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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사회적 권력의 원천

「권력의 지도」 59화, 일본 군국주의 : 아시아의 파시즘

by 책으로떠나는여행 2026. 6. 11.

1937년 12월 13일, 난징.
일본군이 중국의 수도 난징에 입성했습니다.
그 후 6주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두고 역사가들이 논쟁합니다. 숫자에서. 규모에서. 그러나 기본 사실은 분명합니다.
민간인 학살이 있었습니다. 강간이 있었습니다. 약탈이 있었습니다. 도시 전체가 공포에 잠겼습니다.
독일 나치 당원이었던 존 라베가 난징에 있었습니다. 지멘스 직원이었습니다. 그가 일기에 썼습니다. "사방에서 비명이 들린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는 차마 글로 쓸 수 없다."
나치 당원이 차마 쓸 수 없다고 한 것이었습니다.
일본 군국주의. 이것이 유럽 파시즘과 어떻게 같고 어떻게 다른가.
마이클 만은 일본 군국주의를 단순히 유럽 파시즘의 아시아 복사본으로 보지 않습니다. 그것이 일본의 특수한 역사적·사회적 조건에서 나온 독자적 권위주의 군국주의였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유럽 파시즘과 구조적 유사성을 공유했습니다. 천황제, 군부, 재벌이 만들어낸 권력 동맹이 그 핵심이었습니다.


1장. 일본의 근대화 : 메이지 혁명의 유산


일본 군국주의를 이해하려면 메이지 시대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1853년 페리 제독의 흑선(Black Ships)이 에도 만에 나타났습니다. 미국 해군이 일본에 개항을 강요했습니다.
이것이 일본을 충격에 빠뜨렸습니다. 외부 세계의 힘 앞에 무력했습니다. 이 충격이 1868년 메이지 유신을 이끌었습니다.
메이지 유신의 핵심 과제였습니다. 서양을 배워서 서양을 이겨야 한다. 부국강병. 서양 기술, 서양 제도, 서양 과학을 흡수하되 일본의 정신과 정체성은 지킨다. 화혼양재(和魂洋才).
이 모순이 일본 근대의 핵심 긴장이었습니다. 서양화와 일본 고유성 사이의.
천황제 강화였습니다. 메이지 헌법(1889년)이 천황을 신성한 존재로 규정했습니다. 군대가 천황에게 직접 충성했습니다. 의회가 있었지만 천황의 권위 아래였습니다.
급속한 산업화였습니다. 30년 만에 산업화를 이루었습니다. 영국이 100년, 독일이 50년 걸린 것을.
군사적 팽창이었습니다. 청일 전쟁(1894~95년) 승리. 러일 전쟁(1904~05년) 승리. 조선 합병(1910년). 일본이 아시아의 강대국이 되었습니다.
마이클 만은 메이지 유신의 유산을 근대화가 자체 모순을 내포한 상태로 이루어졌음을 봅니다. 서양 제도를 채택했지만 그것을 전통적 권위주의 구조 위에 올려놓았습니다. 이 구조가 나중에 군국주의의 기반이 되었습니다.


2장. 천황제 : 이념 권력의 핵심


일본 군국주의의 이념적 기반이 천황제였습니다.
천황이 신성했습니다. 메이지 헌법이 천황을 "만세일계의 천황"으로 규정했습니다. 영원히 끊이지 않는 황통. 신이 내려준 지위.
이것이 유럽 파시즘의 지도자 숭배와 유사했습니다. 그러나 달랐습니다.
히틀러나 무솔리니가 스스로 권력을 장악한 지도자였습니다. 천황은 그 자리에 태어난 사람이었습니다. 선택되거나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존재했습니다.
국체(國體) 이념이었습니다. 일본이 가족 국가라는 것이었습니다. 천황이 아버지, 신민이 자녀. 충성과 효도가 동일한 것. 이 이념이 교육, 군대, 언론을 통해 반복적으로 주입되었습니다.
천황의 실제 권력이 복잡했습니다. 이론상 천황이 모든 권력을 가졌습니다. 실제로 천황이 직접 정치를 결정하지 않았습니다. 군부와 관료들이 천황의 이름으로 결정을 내렸습니다.
히로히토 천황(재위 1926~1989년)이 어느 정도 결정에 개입했는지가 역사적 논쟁입니다. 전쟁 책임 논쟁의 핵심이기도 합니다.
분명한 것이 있습니다. 천황의 이름이 모든 것을 정당화했습니다. "천황 폐하를 위해"가 모든 희생을 요구하는 근거가 되었습니다.
마이클 만은 천황제를 이념 권력이 신성한 근거를 가질 때 가장 강력해지는 방식으로 봅니다. 반박이 불가능했습니다. 신성한 것에 이의를 제기하는 것은 신에 대한 불경이었습니다.


3장. 군부의 부상 : 정치를 삼킨 군사


일본에서 군부가 어떻게 정치를 장악했을까요.
구조적 기반이 있었습니다. 메이지 헌법이 군부에게 특별한 지위를 주었습니다. 군은 의회가 아닌 천황에게 직접 보고했습니다. 육군과 해군 장관은 현역 군인이어야 했습니다. 군이 이 규정을 이용하여 장관직을 거부함으로써 내각을 붕괴시킬 수 있었습니다.
1920년대의 위기였습니다. 1차 세계대전 후 군축 압력이 있었습니다. 워싱턴 조약(1922년)이 해군 군비를 제한했습니다. 하라 다카시 총리가 군비 축소를 추진했습니다. 1921년 암살되었습니다.
청년 장교 운동이었습니다. 급진적 민족주의를 가진 젊은 장교들이 정치 변혁을 원했습니다. 쇼와 유신. 군부 주도의 국가 개혁. 이들이 민간 정치인과 "온건파" 군 지도자들을 암살했습니다.
1932년 이누카이 쓰요시 총리 암살. 1936년 2·26 사건. 젊은 장교들이 도쿄 중심부를 점령하고 정치 지도자들을 암살했습니다. 봉기가 진압되었지만 이후 민간 정치인들이 군부에 도전하기 어려워졌습니다.
만주사변(1931년)이 전환점이었습니다. 관동군이 도쿄 중앙 지휘부의 승인 없이 독자적으로 만주를 점령했습니다. 이것이 사후 승인되었습니다. 군이 정부보다 먼저 행동한 것이 정상화되었습니다.
마이클 만은 일본 군부를 군사 권력이 정치 권력을 점차 흡수한 과정으로 봅니다. 쿠데타가 아니었습니다. 헌법적 구조, 암살, 사실 조성(fait accompli)을 통해 점진적으로.


4장. 재벌과 군국주의 : 경제 권력의 역할


일본 군국주의가 기업 이익과 어떻게 연결되었을까요.
재벌(財閥)이 핵심이었습니다. 미쓰이, 미쓰비시, 스미토모, 야스다. 이 재벌들이 메이지 이후 일본 경제를 지배했습니다. 은행, 제조업, 무역, 광업을 통합한 거대 기업 집단.
재벌과 군부의 관계가 복잡했습니다.
이해관계의 일치였습니다. 군사 팽창이 시장을 만들었습니다. 만주, 중국, 동남아시아. 재벌들이 이 팽창 지역에서 자원을 얻고 시장을 확보했습니다. 군수 생산이 이익이었습니다.
긴장도 있었습니다. 급진 군부 세력이 재벌을 기득권 세력으로 비판했습니다. "자본의 노예"라고. 국가 통제를 강화해야 한다고.
실제로 전쟁이 진행되면서 국가가 경제에 더 깊이 개입했습니다. 1938년 국가총동원법. 국가가 경제 자원 배분을 통제했습니다.
재벌의 선택이었습니다. 재벌들이 군부 주도 팽창을 지지했습니다. 이탈리아 산업가들이 무솔리니를 지지하고 독일 기업들이 히틀러를 지지한 것과 같은 논리였습니다. 공산주의나 사회주의보다 군국주의가 재산을 지켜주었습니다.
마이클 만은 재벌-군부 관계를 경제 권력이 군사 권력과 공생하는 방식으로 봅니다. 재벌이 군국주의를 만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군국주의가 재벌의 이익과 일치했습니다. 이 공생이 일본 군국주의의 경제적 기반이었습니다.

 


5장. 일본 파시즘의 특수성 : 유럽과 무엇이 달랐나


일본 군국주의를 유럽 파시즘과 비교하면 무엇이 같고 무엇이 다를까요.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민족주의가 핵심 이념이었습니다. 대외 팽창이 이념적 정당화를 받았습니다. 민주주의가 약화되었습니다. 군사화가 사회 전반에 침투했습니다. 전쟁이 목표이면서 동시에 수단이었습니다.
차이점이 중요했습니다.
대중 파시즘 운동의 부재였습니다. 이탈리아와 독일에서 파시즘이 아래로부터 올라온 대중 운동이었습니다. 일본에서 그런 대중 운동이 없었습니다. 군부 엘리트가 위로부터 군국주의를 추진했습니다.
단일 지도자 신화의 부재였습니다. 히틀러, 무솔리니 같은 카리스마 지도자가 없었습니다. 천황이 존재했지만 직접 통치하지 않았습니다. 군부 안에서 파벌이 경쟁했습니다.
인종 이념의 차이였습니다. 나치즘이 아리아 인종의 우월성을 주장했습니다. 일본 군국주의가 대동아 공영권(Greater East Asia Co-Prosperity Sphere) 이념을 내세웠습니다. 아시아인들이 서양 제국주의에서 해방되어 일본 주도 아래 번영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유럽 파시즘의 노골적 인종 우월주의와 달랐습니다. 표면상 아시아 연대를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현실에서 일본인이 다른 아시아인보다 우월하다는 위계가 있었습니다.
마이클 만은 이 차이들이 일본 군국주의를 유럽 파시즘의 변형이 아닌 독자적 형태의 군사적 권위주의 민족주의로 봐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공통 요소들이 있지만 그 결합 방식과 사회적 기반이 달랐습니다.


6장. 중일 전쟁 : 아시아의 전쟁


1937년 7월 7일, 베이징 교외 루거우차오(마르코 폴로 다리).
일본군과 중국군 사이에 총격 사건이 있었습니다. 계기가 작았습니다. 그러나 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아니, 정확히는 전쟁이 확대되었습니다. 1931년 만주사변 이후 전쟁 상태였으니까요.
중일 전쟁의 구조였습니다. 일본이 중국 해안 도시와 대도시들을 빠르게 점령했습니다. 상하이, 난징, 우한. 그러나 중국을 완전히 정복할 수 없었습니다.
장제스의 국민당 정부가 내륙으로 후퇴했습니다. 마오쩌둥의 공산당이 게릴라 전쟁을 벌였습니다. 광활한 중국 대륙에서 일본이 도시를 점령했지만 농촌을 지배하지 못했습니다.
난징 대학살(1937년 12월~1938년 1월)이었습니다. 난징 함락 후 일본군이 6주간 잔혹 행위를 저질렀습니다. 민간인 학살, 강간, 약탈. 중국 자료는 30만 명 이상 사망을 주장합니다. 일본의 일부 학자들은 더 낮은 숫자를 제시합니다. 논쟁이 있습니다. 대규모 학살이 있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요.
상부의 명령? 일부는 있었습니다. 그러나 전체가 계획된 것이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군기의 붕괴. 중국인에 대한 비인간화 이념. 기나긴 전쟁에서 쌓인 병사들의 좌절. 보급 부족. 이 요소들이 결합했습니다.
마이클 만은 난징을 이념이 적을 비인간화할 때 군사 권력이 어떻게 통제를 벗어나는지의 사례로 봅니다. 군사 권력이 이념 권력의 틀 안에서 작동할 때, 그 이념이 특정 집단을 인간 이하로 규정할 때, 폭력의 제동이 사라집니다.


7장. 태평양 전쟁으로 : 왜 미국과 싸웠나


1941년 12월 7일, 진주만.
일본 해군이 하와이 진주만 미국 해군 기지를 기습 공격했습니다.
히틀러도 이 공격에 놀랐습니다.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왜 일본이 세계 최강 경제력을 가진 미국과 전쟁을 시작했을까요.
전략적 딜레마였습니다. 중일 전쟁이 교착되었습니다. 일본이 더 많은 자원이 필요했습니다. 석유, 고무, 철. 이것들이 동남아시아에 있었습니다. 영국, 네덜란드, 미국의 식민지에.
미국의 압박이었습니다. 1941년 미국이 일본에 석유 수출을 금지했습니다. 일본이 중국에서 철수하지 않으면 해제하지 않겠다는 조건이었습니다. 일본 석유 비축량이 2년 치였습니다. 2년 안에 결정해야 했습니다.
군부의 논리였습니다. 기다리면 더 약해진다. 지금 싸우면 이길 수 있다. 진주만을 기습하여 미국 태평양 함대를 무력화한다. 동남아시아를 점령하여 자원을 확보한다. 미국이 긴 전쟁의 피로로 협상에 나선다.
이 논리의 치명적 결함이 있었습니다. 미국이 협상에 나오지 않을 것이라는 점. 미국의 산업력이 시간이 지나면 압도할 것이라는 점.
야마모토 이소로쿠 제독이 알았습니다. 그가 진주만 작전을 계획했지만 미국과의 전면전에 회의적이었습니다. "잠자는 거인을 깨우는 것"이라고.
마이클 만은 진주만 결정을 군사 권력이 전략적 합리성을 넘어 이념적 논리와 제도적 관성에 이끌린 사례로 봅니다. 합리적으로 계산하면 전쟁이 불가능했습니다. 그러나 군부가 다른 선택을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8장. 아시아에서의 전쟁 : 제국의 실상


대동아 공영권의 현실이었습니다. 일본이 아시아 해방을 표방했습니다. 서양 식민주의에서 아시아인들을 해방한다고. 현실은 달랐습니다.
조선에서 일본이 토지를 수탈했습니다. 강제 노동이 있었습니다. 언어와 이름까지 일본화를 강요했습니다. 조선인들이 전선에 끌려갔습니다.
중국에서 앞서 살펴보았습니다. 학살, 강점, 착취였습니다.
위안부 문제였습니다. 일본군이 점령 지역에서 여성들을 성 노예로 삼았습니다. 조선, 중국, 필리핀, 네덜란드령 동인도에서 최소 수만 명, 일부 추정으로 수십만 명의 여성들이 위안소에 강제 동원되었습니다.
이 역사가 오늘날까지 한일 관계의 핵심 쟁점입니다.
강제 노동이었습니다. 조선인, 중국인, 동남아시아인들이 광산, 군사 시설, 철도 건설에 강제 동원되었습니다. 죽음의 철도로 불린 버마-태국 철도에서 연합군 포로와 아시아 강제 노동자 수만 명이 죽었습니다.
세균전이었습니다. 731 부대가 만주에서 중국인과 포로들에게 생물학 무기를 실험했습니다. 적어도 수천 명이 희생되었습니다.
마이클 만은 일본 군국주의의 아시아 지배를 해방 이념과 착취 현실의 극단적 괴리로 봅니다. 대동아 공영권 이념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이념의 실질이 일본의 이익을 위한 아시아 착취였습니다. 이념이 폭력을 가리는 도구가 되었습니다.


9장. 패전과 전후 : 군국주의의 유산


1945년 8월 15일, 히로히토 천황이 라디오 방송으로 일본의 항복을 선언했습니다.
대부분의 일본인이 천황 목소리를 처음 들었습니다. 그것도 항복 선언으로.
어떻게 일본이 패했을까요.
자원의 한계였습니다. 미국 잠수함이 일본 보급선을 차단했습니다. 1944~45년 석유, 식량, 원자재가 일본에 도달하지 못했습니다.
섬 전투들이었습니다. 과달카날, 사이판, 이오지마, 오키나와. 일본군이 죽을 때까지 싸웠습니다. 항복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미국에게 본토 상륙 시 엄청난 희생을 예고했습니다.
원자폭탄이었습니다.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 8월 9일 나가사키. 도시 전체가 순간적으로 파괴되었습니다. 약 21만 명이 폭발과 그 후유증으로 사망했습니다.
소련이 8월 9일 만주로 진격했습니다. 두 방향의 압박 앞에 일본이 항복했습니다.
전후 처리였습니다. 극동 군사 재판(1946~1948년). 독일 뉘른베르크 재판에 상응했습니다. 주요 전범들이 재판받고 처형되었습니다.
그러나 히로히토 천황은 기소되지 않았습니다. 맥아더의 결정이었습니다. 일본의 점령 통치에 천황을 활용하기 위해.
이 결정이 전후 일본의 전쟁 기억 방식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책임 소재가 불분명해졌습니다.
마이클 만은 전후 처리의 불완전성을 봅니다. 독일이 나치즘과 홀로코스트에 대한 국가적 책임을 인정하는 방향으로 나아갔습니다. 일본은 더 복잡했습니다. 이 차이가 한국, 중국과의 역사 갈등이 지속되는 이유 중 하나였습니다.


10장. 마이클 만의 분석 : 일본 군국주의가 보여주는 것


마이클 만이 일본 군국주의에서 읽어내는 이론적 통찰들이 있습니다.
파시즘이 유럽만의 현상이 아니었습니다. 아시아에서도 유사한 구조가 나타났습니다. 형태는 달랐습니다. 그러나 민족주의 이념, 군사 권력의 팽창, 경제 권력과의 공생, 민주주의 억압이라는 공통 요소가 있었습니다.
비서양적 근대화 경로의 문제였습니다. 일본이 빠른 근대화를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그 근대화가 권위주의 구조 위에서 이루어졌습니다. 경제적 발전과 정치적 민주화가 함께 가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군국주의의 조건이 되었습니다.
이 관찰이 현재적 의미를 갖습니다. 경제 발전이 자동으로 민주화를 만들지 않습니다. 특히 강한 민족주의와 결합할 때.
식민 지배의 유산이었습니다. 일본이 아시아 각국에 남긴 유산이 복잡합니다. 일부 근대적 인프라를 남겼습니다. 동시에 학살, 착취, 강제 동원의 기억을 남겼습니다. 이 이중성이 한일 관계, 중일 관계에서 오늘날도 갈등의 근원입니다.
책임과 기억의 문제였습니다. 독일이 홀로코스트에 대한 책임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이것을 교육했습니다. 일본은 더 복잡한 경로를 걸었습니다. 공식 사과가 있었지만 그것이 일관되지 않았습니다. 일부 지도자들이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했습니다. 이것이 아시아 이웃 국가들과의 갈등을 만듭니다.
마이클 만의 결론이 있습니다.
일본 군국주의가 천황제, 군부, 재벌의 권력 동맹에서 나왔습니다. 이 동맹이 파시즘의 아시아적 형태를 만들었습니다. 그 형태가 유럽과 달랐지만 결과가 같았습니다. 수백만 명의 죽음. 아시아 전체의 파괴.
그리고 그 역사가 해결되지 않은 채로 현재까지 이어집니다. 한국, 중국, 일본 사이의 역사 논쟁이 그 증거입니다.
역사가 끝나지 않습니다. 그것이 현재 안에서 살아 있습니다. 이것이 역사를 공부해야 하는 또 다른 이유입니다.


1945년 9월 2일 도쿄 만에 정박한 미국 전함 미주리 호 갑판.
일본 외무장관 시게미쓰 마모루가 항복 문서에 서명했습니다. 이어서 참모총장 우메즈 요시지로가 서명했습니다.
맥아더가 말했습니다. "이것은 위대하고 심오한 군사적 승리이며, 피로 쓰인 것입니다."
그 자리에 있던 연합군 포로들이 있었습니다.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사람들. 그들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마이클 만이 일본 군국주의의 역사에서 마지막으로 읽는 것이 있습니다.
군국주의가 민족의 영광을 약속했습니다. 천황의 이름으로. 대동아의 해방을 위해. 결과가 민족의 파괴였습니다. 아시아 전체의 파괴였습니다.
이것이 파시즘과 군국주의의 공통된 운명이었습니다. 이탈리아에서, 독일에서, 일본에서 모두.
영광을 약속한 이념이 재앙을 만들었습니다.
역사가 이것을 기억합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합니다.


다음 화 예고 60화, 2차 세계대전 : 총력전과 권력의 총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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