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을 사랑했던 사람들
당신에게 돈은 무엇인가.
목표인가, 수단인가. 안전인가, 자유인가. 아니면 — 그냥 항상 부족한 무언가인가.
돈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묘하게 불편하다. 너무 밝히는 것 같기도 하고, 너무 솔직한 것 같기도 하고. 그래서 우리는 돈 이야기를 할 때 늘 한 겹을 씌운다. "돈이 전부는 아니지만." "돈보다는 행복이 중요하지만." 그 '하지만' 뒤에 진짜 마음이 숨어 있다.
단테는 그 '하지만'을 걷어냈다.
지옥의 네 번째 층.
단테 앞에 거대한 형상이 나타났다. 플루토스 — 재물의 신이자 이 층의 지배자. 그는 단테를 보자마자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쏟아냈다. 위협인지 저주인지 모를 소리가 터져 나왔다.
베르길리우스가 조용히 말했다.
"침묵하라. 이 사람은 하늘의 뜻으로 이 길을 간다."
플루토스는 그 말에 풍선처럼 꺼졌다. 바닥에 쓰러졌다.
단테는 그 앞을 지나 안으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본 것은 예상 밖의 광경이었다.

두 무리가 마주 보고 있었다.
한쪽은 탐욕한 자들이었다. 평생 모으고, 쌓고, 움켜쥐었던 사람들. 다른 쪽은 낭비한 자들이었다. 평생 흥청망청 쓰고, 뿌리고, 탕진했던 사람들.
그들은 서로를 향해 거대한 바위를 굴렸다.
온 힘을 다해 바위를 밀어 상대편 진영으로 보낸다. 바위가 충돌하면 굉음이 났다. 그리고 다시 굴려온다. 영원히, 반복해서.
충돌하는 순간 그들은 서로에게 소리쳤다.
"왜 꽉 쥐고 있느냐!" "왜 함부로 뿌리느냐!"
그리고 다시 바위를 밀었다.
여기서 단테의 통찰이 빛난다.
탐욕한 자와 낭비한 자는 정반대처럼 보이지만 같은 층에 있다.
한쪽은 한 푼도 쓰지 못했고, 한쪽은 한 푼도 지키지 못했다. 한쪽은 금고 앞에서 살았고, 한쪽은 빈털터리로 살았다. 삶의 방식은 정반대였지만 — 단테의 눈에는 같은 병이었다.
둘 다 돈에 지배당한 삶이었기 때문이다.
탐욕한 자는 돈을 잃을까봐 두려워하며 살았다. 낭비한 자는 돈이 생기면 멈추지 못하며 살았다. 한 명은 돈에 묶여 살았고, 한 명은 돈에 끌려 살았다. 주인처럼 보이지만 둘 다 종이었다.
돈을 어떻게 쓰느냐의 문제가 아니었다. 돈이 삶의 중심에 있느냐의 문제였다.
단테는 이 층에서 이름을 거의 적지 않았다.
얼굴을 알아볼 수가 없었다고 했다. 탐욕과 낭비가 그들의 얼굴을 지워버렸기 때문이라고.
그리고 덧붙였다.
"저들 중에는 교황도 있고, 추기경도 있다."
단테가 가장 경멸했던 것 중 하나가 성직자의 탐욕이었다. 신을 말하면서 재물을 쌓고, 가난을 설교하면서 부를 움켜쥐는 자들. 그들이 탐욕한 자 무리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었다고 단테는 썼다.
말과 삶이 다른 사람들에 대한, 단테의 가장 신랄한 고발이었다.
베르길리우스가 조용히 설명했다.
"재물이란 것은 원래 운명의 여신이 다스린다. 그녀는 쉬지 않고 돌린다. 이 사람에게 주었다가, 저 사람에게 주었다가. 어떤 민족에게는 풍요를 주고, 어떤 민족에게는 가난을 준다. 그것이 그녀의 일이다. 그녀는 욕을 먹어도 멈추지 않는다."
운명의 여신 포르투나. 행운의 수레바퀴를 돌리는 존재.
단테는 포르투나를 악의 존재로 보지 않았다. 그녀는 그냥 자기 일을 할 뿐이다. 재물은 원래 한곳에 머물지 않는다. 흘러가는 것이다. 강물처럼, 바람처럼.
그러니 움켜쥐어도 소용없고, 탕진해도 의미없다. 잡을 수 없는 것을 삶의 중심에 놓는 것 — 그것이 처음부터 잘못된 설계였다.

탐욕한 자들을 생각할 때 우리는 보통 극단적인 이미지를 떠올린다.
스크루지 영감 같은 구두쇠. 돈 앞에서 인간성을 잃은 사람.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단테는 더 일상적인 탐욕을 보고 있었다.
노후가 걱정돼서 지금 쓰지 못하는 것. 손해볼까봐 작은 것도 계산하는 것. 나눠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손이 움직이지 않는 것. 충분히 가졌는데도 항상 부족하다고 느끼는 것.
그리고 낭비도 마찬가지다.
스트레스를 받으면 지갑을 여는 것. 기분이 좋으면 과하게 쓰는 것. 내일을 생각하지 않고 오늘을 탕진하는 것. 돈이 생기면 손에 쥐고 있지 못하는 것.
극단적인 악인의 이야기가 아니다. 정도의 차이일 뿐, 우리 모두 그 바위를 굴려본 적이 있다.
두 무리는 끝없이 충돌했다.
탐욕한 자는 낭비한 자를 이해하지 못했다. 왜 저렇게 함부로 쓰느냐고. 낭비한 자는 탐욕한 자를 이해하지 못했다. 왜 저렇게 꽉 쥐고 사느냐고.
그런데 단테가 보기에 그들은 서로를 욕하며 굴리는 그 바위 — 그것이 똑같이 생겼다.
같은 바위를 서로 다른 방향으로 굴리고 있었을 뿐이다.
돈에 대한 태도는 삶에 대한 태도를 닮는다.
꽉 쥐는 사람은 대부분 다른 것도 꽉 쥔다. 관계도, 감정도, 과거도. 놓지 못한다. 혹시라도 잃을까봐 두렵다. 충분한데도 충분하다고 느끼지 못한다.
함부로 뿌리는 사람은 대부분 다른 것도 함부로 한다. 시간도, 에너지도, 감정도. 지금 이 순간에만 산다. 내일을 담보로 오늘을 산다. 그리고 항상 빈손이다.
단테는 돈 이야기를 하면서 사실은 삶을 어떻게 대하는가를 묻고 있었다.
바위가 또 충돌했다.
굉음이 났다. 다시 양쪽으로 굴러갔다. 다시 밀기 시작했다.
단테는 그 반복 속에서 걸어나왔다.
그리고 이런 생각을 했을 것이다.
저 바위를 내려놓으면 어떻게 될까. 상대를 향해 굴리지 않으면. 그냥 — 내려놓으면.
아마도 그게 자유일 것이다.
돈으로부터의 자유는 많이 갖거나 없이 사는 것이 아니다. 돈이 삶의 중심 자리에서 내려오는 것이다. 그 자리에 다른 무언가가 오는 것. 사람이든, 의미든, 사랑이든.
포르투나의 수레바퀴는 어차피 돈다. 오늘 내 것이 내일은 아닐 수 있다. 반대로 오늘 없는 것이 내일 올 수도 있다.
그것을 알면서도 바위를 굴리는 것이 탐욕이고 낭비다. 그것을 알기 때문에 내려놓는 것이 — 지혜다.
당신이 지금 굴리고 있는 바위는 무엇인가.
너무 꽉 쥐고 있는 것이 있는가. 아니면 멈추지 못하고 뿌리고 있는 것이 있는가.
단테는 심판하지 않는다. 다만 묻는다.
그 바위를 굴리느라 — 정작 걸어가야 할 길을 걷고 있는가.
"재물의 허무함을 이제 알겠는가. 운명의 여신이 그것을 다스린다. 인간의 다툼은 그녀를 쉬게 하지 못한다." — 단테, 신곡 지옥편 제7곡
💡 다음 화 예고 EP.08 — 분노를 끝내지 못한 사람들 진흙 속에서 서로를 물어뜯는 자들. 그리고 그 아래, 아무 소리도 내지 못한 채 가라앉아 있는 자들. 터뜨리든 삼키든 — 끝내지 못한 분노는 어디로 가는가.
일곱 편의 흐름입니다.
- EP.01 — 길을 잃은 것을 인정하기
- EP.02 — 두렵지만 출발하기
- EP.03 — 진실 앞에 눈 뜨기
- EP.04 — 삶에서 선택한다는 것
- EP.05 — 사랑이 인간을 어디까지 데려가는가
- EP.06 — 채워지지 않는 것을 채우려는 것
- EP.07 — 돈이 삶의 중심이 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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