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댄 왕(Dan Wang), 『브레이크넥: 미래를 설계하려는 중국의 질주(Breakneck: China's Quest to Engineer the Future)』(W. W. Norton, 2025)
서가에 새로운 한 권을 들이는 일은 언제나 작은 사건입니다. 그 책이 우리가 지금 살아가는 시대의 가장 큰 질문 가운데 하나를 정면으로 마주하고 있을 때라면 더욱 그러합니다. 오늘 소개해 드릴 책은 2025년 8월, 미국의 노턴(W. W. Norton) 출판사에서 출간된 댄 왕의 『브레이크넥』입니다. 출간 직후 파이낸셜 타임스가 선정한 '올해의 비즈니스 도서' 후보작에 올랐고, 미국 평단에서도 "올해 중국에 관해 출간된 책 가운데 단연 으뜸"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작품입니다. 중국과 미국이라는 두 거인의 본질을 단 한 문장으로 꿰뚫어내는 명쾌한 시선이 인상적인 책입니다.
작가 소개: 두 세계를 모두 살아본 관찰자
저자 댄 왕은 중국에서 태어나 캐나다에서 자랐고, 이후 성인기의 절반은 중국에서, 나머지 절반은 미국에서 보낸 사람입니다. 어느 한쪽의 시민이 아니라 두 세계 사이를 오가며 살아온 이력 자체가 이 책의 가장 큰 자산이라 해도 좋겠습니다.
그는 현재 스탠퍼드 대학교 후버 연구소(Hoover Institution)의 역사 연구실 연구원으로 재직 중이며, 이전에는 예일 로스쿨 산하 폴 차이 중국센터(Paul Tsai China Center)의 펠로우, 그리고 홍콩에 본부를 둔 거시경제 분석기관 게이브칼 드래고노믹스(Gavekal Dragonomics)의 기술 분석가로 일했습니다. 무엇보다 그는 지난 10여 년간 상하이와 윈난, 그리고 다시 미국을 오가며 중국의 일상과 산업 현장을 직접 지켜보았고, 매년 연말이면 발표하는 '중국 연례 서한(annual letter from China)'을 통해 이미 영미권 지식인 사회에서는 "동시대 중국에 관한 가장 날카로운 관찰자 중 한 사람"(보수 칼럼니스트 로스 다우댓의 평)으로 인정받아 왔습니다. 『뉴욕타임스』, 『포린 어페어즈』, 『파이낸셜 타임스』, 『뉴욕 매거진』, 『디 애틀랜틱』 등에 꾸준히 글을 기고해 온 그가, 7년에 걸쳐 써온 연례 서한들을 토대로 비로소 첫 단행본을 묶어낸 것이 바로 이 『브레이크넥』입니다.
저자의 이력에서 주목할 점이 하나 더 있습니다. 그는 단순한 서구의 중국 관찰자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중국어를 모국어 수준으로 구사하며 중국 내부의 정서와 언어 감각을 그대로 흡수한 채 미국적 분석 도구를 함께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점, 이것이 이 책의 톤을 매우 독특하게 만들어줍니다. 그는 중국을 사랑하지만 환상에 빠지지 않고, 미국에 정착했지만 자국의 자아도취에도 동의하지 않습니다.
책의 줄거리: 엔지니어가 다스리는 나라, 변호사가 다스리는 나라
하나의 명제에서 출발하다
이 책의 모든 논의는 단 한 줄의 명제에서 출발합니다. "미국은 변호사들이 다스리는 나라이고, 중국은 엔지니어들이 다스리는 나라이다." 너무 단순해서 의심스러울 정도의 이 문장은, 그러나 책장을 넘길수록 점점 더 거대한 분석 도구로 자라납니다.
저자는 책의 첫머리에서 의외의 선언으로 독자를 사로잡습니다. "이 세상에서 미국인과 중국인만큼 닮은 두 민족도 없다." 두 사회 모두 물질적이고, 실용적이며, 경쟁심이 강하고, 기술이 만들어내는 숭고함 앞에 똑같이 매혹된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어쩌다가 이토록 비슷한 두 사회가 이렇게나 다른 길을 걷게 되었는가, 이 질문이 책 전체를 관통하는 동력입니다.
중국 공산당 정치국 상무위원회의 면면을 살펴보면 흥미로운 사실 하나가 드러납니다. 시진핑(화학공학), 리커창(경제학이긴 하나 이공계적 사고에 익숙), 후진타오(수리공학), 장쩌민(전기공학)에 이르기까지 최고 지도부의 다수가 공학도 출신이라는 점입니다. 반면 미국의 워싱턴은 어떻습니까. 의회의 절대다수, 백악관의 주요 직책, 대법원, 그리고 주요 정책 결정의 길목마다 변호사들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저자는 이 인적 구성의 차이가 단순한 우연이 아니라 두 사회가 세계를 바라보는 근본 방식을 결정짓는다고 봅니다.
엔지니어는 무엇을 합니까. 그들은 짓습니다(build). 그들은 문제를 정의하고, 사양을 정하고, 자원을 동원해 실물을 만들어냅니다. 변호사는 무엇을 합니까. 그들은 절차를 따집니다(litigate). 그들은 권리를 다투고, 위험을 회피하고, 합의의 틈새를 파고듭니다. 한쪽은 무언가를 세우는 데 능하고, 다른 한쪽은 무언가를 막거나 조정하는 데 능합니다. 이 차이가 21세기 두 강대국의 운명을 갈라놓고 있다는 것이 저자의 핵심 주장입니다.
엔지니어링 국가, 중국의 빛
책의 전반부, 특히 중반부의 가장 빛나는 장들은 저자가 직접 발로 누비며 목격한 중국의 모습을 생생하게 전합니다. 저자는 구이저우성을 자전거로 횡단합니다. 한국의 강원도 산골보다도 외진 그곳에서, 그는 미국의 부유한 주(州)에서도 보기 힘든 수준의 인프라가 깔려 있는 것을 발견합니다. 산을 뚫고 강을 건너 마을 곳곳에 닿은 고속도로, 고속철도, 광케이블 망. 중국은 지리를 휘게 하고 시간을 압축하는 능력을 가진 나라라는 것이지요.
상하이의 마천루, 충칭의 입체 도시, 선전의 제조업 생태계를 차례로 거치며 저자는 묻습니다. 어떻게 한 세대 만에 이런 일이 가능했는가. 답은 의외로 단순합니다. 누군가가 결정했고, 누군가가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미국이라면 환경영향평가, 토지수용 소송, 주민 청문회, 의회 예산 심의, 연방과 주의 관할권 분쟁에 묶여 십 년이 지나도 첫 삽조차 뜨지 못할 일을, 중국의 엔지니어링 국가는 사 년 만에 완공해 버립니다. 2030년에 이르면 중국이 전 세계 제조업 산출량의 45%를 차지할 것이라는 전망도 그 연장선상에 있습니다.
저자는 또한 흥미로운 사례를 듭니다. 태양광 패널의 역사가 그것입니다. 태양전지의 원리는 1950년대 미국의 벨 연구소가 발견했고, 생산 장비의 핵심 기술은 독일 기업들이 개발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받아 한 국가 전체의 산업 생태계로 키워내고, 가격을 한 자릿수 단위로 끌어내려 전 세계 시장을 장악한 것은 중국이었습니다. 발견은 미국과 독일이 했으나 구현은 중국이 한 것입니다. 이 '발견과 구현의 분업'은 21세기 산업의 핵심 풍경이 되었고, 저자는 그 의미를 깊이 파고듭니다.
미국이 늘 자신의 강점이라 자부하는 기초 과학과 원천 기술의 영역에서조차, 그것을 실제 제품으로 만들어 인류의 삶을 바꿔놓는 일은 점점 더 중국의 몫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저자는 이를 두고 슬쩍 비꼬듯 말합니다. 미국은 '저(低)에너지' 사회가 되었고, 유럽은 "미국식 관행을 받아들이기에는 너무 콧대 높은 영묘(靈廟) 같은 경제"가 되었으며, 중국과 미국은 "사기꾼들로 가득 차 있고 완전히 미친" 채 서로를 닮아가고 있다고 말입니다. 이런 신랄한 위트가 책 곳곳에 박혀 있어 정치경제서임에도 불구하고 책장이 무겁지 않습니다.
엔지니어링 국가, 중국의 어둠
그러나 저자는 결코 친중 논객이 아닙니다. 책의 가장 날카로운 장들은 오히려 엔지니어링 국가의 어두운 이면을 다룬 부분에서 빛을 발합니다.
가장 가슴 아픈 대목은 한 자녀 정책에 관한 장입니다. 저자는 정책의 결과만이 아니라 그 집행 과정을 가감 없이 묘사합니다. 국가의 무장 요원들이 마을마다 들이닥쳐 할당량을 채우기 위해 강제 낙태를 시행하던 풍경, 갓 태어난 여자아이들이 질식사하거나 익사당하거나 독살되거나 쓰레기봉투에 버려지던 풍경. 이 부분은 한 미국 서평자가 "차마 책을 계속 들 수 없어 잠시 내려놓아야 했다"고 고백할 만큼 처참한 기록입니다. 그리고 이 비극은 단지 도덕적 비극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한 자녀 정책은 단기적 경제 성장을 앞당겨 끌어다 쓰는 대신 장기적 인구 위기를 남겨놓은, 그 자체로 근시안적인 사회공학의 실패였다고 저자는 분석합니다.
엔지니어링적 사고의 또 다른 비극은 제로코로나 정책이었습니다. 상하이 봉쇄 당시, 국가가 띄운 드론이 도시 상공을 날며 확성기로 시민들을 향해 이렇게 외치던 장면. "자유를 향한 영혼의 갈망을 억누르십시오." 무려 8주에 걸친 그 봉쇄 기간 동안, 중국이라는 거대한 기계는 인간을 입력값과 출력값으로 환원해 통제하려 들었습니다.
저자는 이 모든 사례를 통해 핵심을 지적합니다. 엔지니어링 국가는 다리를 놓고 철도를 깔 때와 똑같은 사고방식으로 인간 사회를 다루려 든다는 것입니다. 사회를 기계처럼 설계할 수 있다는 믿음, 그리고 그 설계의 비용을 치르는 인간들의 얼굴을 보지 않는 잔혹함. 신장 위구르 자치구의 소수민족 감시 체제, 정치적 탄압의 일상화, 법치(rule of law)가 아닌 법에 의한 통치(rule by law)의 본질이 모두 같은 뿌리에서 나옵니다. 중국에서 공산당은 법의 위에 있으며, 사법 체계는 곤란한 사건을 조용히 사라지게 만들 권한을 보유하고 있고, 시민들이 정부를 상대로 다툴 수 있는 여지는 극도로 제한되어 있습니다.
변호사의 사회, 미국의 정체(停滯)
책의 후반부는 시선을 미국으로 돌립니다. 저자는 흥미로운 역사적 사실 하나를 환기시킵니다. 미국 역시 처음부터 변호사의 나라였던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1960년대 이전까지 미국은 오히려 엔지니어링 국가의 성격이 강했습니다. 광산 기술자 출신의 대통령 허버트 후버, 뉴욕시를 설계한 도시계획가 로버트 모지스 같은 인물들이 정치의 중심에 서 있던 시대가 있었습니다. 오늘날 뉴욕이 여전히 의지하고 있는 도시 인프라의 상당 부분이 바로 그 시절에 만들어진 것들입니다.
그러나 1960년대 이후, 미국 사회는 점차 절차에 사로잡힌 변호사 사회로 변모해 갔습니다. 환경 규제, 시민 소송, 행정 절차, 정치적 견제. 그것들 각각은 분명 정당한 명분을 가지고 있었지만, 모든 것을 합쳐 놓고 보면 미국이라는 사회 전체가 무언가를 새로 만들어내는 능력을 잃어버린 거대한 정체(停滯)의 풍경이 펼쳐졌습니다. 저자가 보기에 오늘의 미국은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모든 것을 반사적으로 가로막는" 사회입니다. 고속철도 한 노선을 깔지 못하고, 주택 한 채를 빨리 짓지 못하고, 송전망 하나를 새로 잇지 못합니다. 미국의 '풍요의 시대'를 회복하자는 일부 진보 지식인들의 '풍요 어젠다(abundance agenda)' 운동에 저자가 일정한 공감을 표하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입니다.
두 거인은 서로의 거울이다
여기까지가 진단이라면, 책의 결론은 처방으로 향합니다. 저자의 시선이 가장 깊은 곳은 바로 이 지점입니다. 중국과 미국은 서로를 적으로 바라보지만, 사실은 서로의 가장 좋은 거울이라는 것이지요.
중국 시민들의 삶은, 그 정부가 개인의 자유와 법치의 가치를 배우는 만큼 더 나아질 수 있습니다. 거대한 사회공학의 야망이 개인의 얼굴을 지워버리는 비극을 멈추려면, 결국 법의 지배라는 미국적 전통의 한 자락을 배우지 않을 수 없습니다.
미국 시민들의 삶은, 그 정부가 엔지니어링적 사고를 다시 회복하는 만큼 더 나아질 수 있습니다. 끝없는 소송과 절차의 늪에서 빠져나와 다시 무언가를 짓는 능력을, 그리하여 소수가 아닌 다수의 삶을 실질적으로 개선하는 능력을 되찾으려면, 결국 중국식 실행력의 한 자락을 배우지 않을 수 없습니다.
두 나라는 서로를 닮은 채 서로 다른 길로 너무 멀리 가버렸습니다. 저자는 두 사회가 각자의 극단에서 한 걸음씩 물러서서, 서로에게서 잃어버린 절반을 발견하기를 권합니다. 이 결말은 어쩌면 진부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21세기의 가장 큰 두 권력이 마치 거울에 비친 두 얼굴처럼 서로의 결핍을 가르쳐주고 있다는 사실, 그 자체가 우리 시대의 가장 큰 역설입니다.
독자에게 전하는 메시지
이 책을 덮으며 저는 오래 생각에 잠겼습니다. 이 책은 분명 중국과 미국에 관한 책이지만, 책장을 덮고 나면 자꾸만 우리 자신을 돌아보게 됩니다.
우리 한국 사회는 어디에 서 있을까요. 우리는 분명 일으켜 세우는 일에 능했던 나라입니다. 압축적 근대화, 한강의 기적, 세계 최고 수준의 인프라, 빠른 결정과 빠른 실행. 그 점에서 우리는 엔지니어링 국가의 면모를 한껏 보여준 사회였습니다. 그러나 어느 사이엔가 우리 역시 변호사 사회의 길로 깊숙이 들어선 듯합니다. 절차의 정당성, 권리의 다툼, 소송의 일상화가 모든 영역으로 번지고 있습니다. 둘 다 필요한 일들이지만, 그 사이의 균형을 잃을 때 우리는 어느 한쪽의 극단을 향해 흘러가게 됩니다.
『브레이크넥』이 우리에게 던지는 가장 중요한 질문은 어쩌면 이것입니다. 좋은 사회란 무엇인가. 건설하는 능력이 인간의 얼굴을 지워버린 사회가 좋은 사회가 아니듯, 절차에 갇혀 더 이상 아무것도 새로 만들어내지 못하는 사회 또한 좋은 사회가 아닙니다. 우리 시대에 필요한 것은 '엔지니어 대 변호사'라는 양자택일이 아니라, 그 둘이 어떤 비율로 서로를 견제하며 공존할 것인가에 관한 지혜로운 균형감각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 이 책은 우리에게 시야의 문제를 일깨워줍니다. 우리는 너무 자주 미국이라는 단일한 창을 통해서만 세계를 봅니다. 그러나 21세기는 더 이상 한 개의 창만으로는 다 볼 수 없는 시대입니다. 중국을 단지 위협이나 경쟁자로만이 아니라, 우리 시대의 한 거대한 실험으로, 그리고 동시에 한 거대한 비극의 무대로 정직하게 들여다볼 수 있을 때, 비로소 우리는 우리 자신의 좌표를 더 정확히 읽어낼 수 있게 됩니다.
정치와 경제에 깊은 관심이 없는 분이라도, 우리가 사는 이 시대의 풍경을 한 단계 깊은 곳에서 이해하고 싶은 분이라면 누구에게나 권할 만한 책입니다. 저자의 위트와 날카로움, 그리고 두 세계를 모두 살아본 사람만이 보여줄 수 있는 균형감각이 책장 사이사이 빛납니다. 다음 책 이야기로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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