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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세계문학 들여다 보기

크라스너호르커이 라슬로『저항의 우울』

by 책으로떠나는여행 2025. 11. 6.

종말의 춤: 혼돈 속으로 빠져드는 한 마을의 묵시록

"고래가 왔다. 그리고 모든 것이 무너졌다" 헝가리의 카프카가 그린 암흑의 비전 『저항의 우울』


작가의 삶

크라스너호르커이 라슬로(Krasznahorkai László, 1954~)는 헝가리 죄르(Győr)에서 태어났다.
법학을 공부했다. 변호사가 될 뻔했다. 하지만 문학을 선택했다.
편집자로 일했다. 문학잡지에서. 1980년대 헝가리. 공산주의 말기. 억압과 침체의 시대.
1985년, 첫 소설 『사탄 탱고(Sátántangó)』 출판. 충격이었다. 아무도 이런 소설을 쓰지 않았다.
긴 문장. 한 단락이 한 페이지. 한 문장이 한 페이지. 숨 쉴 틈이 없다.
절망적 분위기. 무너지는 마을. 사라지는 사람들. 끝없는 비. 진흙. 부패.
비평가들이 혼란스러워했다. "이것은 무엇인가? 카프카? 베케트? 아니, 완전히 새로운 것."
독자들은... 적었다. 어려웠다. 우울했다. 읽기 힘들었다.
하지만 일부는 열광했다. "천재다!"
벨라 타르(Béla Tarr) 감독이 영화로 만들었다. 7시간 30분. 흑백. 느린. 침묵. 걸작.
1989년, 공산주의 붕괴. 동유럽이 변했다. 자유가 왔다. 자본주의가 왔다.
하지만 크라스너호르커이는 낙관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 어두워졌다.
『저항의 우울(Az ellenállás melankóliája)』(1989). 영어 번역본은 1998년 『The Melancholy of Resistance』.
다시 벨라 타르가 영화화했다. 『베르크마이스터 하모니(Werckmeister Harmonies)』(2000). 칸 영화제 주목.
2015년, 맨부커 인터내셔널상 수상. 국제적 명성.
2024년, 노벨 문학상 수상. "그의 잔혹하고 정밀한 산문은 인간 조건의 극한을 탐구한다"는 선정 이유.
현재 베를린 거주. 헝가리와 독일을 오가며 산다.
여전히 쓴다. 여전히 어둡다. 여전히 타협하지 않는다.
인터뷰를 거의 하지 않는다. 사진 찍기를 싫어한다. "작품만 보라"고 말한다.


명작 비하인드

제목의 의미

원제: 『Az ellenállás melankóliája』
직역: "저항의 우울", "저항의 멜랑콜리아"
무엇에 대한 저항인가?
질서에 대한 저항: 기존 질서가 무너진다. 혼돈이 온다.
이성에 대한 저항: 광기가 퍼진다. 논리가 작동하지 않는다.
문명에 대한 저항: 야만이 돌아온다. 폭력이 분출한다.
의미에 대한 저항: 모든 것이 무의미해진다. 설명할 수 없다.
그리고 "우울(melancholy)".
중세의 개념. 4체액설의 하나. 흑담즙(black bile). 우울, 침체, 사색.
르네상스의 멜랑콜리아. 뒤러의 판화. 천사가 앉아 있다. 날개가 있지만 날지 못한다. 도구들이 흩어져 있다. 쓸모없게.
크라스너호르커이의 멜랑콜리아도 그렇다. 무력함. 변화시킬 수 없음. 지켜볼 수밖에 없음.
주인공 발루쉬카(Valuska)는 본다. 마을이 무너지는 것을. 막을 수 없다. 그저 본다. 슬프게.
이것이 "저항의 우울"이다. 저항하고 싶지만 무력하다. 슬프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는다.

벨라 타르와의 협업

크라스너호르커이와 벨라 타르는 영혼의 동반자다.
타르가 크라스너호르커이의 작품을 영화로 만든다. 원작에 충실하지만 변형한다. 시각적으로 재창조한다.
『사탄 탱고』(1994): 7시간 30분. 긴 테이크. 침묵. 비. 진흙. 종말.
『베르크마이스터 하모니(Werckmeister Harmonies)』(2000): 『저항의 우울』 원작. 145분. 흑백. 롱 테이크.
고래 장면. 거대한 고래 시체가 트럭에 실려 온다. 사람들이 줄을 선다. 들어가 본다. 경외와 공포.
폭동 장면. 긴 단일 테이크. 카메라가 군중을 따라간다. 천천히. 병원을 습격한다. 노인들을 때린다. 침묵 속에서.
크라스너호르커이는 시나리오를 함께 썼다. 타르와.
둘의 비전이 일치한다. 세계는 무너지고 있다. 인간은 잔혹하다. 하지만 아름다움이 있다. 기이한, 초월적인 아름다움.
타르는 말했다. "크라스너호르커이 없이 나는 영화를 만들 수 없다. 그는 내 눈이다."
크라스너호르커이는 말했다. "타르는 내 소설을 본다. 정확히."

음악과 우주

『저항의 우울』에는 음악 이론이 등장한다.
베르크마이스터 조율법(Werckmeister temperament). 17세기 음악 이론.
평균율이 아니다. 각 음의 간격이 조금씩 다르다. 불균형. 하지만 조화.
에스테르(Eszter) 씨가 설명한다. 발루쉬카에게. 긴 장면.
"우주도 그렇다. 질서가 있다. 하지만 완벽하지 않다. 균열이 있다. 그 균열에서 혼돈이 새어나온다."
"우리는 그 균열을 막으려 한다. 조율로. 질서로. 문명으로. 하지만 막을 수 없다."
"혼돈은 언제나 돌아온다. 우주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소설의 철학이다.
질서는 환상이다. 일시적이다. 표면적이다.
아래에는 혼돈이 있다. 항상. 기다리고 있다.
작은 균열만 있으면 분출한다.
고래가 그 균열이다. 설명할 수 없는 것. 이질적인 것.
고래가 오자 모든 것이 무너진다.
크라스너호르커이는 음악을 사랑한다. 특히 바흐.
"바흐의 음악에는 우주의 질서가 있다. 완벽한 조화. 하지만 동시에 슬픔이 있다. 그 조화가 인위적이라는 것을, 일시적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헝가리의 역사

『저항의 우울』은 특정 시대를 명시하지 않는다. 우화적이다.
하지만 배경이 있다. 헝가리의 역사.
1956년 혁명: 소련에 대한 반란. 진압됐다. 탱크가 부다페스트로 들어왔다. 수천 명 죽었다.
1980년대 말: 공산주의 붕괴 직전. 불안. 기대. 공포. 무엇이 올 것인가?
소설이 출판된 1989년. 바로 그해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다. 공산주의 종말.
하지만 크라스너호르커이는 낙관하지 않았다.
"한 독재가 끝나면 다른 것이 온다. 형태만 다를 뿐."
"사람들은 자유를 원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진짜 원하는 것은 질서다. 누군가가 지배해주는 것."
"혼돈을 견딜 수 없기 때문이다."
소설에서 마을 사람들이 그렇다.
처음에는 불안하다. 질서가 무너졌다.
그다음 분노한다. 누군가를 탓한다.
마침내 지도자를 받아든다. "왕자(the Prince)". 얼굴도 보이지 않는.
파시즘의 귀환. 대중의 선택으로.
20세기 헝가리 역사의 반복.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붕괴 → 혼란 → 호르티(Horthy) 파시즘 → 2차 대전 → 소련 점령 → 공산주의 → 1989년 자유 → 그리고?
크라스너호르커이는 예언자였다.
2010년대 헝가리. 오르반(Orbán) 빅토르. 권위주의. 반이민. 민족주의.
『저항의 우울』이 다시 읽힌다. 현재형으로.


전체 줄거리

1부: 고래의 도착

작은 헝가리 마을. 이름 없는. 겨울. 혹독한 추위.
발루쉬카(Valuska János)는 우편 배달부다. 서른 살쯤. 순수하다. 세상을 경이로 본다.
그는 천문학을 사랑한다. 우주를. 행성들의 움직임을.
매일 밤 술집에 간다. 취객들에게 우주를 설명한다. 직접 시연하며.
"제가 태양입니다. 이 사람은 지구. 저 사람은 달. 자, 일식이 일어납니다!"
술꾼들이 비틀거리며 그를 따라 움직인다. 웃으며. 아니면 무관심하게.
발루쉬카는 에스테르 씨의 집에 산다. 하숙인처럼.
에스테르(Eszter György)는 음악학자다. 은퇴했다. 혼자 산다.
아내 티르게(Tünde)와 별거 중이다. 이혼하지는 않았지만.
에스테르는 피아노를 조율한다. 베르크마이스터 방식으로. 완벽을 추구한다.
"세상이 혼돈이라도 음악만은 질서가 있어야 한다."
방에 틀어박혀 지낸다. 사람들을 만나지 않는다. 피아노만 친다.
발루쉬카는 그를 존경한다. 돌본다. 음식을 가져다준다. 이야기를 들어준다.
어느 날 소문이 퍼진다.
"서커스가 온다!"
하지만 이상한 서커스다.
동물이 하나뿐이다. 고래. 거대한 고래.
죽은 고래다. 방부 처리된. 트럭에 실려 있다.
그리고 "왕자(Herczeg, the Prince)"라는 사람이 있다. 신비한 인물. 아무도 보지 못했다. 트럭 안에 숨어 있다.
마을 광장에 트럭이 도착한다.
사람들이 줄을 선다. 고래를 보려고. 입장료를 낸다.
발루쉬카도 간다. 밤에. 혼자.
트럭 안으로 들어간다.
어둡다. 작은 전구 하나만 켜져 있다.
고래가 있다. 거대하다. 천장까지 닿는다.
발루쉬카가 다가간다. 천천히.
고래의 눈을 본다. 유리처럼. 하지만 뭔가 있다. 슬픔? 지혜? 공포?
손을 뻗는다. 고래의 피부를 만진다. 차갑다. 거칠다.
"당신은 어디서 왔나요? 왜 여기 있나요?"
대답이 없다. 당연히.
하지만 뭔가 변했다. 공기가. 시간이.
발루쉬카는 안다. 설명할 수 없지만.
"뭔가 끔찍한 일이 일어날 것이다."

2부: 혼돈의 시작

고래가 온 후 마을이 변한다.
이방인들이 모여든다. 떠돌이들. 더럽고 거칠다.
고래 트럭 주변에 캠프를 친다. 불을 피운다. 술을 마신다.
싸운다. 소리를 지른다. 밤새.
마을 사람들이 불안해한다.
"저들은 누구인가? 왜 떠나지 않는가?"
가게 주인들이 문을 일찍 닫는다. 거리가 비어간다.
이방인들이 더 많아진다. 매일.
어디서 오는가? 왜 오는가? 아무도 모른다.
"왕자가 부른다"는 소문이 있다. 하지만 왕자를 본 사람은 없다.
티르게 부인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녀는 강한 여자다. 지배적이다. 마을의 영향력 있는 사람들을 안다.
"우리는 질서를 회복해야 한다. 시장은 무능하다. 경찰은 겁쟁이다. 우리가 직접 해야 한다."
모임을 조직한다. 비밀스럽게.
"마을 구원 위원회." 부르주아들. 지식인들. 은퇴한 관료들.
그들은 계획한다. 정확히 무엇을? 불명확하다.
"질서", "청소", "보호." 애매한 말들.
발루쉬카는 불안하다.
에스테르 씨에게 말한다. "뭔가 잘못되고 있어요. 멈춰야 해요."
에스테르는 관심 없다. "세상사는 내 일이 아니다. 나는 음악만 한다."
"하지만..."
"신경 쓰지 마라, 발루쉬카. 그냥 네 일이나 해라."
발루쉬카는 혼자 고민한다.
고래에게 다시 간다. 밤에.
트럭 안이 더 어두워졌다. 전구가 거의 나갔다.
고래는 그대로다. 움직이지 않는다. 당연히.
하지만 뭔가 달라졌다. 냄새? 공기? 느낌?
"당신은 무엇을 가져왔나요? 죽음을? 종말을?"
여전히 대답이 없다.
밖에서 소리가 들린다. 고함. 노래. 이상한 노래.
이방인들이 부른다. 언어를 알 수 없다. 리듬만 있다. 위협적인.
발루쉬카가 나온다.
이방인들이 그를 본다. 침묵한다. 멈춘다.
응시한다. 오래.
발루쉬카가 떤다. 공포로.
그중 하나가 웃는다. 이빨이 없다.
다른 이들도 웃는다. 계속 응시하며.
발루쉬카가 도망친다. 뛰어서. 집으로.

3부: 폭동

어느 날 밤 그것이 일어난다.
이방인들이 움직인다. 갑자기. 조직적으로.
마을로 쏟아져 들어온다. 수백 명.
무기를 들었다. 막대기, 쇠파이프, 돌.
행진한다. 침묵 속에서. 일사불란하게.
누가 지휘하는가?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질서가 있다.
건물을 공격한다. 유리창을 깬다. 문을 부순다.
가게를 약탈한다. 하지만 이상하다. 물건을 가져가지 않는다. 그냥 부순다.
병원에 도착한다.
간호사들이 도망친다. 비명을 지르며.
의사들이 숨는다.
군중이 들어간다. 복도를 따라. 천천히.
병실에 도달한다.
노인 환자들이 누워 있다. 움직일 수 없다.
군중이 그들을 본다.
한 사람이 첫 번째 침대로 간다. 막대기를 든다.
노인이 손을 든다. "제발..."
내려친다.
다른 이들도 따라한다. 침대마다.
체계적으로. 감정 없이. 기계적으로.
때린다. 계속. 노인들이 피를 흘린다. 울부짖는다. 죽는다.
군중은 침묵한다. 소리를 지르지 않는다. 웃지도 않는다.
일을 한다. 그것뿐.
발루쉬카가 거리에 있다.
폭동을 본다. 멀리서.
뛰어간다. "멈춰요! 제발! 왜 이러는 거예요!"
군중이 그를 본다.
멈춘다. 모두.
응시한다. 수백 개의 눈.
발루쉬카가 얼어붙는다.
한 사람이 그에게 다가온다. 천천히.
얼굴을 가까이 댄다.
숨결이 느껴진다. 차갑고 악취가 난다.
"당신은... 왜...?"
대답이 없다. 표정도 없다.
그냥 본다.
그리고 돌아선다. 떠난다.
군중도 따라간다. 발루쉬카를 남겨두고.
발루쉬카가 무너진다. 바닥에.
울지도 못한다. 충격으로.

4부: 군대의 도착

다음 날 아침 군대가 온다.
탱크. 병사들. 계엄령.
마을을 봉쇄한다. 이방인들을 체포한다.
저항 없이. 이방인들이 순순히 잡힌다.
트럭에 실려 어디론가 간다.
고래 트럭도 끌고 간다. 군대가.
고래는 어디로 가는가? 아무도 모른다.
티르게 부인이 승리를 선언한다.
"우리가 이겼다! 질서가 회복됐다!"
"마을 구원 위원회"가 실권을 잡는다.
시장을 해임한다. 경찰서장을 바꾼다.
자신들의 사람을 앉힌다.
"새로운 질서. 강한 질서."
사람들이 박수를 친다. 일부는. 안도의 한숨을 쉰다.
"이제 안전하다."
하지만 발루쉬카는 안다.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다. 아니, 더 나빠졌다."
에스테르 씨를 찾아간다.
"선생님, 끔찍한 일이 일어났어요. 병원에서... 노인들이..."
에스테르가 듣는다. 얼굴이 창백해진다.
처음으로 밖을 본다. 창문 너머.
거리가 텅 비어 있다. 깨진 유리. 피 자국.
"세상이... 끝났구나."
"아니요! 아직..."
"끝났다, 발루쉬카. 우리가 알던 세상은."
티르게가 찾아온다. 남편에게.
"당신이 필요해요. 위원회에서 일해야 해요. 음악 교육 담당."
"거절한다."
"당신은 선택할 수 없어요. 이것은 의무예요."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을 것이오."
"그럼 당신은 적이에요. 새 질서의 적."
에스테르가 웃는다. 비참하게.
"그렇다면 적이지."
티르게가 떠난다. 분노하며.

5부: 정신병원

며칠 후 그들이 발루쉬카를 데리러 온다.
"당신은 조사를 받아야 합니다. 폭동에 연루된 혐의."
"저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요! 막으려 했어요!"
"그것이 당신의 주장입니다. 확인해야 합니다."
데려간다. 어디론가.
정신병원이었다.
"당신은 정신 감정이 필요합니다."
발루쉬카가 항의한다. "저는 미치지 않았어요!"
"그것은 의사가 판단할 일입니다."
병원에 갇힌다. 작은 방에.
창문에 철창이 있다.
다른 환자들이 복도를 배회한다. 중얼거리며. 웃으며.
한 노인이 다가온다.
"고래를 봤나?"
"예... 봤어요..."
"나도. 아름다웠지. 그리고 끔찍했지."
"왜 우리가 여기 있는 거죠?"
"고래를 봤기 때문이지. 봐서는 안 되는 것을 봤기 때문에."
발루쉬카가 이해하지 못한다.
의사가 온다. 질문한다.
"고래가 당신에게 말했습니까?"
"아니요. 고래는 죽었어요."
"하지만 당신은 매일 밤 찾아갔습니다. 왜?"
"경이로워서요. 아름다워서요."
"경이? 썩은 고래를?"
"예. 우주에서 온 것 같았어요. 다른 세계에서."
의사가 기록한다.
"환각. 망상. 현실 검증 능력 상실."
"아니에요! 저는..."
"당신은 치료가 필요합니다."
주사를 놓는다. 약을 먹인다.
발루쉬카의 세계가 흐려진다.
꿈인지 현실인지 구별할 수 없다.
고래가 나타난다. 꿈에서. 살아있다. 바다를 헤엄친다.
발루쉬카가 함께 헤엄친다. 깊은 곳으로. 더 깊은 곳으로.
빛이 사라진다. 어둠만 남는다.
하지만 두렵지 않다. 평화롭다.
"여기가 세상의 끝인가요?"
고래가 대답한다. 처음으로.
"아니다. 시작이다."

에필로그: 에스테르의 항복

에스테르는 혼자 남았다.
발루쉬카가 없다.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다.
피아노를 친다. 계속. 밤낮으로.
베르크마이스터 조율.
하지만 무언가 틀렸다. 소리가 이상하다.
다시 조율한다. 또. 또.
여전히 이상하다.
문제는 피아노가 아니다. 세상이다. 우주가.
조화가 무너졌다.
"균열이 너무 커졌다. 이제 막을 수 없다."
티르게가 다시 온다.
"마지막 기회예요. 우리와 함께하세요."
에스테르가 본다. 아내를. 오래.
"당신은 변했소."
"시대가 변했어요. 우리도 변해야 해요."
"아니오. 당신은 항상 그랬소. 나만 보지 못했을 뿐."
"무슨 뜻이에요?"
"권력을 원했소. 항상. 질서라는 이름으로. 선이라는 이름으로. 하지만 본질은 지배욕이었소."
"당신은 비겁해요! 세상을 외면하고 피아노나 치면서!"
"그렇소. 나는 비겁하오. 인정하오."
"그럼?"
"항복하겠소."
"위원회에 합류한다는 거예요?"
"아니오. 모든 것에 항복한다는 것이오. 저항도, 조율도, 의미도."
"무슨 소리예요?"
"세상은 혼돈이오. 항상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오. 우리의 질서는 환상이었소."
"미쳤군요!"
"그렇다면 미친 것이오. 발루쉬카처럼."
티르게가 떠난다. 마지막으로. 문을 세게 닫는다.
에스테르는 혼자 남는다. 완전히.
피아노로 간다. 앉는다.
손을 건반 위에 올린다.
누르지 않는다. 그냥 올려둔다.
"무엇을 연주해야 하는가? 조화가 거짓말이라면?"
"무엇을 조율해야 하는가? 우주가 혼돈이라면?"
손을 내린다.
창밖을 본다. 겨울. 여전히. 끝없는 겨울.
눈이 내린다. 천천히. 조용히.
모든 것을 덮는다. 혼돈을. 폭력을. 피를.
하얗게.
에스테르가 웃는다. 쓸쓸하게.
"이것이 유일한 조화인가. 망각의 조화."
일어선다. 코트를 입는다.
밖으로 나간다. 처음으로. 몇 주 만에.
거리를 걷는다. 천천히.
마을이 고요하다. 사람이 없다. 통행금지.
에스테르만 걷는다. 눈 속을.
광장에 도착한다. 고래가 있던 곳.
텅 비어 있다. 트럭 자국만 남아 있다. 눈에 덮여가고 있다.
에스테르가 그 자리에 선다.
눈을 감는다.
고래를 상상한다. 거대하고 고요한.
"당신은 무엇이었는가? 전조? 심판? 아니면 그냥 우연?"
대답이 없다. 당연히.
하지만 에스테르는 느낀다.
"중요하지 않다. 이유는."
"중요한 것은: 우리가 견딜 수 없었다는 것. 설명할 수 없는 것을."
"그래서 폭력으로 대답했다는 것."
"이것이 인간이다."
눈을 뜬다.
하늘을 본다. 회색. 끝없이 회색.
"발루쉬카, 용서해주게. 내가 자네를 지키지 못했네."
돌아선다. 집으로.
하지만 다른 길로. 병원 쪽으로.
병원 앞에 도착한다.
건물이 어둡다. 버려진 것 같다.
아니다. 안에 불빛이 있다. 희미하게.
문을 두드린다.
아무도 나오지 않는다.
더 세게 두드린다.
간호사가 나온다. 나이 든 여자.
"무슨 일이십니까?"
"발루쉬카 요노쉬를 찾아왔소."
"면회 시간이 아닙니다."
"알고 있소. 하지만..."
간호사가 그를 본다. 오래.
"에스테르 선생님?"
"아시오?"
"발루쉬카가 선생님 이야기를 했어요. 계속."
"그가... 어떻소?"
간호사가 고개를 젓는다.
"약 때문에... 자신이 누군지도 모릅니다."
"볼 수 있겠소?"
"규정상..."
"제발."
간호사가 망설인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인다.
"잠깐만요. 하지만 오래는 안 됩니다."
복도를 따라간다. 긴 복도. 흰색. 형광등.
문을 연다.
작은 방. 침대 하나. 창문에 철창.
발루쉬카가 침대에 앉아 있다.
멍하게. 창밖을 본다. 하지만 보지 않는다.
"발루쉬카."
반응이 없다.
에스테르가 다가간다. 침대 옆에 앉는다.
"나네. 에스테르일세."
천천히 발루쉬카가 고개를 돌린다.
눈이 초점이 없다. 안개처럼.
"선생님...?"
"그래. 나야."
"고래를... 봤어요..."
"알고 있네."
"아름다웠어요... 그리고... 슬펐어요..."
"그래."
"왜... 우리는... 견딜 수 없었을까요...?"
에스테르가 대답하지 못한다.
뭐라 말할 수 있는가?
손을 잡는다. 발루쉬카의 손을.
차갑다. 떨린다.
"미안하네. 내가... 더 강했어야 했는데."
발루쉬카가 웃는다. 희미하게.
"아니에요... 선생님도... 인간이에요..."
"그것이 변명이 되는가?"
"변명이... 아니에요... 진실이에요..."
둘이 앉아 있다. 침묵 속에서.
창밖으로 눈이 내린다. 계속.
간호사가 문을 두드린다. "시간입니다."
에스테르가 일어선다.
"다시 올게."
"선생님..."
"응?"
"별들은... 아직... 질서 있게... 움직이나요...?"
에스테르가 미소 짓는다. 슬프게.
"그래. 여전히. 우리와 관계없이."
"그럼... 괜찮아요..."
에스테르가 나온다. 복도로.
건물을 나온다.
눈 속을 걷는다. 집으로.
집에 도착한다.
피아노 앞에 앉는다.
이번에는 연주한다.
무엇을? 바흐. 평균율 클라비어. 1권. C장조 프렐류드.
완벽한 조화. 순수한 질서.
거짓말이지만. 아름다운 거짓말.
손가락이 움직인다. 기계적으로.
하지만 눈물이 흐른다.
처음으로. 오랜만에.
"용서하시오. 우리가 실패했음을."
연주가 끝난다.
침묵.
그리고 다시 시작한다. 같은 곡.
반복한다. 계속. 밤새.
마치 주문처럼. 마치 기도처럼.
"질서여 돌아오소서. 조화여 돌아오소서."
하지만 돌아오지 않는다.
눈만 내린다. 끝없이.
모든 것을 묻으며.


크라스너호르커이가 우리에게 남긴 것

크라스너호르커이는 예언자이자 애도자다.
그는 문명의 붕괴를 본다. 질서가 환상임을. 이성이 얇은 껍질임을. 그 아래 혼돈이 기다리고 있음을.
하지만 크라스너호르커이가 진정으로 탐구하는 것은 우리가 그 혼돈을 왜 견딜 수 없는가다. 왜 설명할 수 없는 것(고래)이 오면 우리는 폭력으로 대응하는가.
당신에게 묻는다. 당신도 고래를 본 적이 있는가? 설명할 수 없는, 이해할 수 없는, 하지만 거기 있는 것을?

고래의 의미

고래는 무엇인가?
구체적으로는: 죽은 고래. 방부 처리된. 트럭에 실린. 전시용.
상징적으로는: 이질적인 것. 설명할 수 없는 것.
고래는 바다에 속한다. 마을에 속하지 않는다.
고래는 거대하다. 인간의 척도를 넘어선다.
고래는 죽었다. 하지만 존재한다. 물질로.
이것이 불안을 만든다.
"이것은 무엇인가? 왜 여기 있는가? 무엇을 의미하는가?"
대답이 없다. 고래는 침묵한다.
이 침묵이 견딜 수 없다.
인간은 의미를 원한다. 설명을 원한다. 질서를 원한다.
고래는 거부한다. 그냥 존재한다. 의미 없이.
그래서 폭력이 분출한다. "설명할 수 없으면 파괴한다."
칼 융(Carl Jung)이 말했다. "그림자(Shadow)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것은 운명이 된다."
고래는 그림자다. 집단 무의식의. 억압된 것. 원시적인 것.
받아들일 수 없다. 그래서 투사(projection)한다. 이방인들에게.
"이방인들이 문제다. 그들을 제거하면 고래도 사라질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고래가 아니었다. 우리 안의 무언가였다.
당신은? 당신의 "고래"는 무엇인가? 설명할 수 없어서 두려운 것은?

이방인과 파시즘

이방인들이 온다. 떠돌이들. 더럽고 이상하며 위협적인.
누구인가? 설명되지 않는다.
어디서 왔나? 왜 왔나? 모른다.
이것이 중요하다. 그들은 구체적이지 않다. 추상적이다.
그래서 투사하기 쉽다. 모든 두려움을. 모든 불안을.
"경제가 나쁘다 → 이방인 때문이다."
"범죄가 늘었다 → 이방인 때문이다."
"우리 삶이 불안하다 → 이방인 때문이다."
논리가 없다. 증거가 없다. 하지만 상관없다.
감정이 논리를 압도한다.
그리고 "왕자"가 있다. 보이지 않는 지도자.
아무도 그를 보지 못했다. 얼굴도 모른다. 목소리도 모른다.
하지만 믿는다. "그가 우리를 구할 것이다."
이것은 파시즘의 메커니즘이다.

  1. 불안과 혼돈
  2. 희생양 만들기 (이방인, 소수자, "타자")
  3. 보이지 않는 지도자 숭배
  4. 폭력의 정당화 ("그들을 제거해야 우리가 안전하다")
  5. 새로운 질서 ("우리가 구했다")

크라스너호르커이는 1989년에 이것을 썼다.
30년 후 전 세계에서 일어나고 있다.
트럼프, 오르반, 볼소나루, 르펜, AfD, 브렉시트.
"이민자가 문제다", "무슬림이 문제다", "엘리트가 문제다".
똑같은 메커니즘. 희생양. 강한 지도자. 폭력. "위대함의 회복".
크라스너호르커이는 예언자였나?
아니다. 역사는 반복될 뿐이다.
당신은? 당신 사회에도 "이방인"이 있는가? 모든 문제의 원인으로 지목되는?

티르게의 선의

티르게 부인은 악당인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그녀는 진심으로 믿는다. "질서를 회복해야 한다. 마을을 구해야 한다."
악의가 없다. 오히려 선의로 가득하다.
"우리는 선한 일을 하고 있다."
이것이 더 위험하다.
한나 아렌트가 말했다.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
나치 아이히만은 괴물이 아니었다. 평범한 관료였다. 규칙을 따랐다. 효율적으로 일했다. "나는 명령을 따랐을 뿐이다."
티르게도 그렇다. 규칙을 만든다. 위원회를 조직한다. 질서를 강요한다.
"불순한 요소를 제거해야 한다. 마을을 위해."
발루쉬카를 정신병원에 보낸다. "그는 아프다. 치료가 필요하다."
진심이다. 거짓말이 아니다.
하지만 결과는? 발루쉬카가 파괴된다.
선의가 악을 만든다. 질서의 이름으로.
20세기가 증명했다. 스탈린, 마오, 폴 포트.
"더 나은 세상을 위해." 수천만 명이 죽었다.
21세기도 마찬가지. "테러와의 전쟁", "국가 안보", "공공질서".
고문이 정당화된다. 감시가 정당화된다. 폭력이 정당화된다.
"우리는 선을 위해 일한다."
크라스너호르커이는 경고한다. 선의를 의심하라. 특히 조직된 선의를.
당신은? 당신도 "선"을 위해 타인을 억압한 적이 있는가? 혹은 억압당한 적은?

발루쉬카의 순수함

발루쉬카는 순수하다. 아이 같다.
세상을 경이로 본다. 별을, 고래를, 사람들을.
이것이 그의 비극이다.
순수함은 이 세상에서 생존할 수 없다.
에스테르가 말한다. "세상사에 관여하지 마라."
하지만 발루쉬카는 관여한다. 막으려 한다. "멈춰요! 왜 이러는 거예요!"
무력하다. 군중은 멈추지 않는다.
그래서 파괴된다. 정신적으로.
체제는 그를 "미쳤다"고 판단한다. 왜?
그가 진실을 보기 때문이다.
광기와 진실의 경계는 모호하다.
돈키호테는 미쳤는가? 풍차를 거인으로 본다.
아니다. 그는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지 않는다. 있어야 할 모습으로 본다.
이것이 광기인가? 아니면 예언인가?
발루쉬카도 그렇다. 고래를 "다른 세계에서 온 것"으로 본다.
미친 것인가? 아니다. 은유를 이해한 것이다.
하지만 은유를 문자 그대로 이해하는 사회에서 은유를 보는 자는 미친 사람이다.
푸코(Foucault)가 말했다. "광기는 이성이 정의한다."
발루쉬카는 광인이 아니다. 체제가 그를 광인으로 만든다. 편리하게.
"그는 이상하다. 이해할 수 없다. 따라서 위험하다. 격리해야 한다."
당신은? 당신도 너무 순수해서 고통받은 적이 있는가? "현실을 몰라서"라는 비난을 들은 적은?

에스테르의 도피

에스테르는 지식인이다. 음악학자. 교양 있다.
하지만 방에 틀어박힌다. 세상을 외면한다.
"나는 음악만 한다. 정치는 내 일이 아니다."
이것이 죄인가?
그렇다. 크라스너호르커이는 말한다.
침묵은 공범이다.
에스테르는 안다. 뭔가 잘못되고 있다는 것을.
발루쉬카가 경고한다. 하지만 듣지 않는다.
"신경 쓰지 마라. 네 일이나 해라."
그리고 재앙이 온다.
에스테르는 깨닫는다. 너무 늦게.
"내가 막을 수 있었을까?"
모르겠다. 아마도 아니다.
"하지만 시도라도 해야 했다."
이것은 20세기 지식인의 딜레마다.
독일의 지식인들. 나치가 권력을 잡을 때. 침묵했다.
"정치에 관여하지 말자. 학문에 집중하자."
결과는? 홀로코스트.
소련의 지식인들. 스탈린의 숙청. 침묵했다. 혹은 협조했다.
"나는 생존해야 한다."
오늘날도 마찬가지. 중국의 지식인들. 위구르 탄압. 홍콩 탄압. 침묵한다.
"내가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나?"
에스테르의 마지막 선택. 피아노를 친다. 바흐를.
"거짓말이지만 아름다운 거짓말."
이것은 항복인가? 저항인가?
둘 다일 수 있다. 예술은 마지막 저항이다. 무력하지만 필요한.
당신은? 당신도 외면한 적이 있는가? "내 일이 아니다"라고?

우주의 질서와 혼돈

베르크마이스터 조율법. 소설의 중심 은유.
17세기 안드레아스 베르크마이스터(Andreas Werckmeister)가 개발했다.
평균율(equal temperament)이 아니다.
각 반음의 간격이 조금씩 다르다. 불균등하다.
왜? 조화를 위해. 역설적으로.
어떤 조성은 순수하게 울린다. 어떤 조성은 긴장감 있게.
전체가 균형을 이룬다. 불완전하게. 하지만 아름답게.
에스테르의 이론:
"우주도 그렇다. 완벽한 질서가 아니다. 균열이 있다."
"행성들이 조화롭게 움직인다. 하지만 완벽하지 않다. 섭동(perturbation)이 있다."
"이 균열에서 혼돈이 새어나온다."
"우리 문명은 무엇인가? 균열을 막으려는 시도다."
"법, 도덕, 예술, 과학. 모두 조율이다. 혼돈을 질서로 만들려는."
"하지만 일시적이다. 균열은 커진다. 언젠가 무너진다."
이것은 엔트로피의 법칙이다. 열역학 제2법칙.
질서는 무질서로 향한다. 불가역적으로.
우주는 차갑고 균일해진다. "열 죽음(heat death)."
문명도 그렇다. 로마 제국, 중국 왕조, 소련.
흥망성쇠. 필연이다.
하지만 크라스너호르커이는 허무주의자가 아니다.
그는 묻는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조율하는가?"
에스테르의 대답: "아름다움 때문이다."
"거짓말인 줄 알면서도 바흐를 연주한다."
"무너질 줄 알면서도 질서를 만든다."
"이것이 인간이다."
당신은? 당신도 무너질 줄 알면서 무언가를 쌓는가? 왜?

폭력의 침묵

소설에서 가장 끔찍한 장면. 병원 습격.
군중이 노인 환자들을 때린다. 죽인다.
하지만 소리가 없다. 고함도, 웃음도 없다.
침묵 속에서. 기계적으로.
이것이 왜 더 무서운가?
감정이 없기 때문이다.
증오도 없다. 분노도 없다. 흥분도 없다.
그냥 일을 한다. 해야 할 일을.
"제거해야 할 것을 제거한다."
한나 아렌트가 아이히만 재판에서 본 것.
괴물이 아니었다. 평범한 사람이었다.
감정 없이. 효율적으로. "일"을 했다.
유대인을 수용소로 보냈다. 숫자로 다뤘다. "처리"했다.
이것이 진짜 악이다.
악마적 악이 아니다. 관료적 악이다.
시스템이 작동한다. 사람들은 부품이다.
개인의 책임은 희석된다. "나는 명령을 따랐을 뿐이다."
크라스너호르커이는 보여준다. 폭력이 얼마나 쉽게 일상화되는지.
"이것은 필요한 일이다. 질서를 위해."
누가 시작했는가? 누가 명령했는가? 불명확하다.
모두가 따랐을 뿐이다.
당신은? 당신도 "그냥 따랐을" 뿐인 일이 있는가? 돌이켜보면 끔찍한?

문장의 폭력

크라스너호르커이의 문장은 유명하다. 혹은 악명 높다.
길다. 한없이 길다.
한 문장이 한 페이지. 때로 두 페이지.
쉼표, 세미콜론, 대시. 하지만 마침표는 거의 없다.
숨 쉴 틈이 없다.
왜 이렇게 쓰는가?
독자를 압도하기 위해.
내용뿐 아니라 형식으로.
세상은 넘쳐흐른다. 의미로, 혼돈으로, 공포로.
정리할 수 없다. 마침표를 찍을 수 없다.
그냥 계속된다. 끝없이.
호흡이 막힌다. 독자는 허우적댄다.
이것이 의도다.
편안하게 읽히면 안 된다. 안전한 거리가 있으면 안 된다.
독자는 끌려 들어가야 한다. 혼돈 속으로.
벨라 타르의 영화도 그렇다. 긴 테이크. 10분, 15분.
편집하지 않는다. 잘라내지 않는다.
실시간으로 경험한다. 인물과 함께.
불편하다. 지루하다. 견디기 힘들다.
이것이 의도다.
예술은 위로가 아니다. 도전이다.
"이것을 견딜 수 있는가?"
당신은? 크라스너호르커이를 읽는 것이 고통스러운가? 그것이 정상이다. 그것이 의도다.


마지막 질문들

크라스너호르커이는 우리에게 가장 어두운 비전을 제시한다. 문명은 환상이다. 질서는 깨지기 쉽다. 혼돈은 언제나 돌아온다.
그는 위로하지 않는다. 희망을 주지 않는다. 해결책을 제시하지 않는다.
대신 직시하라고 한다. 외면하지 말라고.
『저항의 우울』은 35년이 지났다. 하지만 여전히 현재형이다. 어쩌면 더 현재형이다.
세계는 더 불안해졌다. 기후 위기, 팬데믹, 전쟁, 이민 위기, 민주주의의 후퇴.
고래는 계속 온다. 다른 형태로.
우리는 여전히 견디지 못한다. 설명할 수 없는 것을.
여전히 폭력으로 대응한다. 이방인을 찾는다. 희생양을 만든다.
그리고 "질서"를 외친다. 강한 지도자를. 단순한 해답을.
푸귀는 여전히 희생당한다. 순수한 사람들이.
에스테르는 여전히 침묵한다. 지식인들이.
티르게는 여전히 "선"을 행한다. 악을 만들며.
당신의 "고래"는 무엇인가? 설명할 수 없어서, 통제할 수 없어서 두려운 것은?
당신은 어떻게 반응하는가? 경이로? 폭력으로? 외면으로?
당신 사회의 "이방인"은 누구인가? 모든 문제의 원인으로 지목되는 사람들은?
당신도 "질서"를 원하는가? 혼돈보다? 어떤 대가를 치러서라도?
당신은 티르게인가? 에스테르인가? 발루쉬카인가? 선의의 행동가? 침묵하는 지식인? 순수한 희생자?
당신도 견딜 수 없는 것이 있는가? 너무 이질적인? 너무 불안한?
조율이 실패할 때 당신은 어떻게 하는가? 더 열심히 조율하는가? 포기하는가? 혼돈을 받아들이는가?
당신은 마지막에 무엇을 연주할 것인가? 에스테르처럼 바흐를? 거짓말인 줄 알면서?
저항의 우울을 느끼는가? 저항하고 싶지만 무력하다는 것을? 슬프지만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을?
고래가 떠난 후 무엇이 남는가? 혼돈? 새로운 질서? 아니면 또 다른 고래를 기다림?
고래는 떠났다. 군대가 끌고 갔다.
하지만 고래가 남긴 것은 사라지지 않는다.
균열. 깊고 치유할 수 없는.
마을은 다시 질서를 갖췄다. 표면적으로.
거리가 깨끗해졌다. 통행금지가 풀렸다. 가게들이 문을 열었다.
"정상으로 돌아왔다."
정말?
병원에서 죽은 노인들은? 잊혔다.
발루쉬카는? 정신병원에 갇혔다.
이방인들은? 어디론가 끌려갔다. 아무도 묻지 않는다.
"위원회"가 권력을 잡았다. 티르게와 그녀의 사람들.
"새로운 질서. 강한 질서."
하지만 이것은 해방인가? 아니면 또 다른 억압인가?
크라스너호르커이는 대답하지 않는다. 열린 결말.
하지만 암시한다. 순환이 계속될 것이라고.
혼돈 → 폭력 → 새 질서 → 억압 → 혼돈...
끝이 없다.
왜? 인간의 본성이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여전히 의미를 원한다. 설명을 원한다. 통제를 원한다.
그리고 얻을 수 없을 때 파괴한다.

예술가의 책임

크라스너호르커이는 무엇을 하는가? 작가로서?
증언한다. 경고한다. 직시하게 한다.
하지만 해결책은 제시하지 않는다.
"그것은 내 일이 아니다."
예술가의 일은 답을 주는 것이 아니다.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불편하게 만드는 것이다. 안전한 거리를 없애는 것이다.
"이것을 보라. 외면하지 마라."
에스테르가 바흐를 연주하듯이.
크라스너호르커이는 소설을 쓴다.
"거짓말이지만 아름다운."
아니다. 거짓말이 아니다. 진실이다. 불편한 진실.
하지만 아름답다. 문장이. 이미지가. 구조가.
이것이 역설이다.
가장 어두운 비전을 가장 아름답게 표현한다.
왜? 그래야 사람들이 읽기 때문이다. 견디기 때문이다.
순수한 공포는 외면된다. 너무 고통스러워서.
하지만 예술로 승화된 공포는 직시할 수 있다.
이것이 비극의 힘이다. 그리스 비극부터.
아리스토텔레스: 카타르시스(catharsis). 공포와 연민을 통한 정화.
끔찍한 것을 본다. 하지만 무대 위에서. 안전한 거리에서.
그래서 견딜 수 있다. 이해할 수 있다. 배울 수 있다.
크라스너호르커이도 그렇다.
『저항의 우울』은 비극이다. 현대의 비극.
우리는 읽는다. 고통스럽지만.
그리고 깨닫는다. "이것은 우리의 이야기다."

읽기의 저항

『저항의 우울』을 읽는 것 자체가 저항이다.
쉽지 않다. 긴 문장. 어두운 내용. 느린 전개.
포기하고 싶다. 자주.
하지만 계속 읽는다면 그것이 저항이다.
무엇에 대한?
속도에 대한 저항: 현대 사회는 빠르다. 짧은 영상. 요약. 스크롤.
크라스너호르커이는 느리다. 의도적으로. 느리게 읽어야 한다.
단순함에 대한 저항: 우리는 단순한 답을 원한다. "5가지 해결책", "이것만 기억하세요."
크라스너호르커이는 복잡하다. 답이 없다. 혼란스럽다.
위로에 대한 저항: 우리는 희망을 원한다. "다 괜찮아질 거야."
크라스너호르커이는 위로하지 않는다. "괜찮아지지 않을 수 있다."
오락에 대한 저항: 우리는 즐기고 싶다. 스트레스를 풀고 싶다.
크라스너호르커이는 스트레스를 준다. 불편하게 한다.
그럼에도 읽는 것. 이것이 저항이다.
왜 읽는가?
진실을 원해서. 쉬운 진실이 아니라 어려운 진실을.
단련되고 싶어서. 편안함에 안주하지 않으려고.
증인이 되고 싶어서. "나는 봤다. 알았다. 잊지 않겠다."
당신은? 끝까지 읽었는가? 포기하고 싶었는가? 왜 계속했는가?

노벨상의 의미

2024년 노벨 문학상. 크라스너호르커이.
놀라운 일이다. 그를 아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어렵다. 우울하다. 번역도 어렵다.
하지만 스웨덴 한림원이 선택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문학의 책임: 위로만이 아니라 도전도. 즐거움만이 아니라 불편함도.
시대의 진단: 2024년. 세계는 불안하다. 전쟁, 기후, 민주주의 위기.
크라스너호르커이의 비전이 더 현재적이다.
예술의 가치: 대중성이 전부가 아니다. 팔리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어렵지만 중요한 예술도 인정받아야 한다.
헝가리의 목소리: 오르반 정권. 권위주의. 언론 탄압.
크라스너호르커이는 망명하지 않았다. 하지만 타협하지도 않았다.
노벨상은 그를 보호한다. 어느 정도.
비평가들이 말했다. "올해의 가장 중요한 선택."
독자들은? 책을 사기 시작했다. 전 세계에서.
읽을 것인가? 끝까지? 그것이 문제다.
노벨상이 독자를 만들지는 않는다. 기회를 줄 뿐이다.
당신은? 이 기회를 잡을 것인가?

희망은 어디에

『저항의 우울』에 희망이 있는가?
거의 없다. 솔직히.
모든 것이 무너진다. 순수한 사람이 파괴된다. 악이 승리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작은 것들이 있다.
발루쉬카의 경이: 고래를 보며 느끼는 경이. 파괴당하기 전까지.
에스테르의 음악: 무의미하다고 느끼면서도 계속 연주한다.
간호사의 연민: 규정을 어기고 에스테르를 병실로 안내한다.
: 계속 내린다. 모든 것을 덮는다. 중립적으로.
이것들이 희망인가?
크라스너호르커이는 말하지 않는다.
하지만 제시한다. 가능성으로.
경이를 잃지 마라: 설명할 수 없는 것 앞에서 폭력이 아니라 경이를 느낄 수 있다면.
아름다움을 만들어라: 무의미해 보여도. 거짓말 같아도. 계속 만들어라.
작은 연민을 잃지 마라: 큰 변화는 못 만들어도. 한 사람에게 친절할 수 있다.
자연은 계속된다: 인간의 광기와 무관하게. 눈은 내린다. 별은 돈다.
이것으로 충분한가?
아니다. 충분하지 않다.
하지만 이것이 전부다.
더 큰 희망을 원하는가? 크라스너호르커이는 주지 않는다.
"거짓 희망은 절망보다 위험하다."
대신 말한다. "견뎌라. 저항하라. 비록 우울할지라도."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책을 덮는다. 『저항의 우울』.
무겁다. 가슴이.
이제 무엇을 할 것인가?
잊을 것인가? 일상으로 돌아갈 것인가? "그냥 소설이었다"라고?
쉽다. 그리고 이해할 만하다.
하지만 크라스너호르커이가 원하는 것이 아니다.
기억할 것인가? 이 불편함을. 이 불안을.
"고래는 언제든 올 수 있다. 우리는 언제든 폭력을 선택할 수 있다."
경계할 것인가? 자신을. 사회를.
행동할 것인가? 무엇을? 어떻게?
명확하지 않다. 크라스너호르커이는 지침을 주지 않는다.
하지만 힌트가 있다:

  • 이질적인 것을 견뎌라. 파괴하지 마라.
  • 단순한 답을 의심하라. 특히 "그들이 문제다"라는.
  • 침묵하지 마라. 에스테르처럼. 늦기 전에.
  • 순수함을 지켜라. 발루쉬카처럼. 비록 대가를 치러도.
  • 아름다움을 만들어라. 무의미해 보여도. 바흐를 연주하라.

충분한가? 아니다.
하지만 시작이다.
크라스너호르커이는 말한다. 소설로. 긴 문장으로. 고통스럽게.
"이것을 봤다. 이제 너희 차례다."
우리는 무엇을 볼 것인가? 무엇을 할 것인가?
답은 우리에게 있다. 각자에게.
고래가 온다. 계속. 다른 형태로.
우리는 어떻게 맞이할 것인가?
경이로? 폭력으로? 외면으로?
이것이 우리 시대의 질문이다.
크라스너호르커이가 던진. 대답하지 않은.
우리가 대답해야 한다. 삶으로. 선택으로.
당신의 대답은 무엇인가?


눈이 내린다. 여전히. 끝없이.
어딘가에서 발루쉬카가 창밖을 본다. 초점 없는 눈으로.
"별들은... 아직... 질서 있게... 움직이나요...?"
어딘가에서 에스테르가 피아노를 친다. 바흐를. 반복해서.
"용서하시오. 우리가 실패했음을."
어딘가에서 티르게가 회의를 주재한다. "새로운 질서"를 만들며.
어딘가에서 고래가 있다. 어두운 창고에. 혼자. 침묵하며.
어딘가에서 다른 고래가 온다. 다른 마을로. 다른 형태로.
그리고 모든 것이 다시 시작된다.
저항의 우울.
우울하지만 저항한다.
포기하지 않는다.
이것이 크라스너호르커이가 남긴 것이다.
어두운 비전. 하지만 아름다운 문장.
절망적 내용. 하지만 예술의 존엄.
"거짓말이지만 아름다운."
아니다. 진실이다. 고통스럽지만.
진실은 아름답다. 항상 그런 것은 아니지만. 필요하기에.
우리는 읽었다. 견뎠다. 끝까지.
이제 우리도 증인이다.
그리고 증인은 책임이 있다.
전하는 것. 기억하는 것. 행동하는 것.
"나는 봤다. 고래를. 폭력을. 침묵을. 파괴를."
"그리고 나는 증언한다."
"다시는. 다시는."
하지만 안다. 다시 일어날 것을.
그래도 말한다. "다시는."
이것이 저항이다.
우울하지만.
필요하기에.
인간이기에.
당신도 증인이 되었다.
무엇을 할 것인가?
고래가 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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