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화를 시작하기 전에 멈춥니다.
홀로코스트. 유대인 600만 명. 롬, 장애인, 동성애자, 슬라브인 수백만 명.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20만 명 이상.
숫자가 있습니다. 그러나 숫자가 이것을 담을 수 없습니다.
1944년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은 프리모 레비가 나중에 썼습니다. "인간이 인간에게 이것을 할 수 있다면 — 그리고 이것이 일어났다 —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인가."
1945년 히로시마에서 살아남은 의사 미치히코 하치야가 일기에 썼습니다. "이것이 전쟁인가. 아니면 새로운 종류의 무엇인가."
두 사람이 같은 것을 묻고 있었습니다. 인간 문명이 어디까지 갈 수 있는가.
마이클 만은 이 두 사건을 산업화된 폭력의 두 얼굴로 봅니다. 하나는 이념 권력이 주도한 체계적 학살. 다른 하나는 군사 권력이 기술 권력과 결합하여 만들어낸 순간적 파괴. 형태가 달랐습니다. 그러나 모두 산업 문명이 만들어낸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모두 인류의 자기 이해를 근본적으로 바꾸었습니다.
1장. 공통된 뿌리 : 산업 문명이 가능하게 한 것
홀로코스트와 히로시마. 얼핏 매우 달라 보입니다.
하나는 수년에 걸친 체계적 학살. 다른 하나는 단 한 순간의 파괴.
하나는 이념적 증오에서 나왔습니다. 다른 하나는 전쟁을 끝내기 위한 전략적 결정에서 나왔습니다.
하나는 가스실과 소각로라는 산업 기반 시설을 사용했습니다. 다른 하나는 핵물리학의 최신 성과를 사용했습니다.
그러나 두 사건의 공통 뿌리가 있습니다.
산업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조직 능력과 기술 능력이었습니다.
아우슈비츠가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철도망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습니다. 화학 공업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습니다. 관료제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습니다. 현대 국가의 인구 관리 능력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습니다.
히로시마가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20세기 물리학의 집적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습니다. 미국의 산업적 조직 능력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습니다. 항공 기술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습니다.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이 홀로코스트에 대해 썼습니다. 『현대성과 홀로코스트』에서. 홀로코스트가 근대성의 일탈이 아니라 근대성의 산물이라고. 효율성, 합리화, 관료제, 이것들이 근대성의 미덕으로 칭송받습니다. 그 미덕들이 학살에 동원되었습니다.
마이클 만은 이 분석을 확장합니다. 현대 산업 기술이 생산의 능력과 동시에 파괴의 능력을 만들었습니다. 동일한 조직적·기술적 능력이 어느 방향으로 사용되느냐가 문제였습니다. 이념이 그 방향을 결정했습니다.

2장. 홀로코스트의 구조 : 이념이 조직을 움직이다
58화에서 홀로코스트를 이미 상세히 살펴보았습니다. 여기서는 이념 권력과 산업화의 결합에 집중합니다.
유대인이 왜 표적이 되었을까요.
반유대주의가 수백 년의 역사를 가졌습니다. 그러나 나치의 반유대주의가 기존 것과 달랐습니다.
기독교 반유대주의가 종교적이었습니다. 유대인이 그리스도를 죽였다. 개종하면 용납할 수 있었습니다.
나치의 반유대주의가 인종적이었습니다. 개종이 의미가 없었습니다. 피가 문제였습니다. 아리아 인종을 오염시키는 존재. 독일 민족 유기체의 세균.
이 이념이 논리적 귀결을 만들었습니다. 세균을 제거해야 합니다. 격리가 아니라 근절.
어떻게 학살이 조직되었을까요.
이것이 가장 충격적인 부분입니다.
아이히만이 열차 시간표를 작성했습니다. 유럽 전역에서 유대인들을 폴란드 학살 캠프로 이송하는 일정. 관료적 효율성으로.
캠프 건축가들이 가스실을 설계했습니다. 최대 처리량을 위해. 공학적 관점에서.
화학자들이 치클론B를 공급했습니다. IG 파르벤의 자회사가 생산했습니다.
크루프 같은 기업들이 강제 노동자들을 사용했습니다. 수익을 위해.
각각의 행위자들이 자신의 직무를 수행했습니다. 전체 그림을 보지 않으면서. 또는 보려 하지 않으면서.
마이클 만은 홀로코스트를 이념 권력이 방향을 제시하고 경제 권력과 정치 권력과 군사 권력이 분업적으로 실행한 역사상 가장 체계적인 학살로 봅니다.

3장. 히로시마의 결정 : 어떻게 이 결정이 내려졌나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투하되었습니다.
이 결정이 어떻게 내려졌을까요.
맨해튼 프로젝트의 배경이었습니다. 1939년 아인슈타인이 루스벨트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독일이 핵폭탄을 만들 수 있다는 경고. 연합국이 먼저 만들어야 한다는.
1942년 맨해튼 프로젝트가 시작되었습니다. 2년 만에 핵폭탄을 만들었습니다. 나치 독일에서 탈출한 과학자들 — 페르미, 실라드, 텔러 — 이 핵심 역할을 했습니다.
역설이 있었습니다. 히틀러를 피해 도망친 사람들이 히틀러를 막기 위한 무기를 만들었습니다.
독일이 먼저 항복했습니다. 1945년 5월 8일. 원자폭탄이 완성되기 전에. 원자폭탄의 원래 목적이 사라졌습니다.
그러나 프로젝트가 계속되었습니다. 이제 목표가 일본이었습니다.
트루먼의 결정이었습니다. 루스벨트가 4월에 사망했습니다. 트루먼이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그가 원자폭탄 프로젝트를 처음 알았습니다.
전략 폭격 위원회가 일본 본토 상륙 시 사상자 추정을 보고했습니다. 미군 50만~100만 명. 일본 민간인 수백만 명.
원자폭탄이 이 비용을 피할 수 있다는 논리였습니다.
대안들이 있었을까요. 역사가들이 논쟁합니다.
일본이 이미 항복 의사를 타진하고 있었다는 주장. 소련 참전만으로 충분했다는 주장. 사전 시연을 했어야 한다는 주장. 민간인 밀집 지역이 아닌 군사 목표를 선택해야 했다는 주장.
트루먼이 이 대안들을 충분히 고려했는지는 논쟁입니다.
마이클 만은 히로시마 결정을 군사 권력의 논리가 이념 권력(전쟁 종결)의 명분과 결합하여 도덕적 경계를 넘어간 사례로 봅니다. 히로시마가 군사 목표가 아니었습니다. 민간인 도시였습니다. 전쟁 종결을 위해 민간인 도시를 표적으로 선택했습니다.
4장. 히로시마의 순간 : 8시 15분
1945년 8월 6일 오전 8시 15분.
히로시마. 인구 약 35만 명. 도시.
에놀라 게이가 고도 약 9,500미터에서 리틀 보이를 투하했습니다.
43초.
폭발이 지상 약 600미터에서 일어났습니다. 섭씨 수천 도의 열. 강력한 폭풍파. 방사선.
폭발 중심지(히포센터) 반경 1.2킬로미터 안의 모든 것이 즉각 파괴되었습니다.
생존자들이 기억한 것이 있었습니다.
미치히코 하치야 의사가 썼습니다. "갑자기 섬광이 보였다. 폭발이 없었다. 그냥 빛이 있었다. 그리고 나서 나는 날아가 있었다."
한 생존자가 말했습니다. "피부가 너무 뜨거워서 늘어졌습니다. 손가락 끝에서. 벗겨지는 것처럼."
어린이들이 도시를 걸어다녔습니다. 팔을 들어올리고. 화상 입은 피부가 매달려 흘러내리지 않도록.
히바쿠샤(被爆者), 폭탄 피폭 생존자들이었습니다. 살아남았지만 평생 방사선 후유증을 안고 살았습니다. 백혈병. 암. 차별.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폭탄 생존자라는 것을 숨겼습니다. 사회적 낙인 때문이었습니다.
즉각 사망자가 약 8만~14만 명이었습니다. 그 해 말까지 약 14만 명. 이후 수십 년간 방사선 관련 사망자가 추가되었습니다.
마이클 만은 히로시마를 군사 권력이 비군사 인구 전체를 표적으로 삼는 단계에 도달했을 때 발생하는 것으로 봅니다. 민간인과 군사 목표의 구분이 총력전의 논리에서 사라졌습니다.

5장. 두 사건의 도덕적 지위 : 같은가 다른가
홀로코스트와 히로시마를 나란히 놓을 때 중요한 질문이 생깁니다.
이 두 사건이 도덕적으로 같은가요.
이것이 민감한 질문입니다. 그리고 중요한 질문입니다.
차이가 있습니다.
목적이 달랐습니다. 홀로코스트가 유대인 말살이라는 이념적 목표를 가졌습니다. 히로시마가 전쟁을 끝내기 위한 전략적 결정이었습니다.
대상이 달랐습니다. 홀로코스트가 특정 집단을 존재 자체 때문에 표적으로 삼았습니다. 히로시마가 적국의 도시 전체를 표적으로 삼았습니다.
그러나 공통점도 있습니다.
민간인이 대규모로 사망했습니다. 피해자들이 선택하지 않은 것 때문에 죽었습니다. 유대인이라는 것. 히로시마에 살고 있다는 것.
산업 기술이 이것을 가능하게 했습니다.
논쟁이 계속됩니다. 히로시마가 전쟁 범죄인가. 불가피한 전략적 선택인가.
일본에서 히로시마가 피해의 기억으로 존재합니다. 가해의 기억 — 난징, 위안부 — 이 충분히 인정되지 않으면서.
미국에서 히로시마가 전쟁을 끝낸 불가피한 선택으로 기억됩니다. 민간인 대량 학살로 충분히 인정되지 않으면서.
마이클 만은 이 논쟁을 이념 권력이 사건의 기억과 해석을 어떻게 구성하는가의 문제로 봅니다. 각 나라가 자신에게 유리한 방식으로 역사를 기억합니다. 그 기억이 현재의 정체성과 정책에 영향을 미칩니다.

6장. 살아남은 사람들 : 증언의 의무
홀로코스트와 히로시마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이 남긴 것이 있습니다.
홀로코스트 생존자들이었습니다.
엘리 비젤이 **『밤(Night)』**을 썼습니다. 자신이 경험한 것을 기록했습니다. 그리고 말했습니다. "망각에 대항하는 것이 기억의 의무다. 잊는 것은 새로운 학살을 허용하는 것이다."
프리모 레비가 화학자로서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은 것을 기록했습니다. 그의 마지막 질문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일어났다. 따라서 그것은 다시 일어날 수 있다."
임레 케르테스가 헝가리 유대인 소년이 수용소에서 경험하는 것을 소설로 썼습니다. 2002년 노벨 문학상을 받았습니다. 시상 연설에서 말했습니다. "살아남은 자들은 죽은 자들을 위해 말해야 한다. 왜냐하면 죽은 자들은 말할 수 없으니까."
히로시마 생존자들, 히바쿠샤였습니다.
사사키 사다코. 히로시마 폭발 당시 두 살이었습니다. 10년 후 방사선 관련 백혈병에 걸렸습니다. 병원에서 종이 학을 접었습니다. 천 마리를 접으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전설을 따라. 644마리를 접고 열두 살에 사망했습니다. 히로시마 평화 기념관의 소녀상이 그를 기념합니다.
히로시마 의사 하치야가 일기를 썼습니다. 폭발 직후부터 의사로서 생존자들을 치료하면서. 의학적 관찰과 인간적 고통이 함께 기록된.
마이클 만은 증언을 이념 권력이 파괴할 수 없는 인간성의 표현으로 봅니다. 홀로코스트와 히로시마가 인간을 숫자로, 문제로, 표적으로 만들었습니다. 생존자들의 증언이 그 숫자들을 다시 사람으로 만들었습니다. 각각의 이름과 얼굴과 삶으로.
7장. 국제법의 응답 : 문명이 스스로를 규율하다
홀로코스트와 히로시마가 국제 법질서를 근본적으로 바꾸었습니다.
뉘른베르크 원칙이었습니다. 뉘른베르크 재판(1945~46년)이 새로운 법 원칙들을 확립했습니다.
인도에 대한 범죄(Crimes against humanity). 특정 집단에 대한 체계적 박해와 학살. 이것이 처음으로 국제법으로 처벌할 수 있는 범죄로 규정되었습니다.
집단 학살(Genocide). 렘킨이 이 개념을 만들었습니다. 라파엘 렘킨. 폴란드계 유대인 법학자. 홀로코스트에서 가족의 대부분을 잃었습니다. 집단 학살을 막을 국제법을 만들기 위해 헌신했습니다.
1948년 집단 학살 방지 협약이 채택되었습니다. 특정 국가, 민족, 인종, 종교 집단을 전체 또는 부분적으로 파괴할 의도를 가진 행위를 국제법으로 금지했습니다.
핵 비확산 체계였습니다. 히로시마가 핵 시대를 열었습니다. 소련이 1949년 핵 실험에 성공했습니다. 핵 경쟁이 시작되었습니다.
이것을 통제하려는 국제 체계가 형성되었습니다. 부분 핵실험 금지 조약(1963년). 핵 비확산 조약(NPT, 1968년). 이것들이 핵 사용을 완전히 막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일정한 규범을 만들었습니다.
세계 인권 선언(1948년)이었습니다. 홀로코스트의 충격이 인권의 보편적 기준 필요성을 만들었습니다. 국가가 자국민에게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이 국적과 무관하게 기본 권리를 가진다는 원칙.
마이클 만은 이 국제법 발전을 이념 권력이 인류의 자기 파괴 능력에 맞서는 방향으로 재구성된 과정으로 봅니다. 홀로코스트와 히로시마가 인류에게 자신의 파괴 능력을 보여주었습니다. 그 충격에서 자기 규율의 시도가 나왔습니다.
완전하지 않았습니다. 집단 학살이 이후에도 일어났습니다. 핵 위협이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방향이 바뀌었습니다.

8장. 마이클 만의 분석 : 권력의 극한이 보여준 것
마이클 만이 홀로코스트와 히로시마에서 읽어내는 핵심 분석들이 있습니다.
현대성 자체가 문제였습니다.
바우만의 분석을 마이클 만이 확장합니다.
계몽주의가 이성, 효율성, 관료화를 가져왔습니다. 이것들이 진보의 도구로 칭송받았습니다. 그런데 이 도구들이 학살과 원자 폭격에도 동원되었습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이 있습니다. 기술과 조직 능력이 도덕적으로 중립적이지 않습니다. 그 능력을 어느 방향으로 사용하느냐가 모든 것을 결정합니다.
이념 권력이 방향을 결정했습니다.
나치즘의 인종 이념이 산업 기술을 학살에 동원했습니다. 반파시즘 전쟁 이념이 핵물리학을 원자 폭격에 동원했습니다. 다른 이념이었습니다. 그러나 둘 다 산업 문명의 능력을 극단적 폭력에 사용했습니다.
이것이 이념의 책임입니다. 이념이 기술에 방향을 줍니다. 기술이 이념의 지시에 따릅니다. 따라서 이념의 내용이 결정적입니다.
구조가 개인의 도덕적 판단을 압도했습니다.
아이히만이 유대인을 증오했을 수도 있습니다. 또는 단순히 관료로서 직무를 수행했을 수도 있습니다. 에놀라 게이 승무원들이 히로시마 민간인들을 증오하지 않았습니다. 명령을 수행했습니다.
구조 — 관료제, 군 명령 체계, 법적 틀, 가 개인이 자신의 행동의 결과를 보지 못하게 했습니다.
이것이 교훈입니다. 구조 안에 있을 때 그 구조가 만드는 결과를 보는 것이 어렵습니다. 그러나 필요합니다.
억지의 논리가 역설적으로 평화를 만들었습니다.
히로시마 이후 핵무기를 가진 강대국들이 서로 직접 싸우지 않았습니다. 핵 억지 때문이었습니다. 쓰면 모두 죽는 무기. 쓸 수 없는 무기가 평화를 만들었습니다.
이것이 역설입니다. 가장 파괴적인 무기가 가장 큰 억지 효과를 가집니다. 마이클 만은 이 역설이 불안정하다고 봅니다. 억지가 영구적일 수 없습니다. 핵 확산이 억지 논리를 복잡하게 만듭니다.
마이클 만의 결론이 있습니다.
홀로코스트와 히로시마가 인류에게 물었습니다. 당신들이 이것을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당신들은 무엇인가.
답이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마이클 만은 이 물음이 포기되어서는 안 된다고 봅니다. 계속 물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 물음이 경계심을 만들기 때문입니다. 이런 일이 다시 가능한 조건이 만들어질 때 그것을 인식하는 능력을.

예루살렘 야드 바솀 기념관 입구에 글귀가 있습니다.
히로시마 평화 기념관 비석에 글귀가 있습니다.
"편히 잠드소서. 과오는 반복하지 않겠습니다."
주어가 없습니다. 일본어 원문에서 의도적으로.
누가 과오를 반복하지 않겠다는 것인가요. 일본인인가, 인류인가, 미국인인가.
이 주어의 부재가 히로시마 기억의 복잡성을 담고 있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보편적 약속이 되게 합니다.
마이클 만이 이 두 사건을 통해 마지막으로 말하는 것이 있습니다.
과오를 반복하지 않으려면 그 과오가 어떻게 일어났는지를 이해해야 합니다. 이해 없는 약속은 공허합니다. 이해가 있어야 반복을 알아볼 수 있습니다.
홀로코스트가 이념이 기술을 극단의 방향으로 이끌 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보여주었습니다.
히로시마가 전쟁의 논리가 자체 극한에 도달할 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보여주었습니다.
이것들이 일어났습니다. 따라서 다시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억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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