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역사/두 개의 독일, 하나의 역사

EP.25 · 발로 하는 투표 : 동독을 탈출하는 사람들

by 책으로떠나는여행 2026. 6. 22.

두 개의 독일, 하나의 역사

EP.25 · 발로 하는 투표 : 동독을 탈출하는 사람들


1956년 봄, 동베를린 프리드리히샤인 구역.

외과의사 클라우스 베르너는 저녁 식사를 마치고 서재에 앉았습니다. 책상 위에는 두 개의 편지 봉투가 놓여 있었습니다. 하나는 동독 보건부에서 온 것이었습니다. 그가 지원한 병원장 자리가 당 충성도 심사에서 부적격 판정을 받았다는 통보였습니다. 그는 당원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이 이유였습니다.

다른 하나는 서베를린 의과대학에서 온 것이었습니다. 외과 과장 자리를 제안하는 편지였습니다. 급여는 동독에서 받던 것의 세 배가 넘었습니다.

클라우스는 두 봉투를 한참 바라보다가 일어섰습니다. 침실로 가서 아내를 깨웠습니다. "짐을 싸자. 내일 아침 일찍 떠나야 해."

그들은 여행 가방 두 개에 필수품만 챙겼습니다. 가구도, 책도, 졸업 앨범도 두고 갔습니다. 다음 날 아침 S-반을 타고 서베를린으로 넘어갔습니다. 클라우스가 동독을 떠난 이유는 간단했습니다. 일한 만큼 인정받지 못하는 나라에서는 살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동독에서는 그를 '공화국 도주자'라 불렀습니다. 범죄자였습니다.


1960년대 베르나워 거리 주택을 통해 탈출하는 [출처:중앙일보]

탈출의 규모

동독 탈출의 역사는 동독 건국과 함께 시작되었습니다.

1949년 동독이 수립된 직후부터 서독으로의 이주가 시작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소수였습니다. 그러나 집단화가 시작되고, 정치적 억압이 강화되면서 숫자가 늘어갔습니다. 1952년 동서독 국경에 철조망이 처음 쳐지자 탈출이 더욱 위험해졌습니다. 그러나 베를린은 아직 열려 있었습니다.

연도별 탈출 인원을 보면 이 역사의 흐름이 보입니다.

1949년 약 13만 명. 1950년 약 20만 명. 1951년 약 17만 명. 1952년 약 18만 명. 1953년 봉기가 일어난 해에는 약 33만 명. 봉기 진압 이후 잠시 줄었다가 다시 늘었습니다. 1955년 약 25만 명. 1956년 약 28만 명. 1957년 약 26만 명. 1960년 약 20만 명.

1961년 장벽이 세워지기 전까지 동독을 떠난 사람들의 총수는 약 270만 명에 달했습니다. 동독 전체 인구의 약 15%였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이주가 아니었습니다. 체제를 향한 집단적 불신임이었습니다.


‘베를린 장벽 설치 이후’ 서독, 1962

베를린이라는 구멍

동독 당국이 1952년 동서독 국경에 철조망을 치고 지뢰밭을 만들었지만, 막을 수 없는 구멍이 있었습니다. 베를린이었습니다.

베를린은 4개국 공동 관리 도시였습니다. 동베를린과 서베를린 사이에는 공식적인 국경 통제가 없었습니다. S-반(지상 전철)과 U-반(지하철)이 동서를 자유롭게 오갔습니다. 걸어서 넘어갈 수도 있었습니다.

탈출의 경로는 단순했습니다. 동베를린에서 U-반을 탑니다. 서베를린 역에서 내립니다. 서베를린 당국에 난민 등록을 합니다. 서독행 비행기나 기차를 기다립니다. 그것으로 끝이었습니다.

물론 감시가 있었습니다. 동독 슈타지 요원들이 역과 거리를 감시했습니다. 큰 짐을 들고 가면 의심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탈출자들은 가방 하나, 혹은 빈손으로 갔습니다. 마치 출근하는 것처럼, 마치 쇼핑하러 가는 것처럼 역으로 걸어 들어갔습니다.

베를린이 열려 있는 한, 막을 수 없었습니다.


베를린 장벽을 쌓고 있는 모습이다. 떨떠름한 표정을 짓고 있는  서독 의  경찰 과, 미소를 짓고 있는  동독   국경수비대 원이 미묘하게 비교된다.

누가 떠났나

탈출자들의 구성을 들여다보면, 동독 지도부를 가장 공포스럽게 만든 패턴이 보입니다.

떠나는 사람들은 무작위가 아니었습니다. 의사, 치과의사, 엔지니어, 과학자, 교수, 변호사, 건축가, 교사. 고등 교육을 받은 전문직 종사자들이 비율을 훨씬 넘어 탈출했습니다.

1960년 한 해 동안 동독을 떠난 의사의 수는 약 800명이었습니다. 엔지니어와 기술자는 수천 명이었습니다. 교사는 1만 명을 넘겼습니다.

동독은 이들을 교육시키는 데 엄청난 자원을 투자했습니다. 의대 교육에 드는 비용, 공학 교육에 드는 비용. 동독 국가가 부담한 그 비용이 서독 경제를 위한 투자가 되고 있었습니다. 서독이 빨대를 꽂아 동독의 인재를 빨아들이고 있다는 동독 당국의 주장에는, 사실적 측면이 있었습니다.

왜 전문직이 더 많이 떠났을까요. 동독 체제에서 전문 능력보다 당 충성도가 더 중요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아무리 뛰어난 의사도 당원이 아니면 병원장이 될 수 없었습니다. 아무리 탁월한 엔지니어도 당의 노선에 의문을 품으면 승진이 막혔습니다. 능력이 보상받지 못하는 사회에서 능력 있는 사람들이 먼저 떠나는 것은 당연했습니다.


탈출자들의 이야기

기록으로 남아 있는 탈출자들의 증언들은 각자 다른 이유를 말하지만, 공통된 주제를 담고 있습니다.

드레스덴 출신의 엔지니어 게르하르트 K는 이렇게 회고했습니다. "저는 공산주의에 반대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내가 설계한 다리가 실제로 지어지는 것이 보고 싶었습니다. 동독에서는 모든 결정이 위에서 내려왔습니다. 내 전문성이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시키는 대로 도면을 그리는 사람이었습니다."

라이프치히 출신의 교사 일제 M의 증언은 다릅니다. "수업에서 가르쳐야 할 내용이 매년 달라졌습니다. 어제의 영웅이 오늘의 악당이 되었습니다. 역사가 계속 고쳐 쓰였습니다. 아이들에게 거짓을 가르치는 것이 더 이상 견딜 수 없었습니다."

예나 출신의 화학자 마르틴 F는 더 단순했습니다. "서독에서 내가 하는 연구를 계속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동독에서는 소련의 허락 없이는 특정 실험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선택은 어렵지 않았습니다."


제2차 세계 대전으로 1,200만 명이 넘는 독일인, 그중 상당수는 어린이들이 국제적으로 난민이 되었습니다.

가족이 갈라지다

탈출이 개인의 결정일 때, 가족이 갈라지는 비극이 생겨났습니다.

부부 중 한 명은 가고 싶고, 한 명은 남고 싶을 때. 자식은 가려 하는데 부모는 늙어서 갈 수 없을 때. 형제 중 하나가 먼저 건너가고 나머지가 남겨질 때.

당국은 이것을 이용했습니다. 동독을 탈출한 사람의 가족들이 보복을 받았습니다. 직장에서 불이익을 받거나, 자녀가 대학 진학에서 차별받았습니다. 이 사실이 알려지면서 많은 사람들이 탈출을 망설였습니다. 내가 떠나면 남겨진 가족이 피해를 본다는 것이 족쇄가 되었습니다.

베를린 장벽이 세워진 1961년 8월 13일 새벽, 가족이 갈라진 사례들이 쏟아졌습니다. 전날 밤 서베를린에 출장 간 남편이 돌아오지 못하게 된 아내. 여름휴가로 서독에 갔다가 발이 묶인 자녀들. 한 가족이 동과 서로 나뉜 채 28년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동독 당국의 대응

탈출이 계속되면서 동독 당국은 다양한 방법으로 막으려 했습니다.

출국 허가제. 동독을 합법적으로 떠나려면 당국의 허가가 필요했습니다. 허가 기준은 불명확했고 자의적이었습니다. 노인이나 연금 수급자는 비교적 쉽게 허가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어차피 노인들은 서독의 사회보장 비용이 되기 때문이었습니다. 젊은이들, 특히 전문직 종사자들에게는 허가가 잘 나오지 않았습니다.

선전. 서독으로 간 사람들이 얼마나 비참하게 사는지를 선전했습니다. 실업자가 되고, 착취당하고, 고통받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서독에 간 사람들의 편지가 동독으로 오면, 그 선전은 무너졌습니다. 잘 살고 있다는 편지였으니까요.

처벌. '공화국 도주(Republikflucht)'는 공식적으로 범죄였습니다. 탈출을 시도하다 잡히면 체포되고 재판을 받았습니다. 형량은 1년에서 3년 사이였습니다. 이미 탈출에 성공한 사람의 재산은 몰수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조치에도 불구하고 탈출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1961년의 가속

1961년 들어 탈출 속도가 폭발적으로 빨라졌습니다.

이유가 있었습니다. 베를린 봉쇄에 대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습니다. 소련과 동독이 베를린을 완전히 차단할 것이라는 이야기였습니다. 그 소문은 탈출을 서두르게 만들었습니다.

1961년 1월 탈출자 수 1만 6,000명. 2월 1만 7,000명. 6월 1만 9,000명. 그리고 7월에는 3만 명을 넘겼습니다. 매일 1,000명 이상이 동독을 떠나고 있었습니다.

8월 첫 주에는 하루 2,000명을 넘겼습니다.

울브리히트는 흐루쇼프에게 호소했습니다. 막아야 합니다. 이대로 가면 6개월도 버티기 어렵습니다. 동독 경제를 운영할 사람이 없어집니다.

흐루쇼프가 결단을 내렸습니다.

1961년 8월 12일 토요일 저녁, 동독 지도부가 최종 명령을 받았습니다. 내일 새벽 베를린을 봉쇄한다.


투표의 의미

정치학자들은 사람들이 불만을 표현하는 방식을 두 가지로 나눕니다. '목소리(Voice)'와 '탈출(Exit)'.

목소리는 시위하고, 투표하고, 저항하는 것입니다. 탈출은 그냥 떠나는 것입니다.

동독 주민들에게 목소리는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시위는 탱크로 진압되었습니다. 자유 선거는 없었습니다. 저항은 감옥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래서 떠났습니다. 발로 투표했습니다.

그 투표의 결과가 너무 명확했기 때문에, 동독 당국은 투표함을 없애버려야 했습니다. 베를린 장벽이 그 투표함이었습니다.

장벽을 세운다는 것은 인정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체제는 자유 경쟁에서 이길 수 없다는 것을. 문을 열어두면 사람들이 다 떠난다는 것을. 그래서 가두어야 한다는 것을.

역사상 자국민을 가두기 위해 장벽을 세운 국가는 많지 않습니다. 동독이 그것을 했습니다.

270만 명의 발걸음이 그 장벽을 만들었습니다.


📌 다음 화 예고 EP.26 · 슈타지 : 동독이 만든 감시 국가 동독을 떠나지 못한 사람들, 혹은 떠나지 않기로 한 사람들은 어떤 세상에서 살았을까요. 이웃이 이웃을 감시하고, 친구가 친구를 밀고하고, 때로는 부부가 서로를 보고하는 세상. 슈타지가 만든 공포의 일상은 어떤 것이었는지, 그리고 그 방대한 기록들이 통일 후 독일 사회에 어떤 충격을 주었는지, 다음 화에서 이어집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