로 이어졌습니다. 이것이 자본주의의 핵심 정신과 일치했습니다.

마이클 만은 베버의 이 테제를 IEMP 분석으로 보완합니다.

이념 권력의 측면에서 칼뱅주의가 노동을 신성한 소명으로 재정의했습니다. 이 이념의 전환이 경제 행위의 도덕적 의미를 바꾸었습니다. 이윤 추구가 탐욕이 아니라 신앙의 표현이 될 수 있었습니다.

경제 권력의 측면에서 칼뱅주의 공동체들(네덜란드, 영국 청교도, 스코틀랜드 장로교)은 실제로 상업과 금융에서 탁월했습니다. 암스테르담이 17세기 세계 금융의 중심이 된 것, 영국이 산업 혁명을 이끈 것, 미국 청교도 정착민들의 경제적 성공 — 이것들이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정치 권력의 측면에서 칼뱅주의는 교회와 국가의 관계를 독특하게 설정했습니다. 교회가 국가를 지배하는 것도, 국가가 교회를 지배하는 것도 아닌 긴장된 균형이었습니다. 이 긴장이 어느 권력도 다른 권력을 완전히 삼키지 못하게 하는 다원주의적 구조를 만들었습니다.

마이클 만은 여기서 이념 권력과 경제 권력의 상호 강화를 읽어냅니다. 칼뱅주의 이념이 자본주의적 경제 행위를 촉진했고, 자본주의적 성공이 다시 칼뱅주의의 이념적 정당성을 강화했습니다. 이 순환이 서유럽과 북아메리카에서 근대 자본주의를 발전시키는 이념적 엔진이 되었습니다.


종교 개혁이 만든 관용의 이념

종교 전쟁의 참혹한 결과가 역설적으로 종교적 관용이라는 새로운 이념을 낳았습니다.

수십 년간의 전쟁을 겪으면서 사람들이 깨달았습니다. 신앙의 통일은 강제로 이룰 수 없다. 이단자를 불태워도 이단이 사라지지 않는다. 전쟁으로 상대를 개종시킬 수 없다. 그렇다면 공존이 유일한 현실적 대안이다.

세바스티앙 카스텔리옹이 칼뱅에게 이단자 화형에 반대하며 썼습니다. "이단을 죽이는 것은 사람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생각을 죽이는 것이다." 미셸 드 몽테뉴가 에세이에서 물었습니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이 정말로 옳은가?" 회의주의적 물음이 관용의 이념적 기반이 되었습니다.

피에르 베일이 1686년 『관용에 관한 철학적 논평』에서 논증했습니다. 내가 양심에 따라 행동하는 한, 그것이 설령 잘못된 것이라도 신은 그것을 처벌하지 않는다. 따라서 타인의 양심을 강제로 바꾸려는 것은 신의 뜻에 반한다. 이것이 존 로크의 관용론으로 이어졌습니다. 로크의 관용론이 미국 수정헌법 제1조의 종교 자유 조항으로 이어졌습니다.

마이클 만은 이 사상의 계보를 이념 권력의 분열이 역설적으로 이념적 다원주의를 낳는 과정으로 봅니다. 어느 한 이념이 독점을 주장할 수 없게 되었을 때, 다양한 이념들이 공존하는 것을 인정하는 관용의 이념이 등장했습니다. 관용은 아름다운 이상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이념 권력의 지속적 분열이 만들어낸 현실적 필요에서 나왔습니다.


종교 개혁이 만든 근대성의 역설

마이클 만은 종교 개혁이 만든 세계를 역설로 가득 찬 것으로 봅니다.

개인의 자유를 선언했지만 새로운 권위주의를 낳았습니다. 솔라 스크립투라가 교황의 권위를 거부했지만, 칼뱅의 제네바는 어떤 중세 도시보다 더 엄격한 도덕 통제를 실시했습니다. 개인의 양심을 강조한 이념이 집단적 통제의 도구가 되었습니다.

종교적 자유를 위해 싸웠지만 종교 전쟁을 낳았습니다. 신앙의 자유를 주장하면서 상대방의 신앙을 강제로 바꾸려 했습니다. 자유의 이념이 강제의 실천과 공존했습니다.

교회 권력을 약화시켰지만 국가 권력을 강화했습니다. 교황의 권위를 거부한 자리를 세속 군주의 권위가 채웠습니다. 아우크스부르크 화의의 "군주의 신앙이 영지의 신앙"이라는 원칙은 교회보다 더 강력한 국가 통제를 가능하게 했습니다. 종교 개혁이 의도치 않게 절대 왕정의 이념적 기반을 만들었습니다.

이성을 해방시켰지만 새로운 광신을 낳았습니다. 성경을 자유롭게 읽을 권리가 무한한 해석과 분열을 낳았습니다. 각자 자신의 해석이 진리라고 확신하는 사람들이 상대방을 악마로 규정했습니다. 이성의 해방이 새로운 형태의 이념적 확실성을 만들어냈습니다.

이 역설들이 종교 개혁을 단순화할 수 없는 이유입니다. 그것은 해방이면서 동시에 억압이었고, 자유이면서 동시에 전쟁이었으며, 근대의 시작이면서 동시에 중세적 사고의 지속이었습니다.


보름스에서 베스트팔렌까지 : 이념 권력의 재편 완성

1521년 루터가 보름스에서 "여기 내가 서 있습니다"라고 선언했을 때, 그는 이념 권력의 독점에 도전했습니다. 교황도 황제도 자신의 양심을 굴복시킬 수 없다고 했습니다.

1648년 베스트팔렌에서 유럽의 군주들이 평화 조약에 서명했을 때, 그 도전이 최종적으로 제도화되었습니다. 이념 권력의 독점은 끝났습니다. 다양한 신앙이 공존하는 세계가 현실이 되었습니다.

이 127년 사이에 유럽은 근본적으로 변했습니다. 이념 권력의 독점 구조가 경쟁 구조로 바뀌었습니다. 종교적 권위가 세속적 권위로부터 분리되기 시작했습니다. 개인의 양심이 공동체의 신앙보다 우선한다는 원칙이 서서히 확립되었습니다. 이것들이 모두 근대성의 핵심 특징들입니다.

마이클 만은 종교 개혁을 이렇게 평가합니다. 그것은 어떤 인물의 의지나 어떤 사상의 힘만으로 일어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교회의 도덕적 위기, 인쇄술의 발명, 제후들의 정치적 이해관계, 상업 자본주의의 성장, 이 모든 요인들이 결합했을 때 종교 개혁이 가능했습니다.

그리고 종교 개혁의 결과도 어느 한 방향으로 단순하지 않았습니다. 루터가 원한 것, 칼뱅이 원한 것, 헨리 8세가 원한 것이 모두 달랐고, 그 결과는 이들 중 누구도 의도하지 않은 방향으로 흘렀습니다.

역사는 의도의 합산이 아닙니다. 다양한 권력들이 충돌하고 결합하면서 만들어내는 예측 불가능한 결과입니다. 종교 개혁이 그것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줍니다.

루터는 교회를 개혁하려 했습니다. 그 결과 유럽은 수백 년간 전쟁을 치렀습니다. 그러나 그 전쟁의 끝에서 근대적 관용과 자유의 이념이 탄생했습니다. 가장 파괴적인 이념 전쟁이 역설적으로 이념 전쟁을 종식시키는 이념을 만들어냈습니다.

이것이 권력의 아이러니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역사의 아이러니입니다.


다음 화 예고 26화,대항해 시대 : 경제·군사 권력의 세계화, 유럽이 세계를 지배하기 시작한 메커니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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