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2년, 무솔리니가 직접 썼습니다.
『파시즘의 교리(La Dottrina del Fascismo)』.
첫 문장이 있었습니다.
"파시즘에게 세계는 물질의 문제가 아니다. 정신의 문제다."
그가 계속 썼습니다. "국가 안에서 개인이 존재한다. 국가 밖에서 개인은 존재하지 않는다."
무솔리니가 이것을 쓸 때 그는 이미 10년간 이탈리아를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독재자였습니다. 그러나 히틀러와 달리 전쟁을 아직 일으키지 않았습니다. 유럽 지도자들이 그를 아직 상대할 만한 인물로 보았습니다.
처칠이 1927년 무솔리니에 대해 말했습니다. "만약 내가 이탈리아인이라면 처음부터 끝까지 파시즘과 함께했을 것이다."
루스벨트가 그를 "이탈리아의 경이로운 인물"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들이 왜 이렇게 생각했을까요. 무솔리니의 이탈리아가 어떤 모습이었기에.
그리고 그 모습의 이면에 무엇이 있었을까요.
마이클 만은 무솔리니의 이탈리아를 파시즘의 원형이면서 동시에 파시즘의 한계를 보여준 사례로 봅니다. 히틀러가 파시즘을 극단으로 밀어붙이기 전에, 파시즘이 무엇인지를 가장 먼저 보여준 실험실이었습니다. 그 실험실의 성공과 실패를 이해하는 것이 파시즘 전체를 이해하는 열쇠입니다.
1장. 무솔리니라는 인물 : 파시즘을 만든 자
베니토 무솔리니(1883~1945년).
그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이해해야 파시즘의 원형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념적 편력이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사회주의자였습니다. 무솔리니가 사회주의 운동에 투신했습니다. 뛰어난 선동가였습니다. 이탈리아 사회당 기관지 편집장까지 올랐습니다.
1차 세계대전이 그를 바꾸었습니다. 사회당이 반전 입장을 고수할 때 무솔리니가 참전을 주장했습니다. 제명되었습니다. 전쟁에 참전했습니다. 부상을 입었습니다.
전후에 그가 결론을 내렸습니다. 계급보다 민족이 더 강한 힘이다. 전쟁이 이것을 증명했다. 노동자들이 계급 동지들과 연대하는 대신 조국을 위해 싸웠다.
연기자이자 조작자였습니다. 무솔리니가 뛰어난 배우였습니다. 턱을 치켜들고 팔짱을 끼고 아래를 내려다보는 자세. 군중 앞에서 표정을 조절하는 능력. 언론을 다루는 기술. 이것들이 그의 핵심 능력이었습니다.
동시에 그가 이념보다 권력에 더 관심이 있었습니다. 나치즘과 달리 이탈리아 파시즘이 체계적 인종주의를 처음부터 갖지 않았습니다. 무솔리니가 필요에 따라 이념을 바꿨습니다.
기회주의자였습니다. 그는 상황을 읽고 적응했습니다. 로마 진군 때 기차를 탔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전선에 직접 나서지 않고 뒤에서 따라갔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이것을 영웅적 행군으로 서술했습니다.
마이클 만은 무솔리니를 이념가이기보다 권력 조작자로 봅니다. 그가 파시즘을 만든 것이 아니라 파시즘이라는 에너지를 이용하여 권력을 잡았습니다. 그 차이가 중요합니다.

2장. 이탈리아의 조건 : 왜 파시즘이 이탈리아에서 먼저 등장했나
파시즘이 왜 하필 이탈리아에서 먼저 나타났을까요.
이탈리아의 특수한 조건들이 있었습니다.
훼손된 승리(Vittoria Mutilata)였습니다. 이탈리아가 1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국 편에서 싸웠습니다. 전쟁 전 영토 약속을 받았습니다. 달마티아 해안, 피우메, 아드리아해 지배권.
그러나 베르사유에서 약속이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윌슨이 민족자결 원칙으로 이탈리아의 요구를 거부했습니다.
이탈리아 민족주의자들이 분노했습니다. 전쟁에서 이겼는데 외교에서 졌다는 것이었습니다. 68만 명이 전사했습니다. 그것이 이 정도 결과뿐이었습니까.
이 분노가 파시즘의 감정적 연료가 되었습니다.
사회주의 운동의 급성장이었습니다. 전후 이탈리아에서 사회주의 운동이 폭발했습니다. 1919~1920년 **붉은 2년(Biennio Rosso)**이었습니다. 북부 공장들이 점거되었습니다. 농촌에서 소작농들이 땅을 요구했습니다. 파업이 쏟아졌습니다.
지주, 산업가, 중간 계층이 공산주의 혁명을 두려워했습니다. 기존 정부가 이것을 막을 능력이 없어 보였습니다.
약한 자유주의 국가였습니다. 이탈리아가 1861년 통일했지만 여전히 취약했습니다. 남북 격차가 심했습니다. 민족 정체성이 강하지 않았습니다. 의회 정치가 부패하고 파벌적이었습니다.
이 조건들이 결합했습니다. 민족적 굴욕. 사회주의 위협. 무능한 정부. 그 공간에서 무솔리니가 움직였습니다.
마이클 만은 이탈리아의 조건을 파시즘이 자랄 최적의 토양으로 봅니다. 강한 민족주의적 원망, 공산주의 위협, 약한 민주주의 전통. 이 세 요소가 이탈리아에서 먼저 결합했습니다.

3장. 검은 셔츠대와 거리 폭력 : 권력의 실질적 기반
무솔리니가 어떻게 권력을 잡았을까요. 선거만으로는 설명이 안 됩니다.
검은 셔츠대(Blackshirts, 국가보안의용대)가 핵심이었습니다.
1919년부터 파시스트 행동대(squadrismo)가 지방에서 활동했습니다. 주로 귀환 병사들로 구성되었습니다. 트럭을 타고 이동하며 사회주의자, 노동조합, 협동조합 사무실을 공격했습니다.
이 폭력이 체계적이었습니다.
도착. 사무실에 기름을 붓고 불을 지릅니다. 지도자들을 폭행합니다. 피마자기름을 강제로 먹입니다. 굴욕과 공포를 심습니다. 다음 마을로 이동합니다.
누가 이것을 허용했을까요.
지역 지주들과 산업가들이 자금을 댔습니다. 경찰이 눈을 감았습니다. 군 장교들이 무기를 제공했습니다. 지역 판사들이 기소를 하지 않았습니다.
파시즘이 아래로부터 올라왔지만 위에서 받아들여졌습니다. 지배 계급이 파시즘을 공산주의에 맞서는 무기로 선택했습니다.
효과가 있었습니다. 1921년 말 이탈리아 북부와 중부에서 노동조합이 사실상 파괴되었습니다. 사회주의 운동이 위축되었습니다. 농촌에서 소작농 운동이 억압되었습니다.
마이클 만은 검은 셔츠대를 군사 권력이 이념 권력의 명분과 경제 권력의 자금 지원을 받아 정치 권력을 장악하는 도구로 봅니다. 세 권력이 하나로 연결되었습니다. 그 연결이 파시즘의 실질적 기반이었습니다.

4장. 로마 진군 : 합법적 쿠데타의 기술
1922년 10월, 무솔리니가 도박을 했습니다.
파시스트 민병대 약 3만 명이 로마를 향해 진군했습니다. 정부를 압박하는 시위였습니다. 동시에 쿠데타의 위협이었습니다.
이탈리아 국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가 결정해야 했습니다. 군대를 동원하여 진군을 막을 것인가. 아니면 무솔리니에게 총리직을 줄 것인가.
팟치 총리가 계엄령 선포를 요청했습니다. 군이 파시스트 민병대를 충분히 막을 수 있었습니다. 국왕이 거부했습니다.
10월 29일, 국왕이 무솔리니를 총리로 임명했습니다.
무솔리니가 밀라노에서 기차를 타고 로마로 왔습니다. 자신의 민병대가 행진하는 동안 침대칸에서 잠을 잤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나중에 이것을 로마 진군의 영웅적 이야기로 탈바꿈시켰습니다.
왜 국왕이 굴복했을까요.
군부의 충성이 불확실했습니다. 전쟁 이후 군 내부에 파시즘 동조자가 많았습니다. 실제로 군대가 파시스트를 막을지 확신할 수 없었습니다.
대안이 없어 보였습니다. 기존 자유주의 정치인들이 위기를 해결할 능력이 없었습니다. 사회주의자들은 너무 위협적이었습니다. 무솔리니가 통제 가능한 최선처럼 보였습니다.
계급적 두려움이었습니다. 귀족과 지주들이 공산주의를 더 두려워했습니다. 무솔리니가 그 두려움을 막아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마이클 만은 로마 진군을 폭력의 위협이 실제 폭력 없이 권력을 이전시킨 사례로 봅니다. 무솔리니가 실제로 쿠데타를 일으키지 않았습니다. 쿠데타의 위협이 기존 지배 계급을 굴복시켰습니다.

5장. 파시스트 국가 건설 : 단계적 권력 독점
무솔리니가 총리가 된 후 즉각 독재를 선언하지 않았습니다.
단계적으로 권력을 독점했습니다.
1922~1924년, 연립 정부 단계였습니다. 처음에 파시스트가 연립 정부를 이끌었습니다. 다른 정당들이 내각에 참여했습니다. 무솔리니가 합법적인 총리처럼 행동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선거법을 바꾸었습니다. 1924년 선거에서 제1당이 되면 의석의 3분의 2를 가져가는 법이었습니다. 파시스트당이 압도적 다수를 얻었습니다. 폭력과 위협 속에서 치러진 선거였습니다.
마테오티 사건(1924년)이었습니다. 사회주의 의원 자코모 마테오티가 선거 부정을 폭로했습니다. 파시스트 깡패들이 그를 납치하여 살해했습니다.
이탈리아가 충격을 받았습니다. 야당 의원들이 의회를 보이콧했습니다. 무솔리니가 위기에 몰렸습니다.
그러나 국왕이 다시 행동하지 않았습니다. 군부가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야당이 분열되었습니다. 무솔리니가 살아남았습니다.
1925년 1월 무솔리니가 의회 연설에서 도전적으로 선언했습니다. "모든 책임이 나에게 있다. 이탈리아가 파시즘을 원한다면 그 결과도 받아들여라."
이것이 노골적 독재의 시작이었습니다.
1925~1928년, 독재 완성 단계였습니다. 야당 정당들이 금지되었습니다. 독립 언론이 폐쇄되었습니다. 노동조합이 파시스트 조합으로 대체되었습니다. 지방 선출직이 임명직으로 바뀌었습니다. 비밀경찰(OVRA)이 설립되었습니다.
마이클 만은 이 과정을 파시즘이 민주주의 제도를 단계적으로 해체한 방식으로 봅니다. 한꺼번에 모든 것을 파괴하지 않았습니다. 점진적으로. 각 단계에서 저항이 조직화되기 전에 다음 단계로 나아갔습니다.

6장. 코포라티즘의 현실 : 이념과 실제의 간극
54화에서 코포라티즘의 이념을 살펴보았습니다. 이제 그것이 이탈리아에서 어떻게 실제로 작동했는지를 봅니다.
공식 구조였습니다. 이탈리아 경제가 22개 코포라치오네(직업별 조합)로 조직되었습니다. 각 조합에 사용자 대표와 노동자 대표가 있었습니다. 국가가 중재했습니다. 이것이 계급 조화의 이탈리아 모델이었습니다.
무솔리니가 이것을 자랑스럽게 선전했습니다.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를 모두 극복한 제3의 길이라고.
실제 작동이었습니다. 독립 노동조합이 파괴된 후 노동자들의 협상력이 없었습니다. 코포라티즘 구조 안에서 노동자들이 명목상 대표를 가졌지만 실질적 협상력이 없었습니다.
임금이 1930년대에 실질적으로 삭감되었습니다. 노동시간이 늘었습니다. 노동 조건이 악화되었습니다. 그러나 파업이 불법이었습니다. 저항할 수단이 없었습니다.
자본가들에게 코포라티즘이 유리했습니다. 국가가 노동 통제를 대신 해주었습니다. 자신들은 이윤을 추구하면서.
그러나 자본도 완전히 자유롭지 않았습니다. 국가가 전략 산업을 지도했습니다. 전시 경제로 이동하면서 국가 통제가 강화되었습니다.
마이클 만은 코포라티즘을 이념과 현실 사이의 간극이 가장 큰 파시즘 요소로 봅니다. 계급 조화를 약속했지만 실제로 자본에 유리한 노동 억압 체계를 만들었습니다.

7장. 이탈리아 파시즘의 특수성 : 나치즘과의 차이
무솔리니의 이탈리아가 히틀러의 독일과 어떻게 달랐을까요.
이 비교가 중요합니다. 파시즘이 단일한 현상이 아니라 국가별 변형이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인종주의의 차이였습니다. 이탈리아 파시즘이 처음에 인종주의를 핵심 이념으로 갖지 않았습니다. 무솔리니가 초기에 반유대주의를 공식적으로 거부했습니다. 이탈리아 유대인들 중 일부가 초기 파시즘을 지지하기도 했습니다.
1938년에야 무솔리니가 반유대 법률을 도입했습니다. 히틀러와의 동맹 강화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탈리아 사회가 이것을 받아들이는 데 저항이 있었습니다.
국가와 당의 관계였습니다. 독일에서 나치당이 국가를 완전히 장악했습니다. 이탈리아에서 국가 기관들 — 군주제, 군대, 가톨릭 교회, 관료제 — 이 부분적 자율성을 유지했습니다.
국왕이 명목상 존재했습니다. 1943년 실제로 무솔리니를 해임했습니다. 이것이 독일에서 불가능했을 일입니다.
교회와의 관계였습니다. 무솔리니가 1929년 교황과 라테란 조약을 체결했습니다. 바티칸 시국이 독립 국가로 인정되었습니다. 가톨릭이 국교가 되었습니다. 종교 교육이 국립학교에서 의무화되었습니다.
파시즘이 교회를 없애는 대신 교회와 협력했습니다. 교회가 파시즘을 공인했습니다. 이것이 이탈리아 파시즘의 안정성을 제공했지만 동시에 전체주의화를 제한했습니다.
마이클 만은 이 차이들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이탈리아 파시즘이 전체주의라기보다 권위주의에 가까웠습니다. 사회의 모든 영역을 이념으로 통제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기존 제도들과 타협했습니다. 이것이 이탈리아 파시즘이 독일 나치즘보다 덜 파괴적이었던 이유였습니다.
8장. 에티오피아 침략 : 파시즘의 제국주의
1935년 10월 무솔리니가 에티오피아를 침략했습니다.
왜였을까요.
민족 자존심이었습니다. 1896년 아도와 전투에서 이탈리아가 에티오피아에 패배했습니다. 유럽 강대국이 아프리카 국가에 진 치욕이었습니다. 무솔리니가 이 굴욕을 되갚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제국의 이념이었습니다. 파시즘이 영토 팽창을 민족 활력의 표현으로 보았습니다. 이탈리아가 로마 제국의 후계자여야 했습니다. 아프리카에 이탈리아 제국을 만들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국내 정치 전환이었습니다. 대공황이 이탈리아 경제를 타격했습니다. 내부의 불만을 외부로 돌리는 데 전쟁이 효과적이었습니다.
전쟁 방식이 충격적이었습니다. 독가스를 사용했습니다. 민간인을 공격했습니다. 에티오피아의 원시적 무기로는 이탈리아 현대 군대에 맞설 수 없었습니다.
국제 연맹이 대응했습니다. 경제 제재를 가했습니다. 그러나 불완전했습니다. 석유가 제재 대상에 포함되지 않았습니다. 영국과 프랑스가 이탈리아를 완전히 압박하지 않았습니다. 소련이 중요한 동맹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제재가 효과가 없었습니다. 1936년 이탈리아가 에티오피아를 점령했습니다.
마이클 만은 에티오피아 침략을 파시즘의 이념이 필연적으로 외부 팽창으로 이어지는 방식의 증거로 봅니다. 민족의 영광이 이념의 핵심일 때, 그 영광이 영토로 측정될 때, 평화적 현상 유지가 이념과 양립할 수 없었습니다. 파시즘은 본질적으로 팽창주의였습니다.

9장. 무솔리니의 몰락 : 파시즘의 구조적 한계
무솔리니가 어떻게 끝났는지를 보면 이탈리아 파시즘의 한계가 드러납니다.
1943년 7월, 연합군이 시칠리아에 상륙했습니다. 이탈리아 전선이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파시스트 대평의회가 회의를 열었습니다. 무솔리니에 대한 불신임 투표가 이루어졌습니다. 찬성 19표 대 반대 7표.
무솔리니가 체포되었습니다. 국왕의 명령으로. 23년 독재가 투표 한 번에 끝났습니다.
왜 이것이 가능했을까요.
제도적 잔존 때문이었습니다. 이탈리아 파시즘이 기존 제도들을 완전히 파괴하지 않았습니다. 국왕이 살아있었습니다. 군 지휘관들이 독자성을 유지했습니다. 파시스트 대평의회가 형식적으로 존재했습니다. 이 기관들이 위기 순간에 무솔리니를 제거할 수단이 되었습니다.
히틀러에게는 이것이 불가능했습니다. 독일 나치즘이 모든 대안 권력 중심을 완전히 파괴했습니다. 독일에서 히틀러를 제거하는 시도(1944년 7월 20일 암살 기도)가 내부에서도 실패했습니다.
마이클 만은 무솔리니의 몰락을 파시즘이 충분히 전체주의화되지 않았기 때문에 오히려 더 취약했다는 역설로 봅니다. 기존 제도들과의 타협이 파시즘의 안정을 제공했지만 동시에 그 제도들이 파시즘을 제거하는 수단이 되었습니다.
무솔리니가 마지막을 어떻게 맞이했는지가 있습니다. 독일 특수부대에 구출된 후 북이탈리아 독일 점령 지역에서 괴뢰 정부를 운영했습니다. 1945년 4월 27일 이탈리아 파르티잔에게 체포되었습니다. 이튿날 총살되었습니다. 시체가 밀라노의 주유소에 거꾸로 매달렸습니다.
1919년 밀라노에서 시작된 것이 밀라노에서 끝났습니다.

10장. 마이클 만의 분석 : 원형이 보여준 것
마이클 만이 무솔리니의 이탈리아에서 파시즘에 대해 무엇을 읽어내는지를 종합합니다.
파시즘이 대중 운동이었습니다. 위로부터 부과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아래로부터 올라온 에너지가 있었습니다. 귀환 병사들의 불만, 중산층의 공포, 청년들의 열정. 이것들이 파시즘의 사회적 기반이었습니다.
이것이 중요한 함의를 갖습니다. 파시즘을 막으려면 그 사회적 기반이 된 조건들을 해결해야 합니다. 지도자 한 명을 제거하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파시즘이 지배 계급의 협력으로 가능했습니다. 지주, 산업가, 군부, 왕실이 파시즘을 지지하거나 허용했습니다. 공산주의가 더 두려웠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협력 없이 파시즘이 권력을 잡을 수 없었습니다.
이것도 중요한 교훈입니다. 파시즘이 순수하게 대중적 현상이 아닙니다. 엘리트의 지지와 묵인이 필요합니다.
코포라티즘이 이념과 현실의 간극을 보여주었습니다. 계급 조화를 약속했지만 자본에 유리한 노동 억압을 만들었습니다. 파시즘의 이념이 수사학적이었습니다. 실제 정책은 다른 이익을 위해 작동했습니다.
이탈리아 파시즘이 전체주의가 아니었습니다. 독일 나치즘에 비해. 기존 제도들과 타협했습니다. 이것이 이탈리아 파시즘이 상대적으로 덜 파괴적이었던 이유였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것이 파시즘의 한계를 보여주었습니다. 권력이 완전히 통합되지 않았을 때 내부에서 붕괴할 수 있었습니다.
마이클 만의 결론이 있습니다.
이탈리아 파시즘이 원형으로서 파시즘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었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파시즘이 완성될 때 어떻게 되는지를 독일이 보여주었습니다.
두 사례를 함께 볼 때 파시즘의 전체 구조가 드러납니다. 어떤 조건에서 자라는지. 어떻게 권력을 잡는지. 어떻게 작동하는지. 그리고 어떻게 끝나는지.
1945년 4월 28일 오후, 밀라노 로레토 광장.
무솔리니의 시체가 거꾸로 매달렸습니다. 그의 정부였던 클라라 페타치, 다른 파시스트 지도자들과 함께.
군중이 몰려들었습니다. 일부는 시체에 침을 뱉었습니다. 일부는 발로 찼습니다.
1922년 로마 진군의 환호가 여기서 끝났습니다.
그 23년 사이에 무엇이 있었을까요. 에티오피아. 스페인 내전 개입. 알바니아 침공. 2차 세계대전 참전. 북아프리카 패배. 시칠리아 상륙. 이탈리아 반도 전선. 그리고 해방.
마이클 만이 무솔리니의 이탈리아에서 최종적으로 읽는 것이 있습니다.
파시즘이 약속한 민족의 영광이 민족의 재앙으로 끝났습니다. 이것이 파시즘 이념의 내적 논리입니다. 민족의 영광이라는 이념이 끝없는 팽창을 요구합니다. 그 팽창이 결국 민족을 파괴합니다.
원형이 이것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러나 독일이 그것을 훨씬 더 파괴적인 규모로 반복했습니다.
다음 화 예고 56화, 히틀러는 어떻게 권력을 잡았나 : 선거·이념·공포가 결합한 권력 장악 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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