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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사회적 권력의 원천

「권력의 지도」 16화, 로마는 왜 무너졌나

by 책으로떠나는여행 2026. 4. 13.

로마는 왜 무너졌나 : 권력망의 과부하와 붕괴 메커니즘


410년 8월, 서고트족의 왕 알라리크가 로마 성문을 열었습니다.

800년 만에 처음으로 적군이 영원한 도시 로마를 점령했습니다. 사흘 동안 약탈이 벌어졌습니다. 신전들이 약탈당하고, 귀족들의 저택이 불탔습니다. 수천 명이 노예로 끌려갔습니다.

소식이 전해지자 지중해 세계 전체가 충격에 빠졌습니다. 카르타고에 있던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이 사건에 충격을 받아 『신국론(De Civitate Dei)』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로마가 무너진 것은 기독교 때문이 아니라, 로마의 세속적 야망이 신의 섭리 앞에 굴복한 것이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제롬은 팔레스타인에서 통곡하며 편지를 썼습니다. "세계를 정복한 도시가 정복당했다."

그러나 마이클 만은 410년의 약탈이 로마 멸망의 원인이 아니라 증상이었다고 봅니다. 로마는 하루아침에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수백 년에 걸쳐 서서히, 그러나 되돌릴 수 없이 무너졌습니다. 그리고 그 붕괴의 메커니즘을 이해하는 것은 단순한 역사적 호기심이 아닙니다. 그것은 모든 거대한 권력 구조가 어떻게 무너지는가에 대한 보편적 교훈을 담고 있습니다.


멸망의 역사학 : 수많은 이론들

로마는 왜 무너졌는가. 이 질문은 서양 역사학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많이 논쟁된 질문 중 하나입니다.

18세기 에드워드 기번은 여섯 권짜리 대작 『로마 제국 쇠망사』에서 두 가지 원인을 강조했습니다. 기독교의 영향야만족의 침입이었습니다. 기독교가 로마인들의 전사적 덕목을 약화시키고 내세 지향적 가치관으로 대체했다는 것, 그리고 그 틈을 타 게르만족이 침입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후 역사학자들은 수십 가지 이론을 제시했습니다. 납 중독설(로마인들이 납으로 만든 수도관과 식기를 사용하다가 집단 지능 저하를 겪었다는 것), 기후 변화설, 전염병설, 경제 쇠퇴설, 군사적 과부하설, 도덕적 타락설, 정치적 부패설 — 이 모든 이론들이 제각각 근거를 가지고 있습니다.

마이클 만은 이 모든 단일 원인론을 거부합니다. 로마의 붕괴는 어느 하나의 원인으로 설명될 수 없습니다. 그것은 IEMP 네 가지 권력망이 동시에 과부하에 걸리고 서로의 붕괴를 가속화하는 복합적 연쇄 반응의 결과였습니다. 마이클 만의 표현을 빌리면 "권력망의 연쇄 붕괴(cascading collapse of power networks)"였습니다.


첫 번째 균열 : 군사 권력의 과부하

로마 제국의 군사적 문제는 근본적으로 지리적 딜레마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로마의 국경선은 팽창할수록 길어졌습니다. 이탈리아 반도만 지키던 시절에는 짧았던 국경이, 브리타니아에서 메소포타미아까지 뻗어나가면서 수만 킬로미터에 달하게 되었습니다. 라인강과 다뉴브강을 따라 이어지는 북쪽 국경선만 해도 약 5000킬로미터였습니다.

이 국경을 지키려면 끊임없이 군단이 필요했습니다. 아우구스투스 시대에 25개였던 군단이 3세기에는 33개로 늘었습니다. 그러나 국경의 길이가 늘어나는 속도를 군단의 증가 속도가 따라가지 못했습니다. 동시에 군인들의 급여와 퇴역 보상이 지속적으로 올랐습니다. 황제들이 군대의 충성심을 유지하기 위해 경쟁적으로 급여를 올렸기 때문입니다.

수치로 보겠습니다. 아우구스투스 시대 군사비는 국가 지출의 약 50퍼센트였습니다. 3세기 위기 이후에는 70퍼센트를 넘었다는 추산도 있습니다. 이것이 지속 가능할 리 없었습니다.

더 심각한 문제는 군사 권력의 내향화였습니다. 외적을 막기 위해 존재해야 할 군대가 점점 내전에 소모되었습니다. 3세기에는 합법적으로 선출된 황제가 거의 없었습니다. 대부분이 군대에 의해 옹립되었고, 그들 중 대부분은 다시 군대에 의해 암살되었습니다. 군단들이 자신의 지휘관을 황제로 만들기 위해 서로 싸우는 동안, 외부의 게르만족과 사산조 페르시아는 국경을 압박했습니다.

마이클 만은 이것을 군사 권력의 자기 파괴적 순환이라고 봅니다. 군사 권력이 강해질수록 그것을 통제하는 정치 권력이 약해졌습니다. 정치 권력이 약해질수록 더 많은 군사력을 동원해야 했습니다. 이 순환이 제국의 자원을 갉아먹었습니다.

디오클레티아누스의 군사 개혁이 이 문제를 해결하려 했습니다. 그는 군단을 두 종류로 재편했습니다. 국경 수비를 담당하는 변경군(limitanei)과 내부에 주둔하다가 위기 시 신속하게 이동하는 야전군(comitatenses)이었습니다. 전략적 예비대의 개념을 도입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 개혁은 군사비를 더욱 늘렸습니다. 두 종류의 군대를 유지하는 비용은 기존보다 훨씬 컸습니다. 군사 문제를 군사적으로 해결하려 할수록 경제적 부담이 가중되는 악순환이었습니다.


두 번째 균열 : 경제 권력의 쇠퇴

로마 제국의 경제는 본질적으로 팽창 의존형이었습니다.

팽창이 계속되는 동안 경제는 순환했습니다. 전쟁에서 이기면 전리품이 들어왔습니다. 포로들이 노예가 되어 농장과 광산에서 일했습니다. 속주들이 세금을 냈습니다. 이 자원들이 군대를 먹이고, 도시를 건설하고, 경제를 돌렸습니다.

그런데 2세기 이후 팽창이 멈췄습니다. 트라야누스 황제(재위 98~117년)의 다키아 원정과 파르티아 원정이 사실상 로마 제국의 마지막 대규모 팽창이었습니다. 이후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팽창 정책을 포기하고 국경을 강화하는 방어 정책으로 전환했습니다.

팽창이 멈추자 전리품도 멈췄습니다. 새로운 노예 공급도 줄었습니다. 그런데 기존의 비용 — 군대, 관료제, 인프라 유지 — 은 줄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늘었습니다.

이 불균형을 메우는 방법이 세 가지였습니다.

첫째, 세금 인상이었습니다. 황제들은 점점 더 많은 세금을 걷으려 했습니다. 그러나 세금이 늘수록 경제 활동이 위축되었습니다. 상인들이 교역을 줄이고, 농민들이 땅을 버리고 도망갔습니다. 세금 기반 자체가 줄어드는 역설이 발생했습니다.

둘째, 화폐 가치 하락이었습니다. 황제들은 은화에서 은 함량을 줄이는 방식으로 사실상 화폐를 찍어냈습니다. 아우구스투스 시대의 은화(데나리우스)는 거의 순은이었습니다. 3세기 중반에는 은 함량이 5퍼센트 이하로 떨어졌습니다. 이것이 심각한 인플레이션을 낳았습니다. 물가가 폭등하고 화폐에 대한 신뢰가 무너졌습니다.

셋째, 현물 경제로의 퇴행이었습니다. 화폐를 믿을 수 없게 되자 사람들이 현물 거래로 돌아갔습니다. 세금도 현물로 내고, 군인 급여도 현물로 지급했습니다. 이것은 화폐 경제가 발달하기 이전의 단계로 퇴행하는 것이었습니다. 로마 경제가 이루어낸 수백 년의 발전이 역전되기 시작했습니다.

마이클 만은 이 경제적 쇠퇴가 단순히 경제 문제로 그치지 않았다고 강조합니다. 경제 권력의 약화는 필연적으로 다른 권력들을 약화시켰습니다. 군사비를 감당하기 어려워졌고, 도로와 인프라 유지가 어려워졌으며, 관료제의 부패가 심화되었습니다. 권력망이 서로를 갉아먹기 시작했습니다.


세 번째 균열 : 이념 권력의 전환

로마 제국을 수백 년간 지탱한 이념 권력의 핵심은 두 가지였습니다. 로마다움(Romanitas)과 황제 숭배였습니다.

로마다움은 문화적 정체성이었습니다. 언어, 법, 생활 방식을 공유하는 로마 시민으로서의 자부심이었습니다. 황제 숭배는 정치적 통합의 이념적 기반이었습니다. 황제에 대한 제의(祭儀)를 통해 제국 전체가 하나의 공동체임을 확인하는 의례였습니다.

그런데 3세기 이후 이 두 이념 권력이 모두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황제 숭배의 위기입니다. 50년간 50명의 황제가 바뀌는 상황에서 황제를 신성한 존재로 숭배하는 것은 불가능해졌습니다. 어제의 신이 오늘 암살당하고 내일 다른 신이 등장했습니다. 황제의 신성이 우스꽝스러워졌습니다. 이념 권력의 핵심 기제가 스스로 정당성을 잃어갔습니다.

로마다움의 희석입니다. 212년 카라칼라의 시민권 보편화 이후, 로마 시민권은 더 이상 특별한 정체성의 표지가 되지 못했습니다. 모두가 로마 시민이 되자 역설적으로 로마 시민이라는 것이 특별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로마다움이라는 이념적 구심력이 약화되었습니다.

기독교의 부상입니다. 이 공백을 채운 것이 기독교였습니다. 기독교는 3세기의 혼란과 고통 속에서 폭발적으로 성장했습니다. 황제들이 박해를 가할수록 오히려 기독교는 더 강해졌습니다. 순교자의 피가 교회의 씨앗이 되었습니다.

기독교의 성장이 왜 로마에게 이념적 위기였을까요.

로마의 다신교 체계는 정치적 통합의 도구였습니다. 각 민족의 신을 인정하면서도 황제 숭배라는 공통 의례로 묶는 것이었습니다. 기독교는 이 체계를 근본적으로 거부했습니다. 황제 숭배를 우상숭배로 규정하고 거부했습니다. 다른 신들을 악마로 선언했습니다. 세속 권위보다 신의 권위가 우선이라고 가르쳤습니다.

콘스탄티누스가 313년에 기독교를 공인한 것은 이 이념적 위기에 대한 현명한 대응이었습니다. 제국 전체를 하나로 묶을 수 있는 강력한 이념 권력으로 기독교를 활용하려 한 것이었습니다. 380년 테오도시우스가 기독교를 국교로 선포하면서 이 전환이 완성되었습니다.

그러나 마이클 만은 이 해법이 새로운 문제를 만들었다고 봅니다. 기독교가 국교가 되는 순간, 기독교 내부의 신학 논쟁이 정치적 분열로 이어졌습니다. 니케아 공의회(325년), 콘스탄티노플 공의회(381년) — 그리스도의 본성을 둘러싼 신학 논쟁이 제국을 분열시켰습니다. 아리우스파와 정통파의 갈등, 단성론 논쟁 — 이것들이 종교 분쟁이자 동시에 정치 분열이었습니다.

이념 권력을 하나로 통합하려 한 시도가 오히려 더 깊은 이념적 분열을 만들어낸 것입니다.


네 번째 균열 : 정치 권력의 구조적 결함

로마 공화정이 원로원과 집정관의 균형으로 권력을 분산했다면, 로마 제국은 황제 1인에게 권력을 집중시켰습니다. 이것이 단기적으로는 효율적이었지만 장기적으로는 치명적인 구조적 결함을 만들었습니다.

황위 계승의 불안정입니다.

로마 제국에는 확립된 황위 계승 제도가 없었습니다. 황제는 자신의 후계자를 지명할 수 있었지만, 그 지명을 군대와 원로원이 거부할 수 있었습니다. 반대로 군대가 자신의 지휘관을 황제로 옹립할 수도 있었습니다.

이 불확실성이 만성적인 권력 투쟁을 낳았습니다. 황제 후보들은 군대의 지지를 얻기 위해 경쟁적으로 급여와 보상을 약속했습니다. 이것이 군사비를 올리고 재정을 악화시켰습니다. 재정 악화는 더 많은 세금과 화폐 가치 하락을 낳았습니다. 그것이 다시 경제를 악화시키고 사회 불안을 키웠습니다. 사회 불안이 다시 황위 불안정을 낳았습니다.

황위 계승 문제가 모든 악순환의 출발점이었습니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이 문제를 사두 정치(Tetrarchy)로 해결하려 했습니다. 두 명의 정황제(Augustus)와 두 명의 부황제(Caesar)가 제국을 나누어 다스리면서, 부황제가 정황제의 후계자가 되는 체계였습니다. 계승 문제를 제도화하려 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실험은 디오클레티아누스가 퇴위하자마자 내전으로 무너졌습니다. 콘스탄티누스가 내전에서 승리하여 제국을 재통일했지만, 그의 사후 또 다시 내전이 벌어졌습니다. 제도적 해법이 반복적으로 실패했습니다.

마이클 만은 이 반복적 실패가 단순히 개인들의 야망 때문이 아니라 구조적 문제 때문이었다고 봅니다. 제국 전체를 1인이 통치하는 체계에서는 그 1인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경쟁이 항상 존재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경쟁을 제어할 수 있는 것은 강력한 이념적 정당성이나 확고한 제도적 규칙인데, 로마 제국은 두 가지 모두에서 취약했습니다.

관료제의 팽창과 부패입니다.

디오클레티아누스의 또 다른 개혁은 관료제의 대규모 확장이었습니다. 제국을 더 작은 행정 구역으로 세분화하고, 각 구역에 더 많은 관리를 배치했습니다. 이것은 중앙의 통제를 강화하려는 시도였지만, 동시에 유지 비용을 폭발적으로 늘렸습니다.

더 심각한 문제는 부패였습니다. 관료가 많아질수록 부패도 늘었습니다. 세금 징수관들이 세금을 착복하고, 군수 담당자들이 물자를 빼돌리고, 지방 관리들이 직권을 남용했습니다. 중앙에서 지방으로 향하는 명령의 흐름이 부패라는 저항에 부딪혀 실제로 관철되지 않는 경우가 늘었습니다.

마이클 만이 말하는 하부구조적 권력이 내부에서 무너진 것입니다. 도로는 있지만 아무도 수리하지 않아 구멍이 났습니다. 법은 있지만 아무도 집행하지 않아 유명무실해졌습니다. 명령은 내려졌지만 아무도 따르지 않아 공허하게 울렸습니다.


외부의 충격 : 게르만족과 훈족

여기까지가 로마의 내부적 균열이었습니다. 그런데 4세기 말, 이 균열에 결정적 충격을 가한 외부 요인이 등장했습니다. 훈족(Huns)이었습니다.

훈족은 중앙아시아 초원에서 서쪽으로 이동해온 유목 전사 집단이었습니다. 그들의 기병 전술은 당시 세계에서 가장 강력했습니다. 훈족이 서쪽으로 밀고 들어오자, 이미 로마 국경 주변에 살고 있던 게르만족들 — 서고트족, 동고트족, 반달족, 부르군트족 등 — 이 도미노처럼 밀려났습니다.

376년, 서고트족 수십만 명이 훈족을 피해 다뉴브강을 건너 로마 영토 안으로 들어오게 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로마 황제 발렌스는 이것을 허락했습니다. 노동력과 병력이 필요하기도 했고, 막을 능력도 부족했습니다.

그러나 로마 관리들이 서고트족을 착취하고 학대했습니다. 음식을 제대로 제공하지 않으면서 세금을 거두고, 사람들을 노예로 팔기까지 했습니다. 분노한 서고트족이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378년, 아드리아노플 전투에서 서고트족 연합군이 로마군을 격파했습니다. 황제 발렌스가 전사했습니다. 현장 병력의 3분의 2가 전멸했습니다.

이 전투가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로마군이 야만족에게 대패한 것이 처음이 아니었지만, 이번에는 달랐습니다. 로마가 패배를 회복할 능력을 잃기 시작했다는 것이 이 전투 이후 분명해졌습니다.

마이클 만은 아드리아노플 전투를 단순한 군사적 패배가 아니라 권력망 전반의 취약성이 외부 충격에 의해 드러난 순간으로 봅니다. 경제적으로 쇠퇴하고, 정치적으로 불안정하고, 이념적으로 분열된 제국이 새로운 군사적 도전에 대응할 탄력성을 잃은 것이었습니다.


분열과 붕괴의 과정

395년,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사망하면서 제국을 두 아들에게 나누어주었습니다. 동부는 아르카디우스에게, 서부는 호노리우스에게. 이것이 로마 제국의 영구적 동서 분열의 시작이었습니다.

이후 서로마의 역사는 빠른 붕괴의 역사였습니다.

406년, 라인강이 얼어붙은 겨울에 반달족, 알란족, 수에비족이 얼어붙은 강을 건너 갈리아로 쏟아져 들어왔습니다. 국경 방어가 무너진 것이었습니다.

410년, 서고트족의 알라리크가 로마를 약탈했습니다. 심리적 충격은 군사적 피해보다 컸습니다. 800년간 불패의 도시로 여겨지던 로마가 약탈당했다는 사실이 제국의 이념적 기반을 뒤흔들었습니다.

429년, 반달족이 북아프리카를 점령했습니다. 북아프리카는 서로마 제국의 곡창 지대였습니다. 이것이 상실되자 서로마의 경제 기반이 근본적으로 흔들렸습니다. 세금 수입이 급감했습니다.

455년, 반달족이 로마를 두 번째로 약탈했습니다. 이번에는 2주간 체계적으로 약탈했습니다. 반달리즘(Vandalism, 문화 파괴)이라는 단어가 이 약탈에서 유래했습니다.

476년, 게르만족 용병대장 오도아케르가 마지막 서로마 황제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를 폐위했습니다. 황제를 죽이지도 않고 단순히 폐위하고 연금을 주어 시골로 보냈습니다. 서로마 제국이 그만큼 하찮아진 것이었습니다.

마이클 만은 이 과정에서 흥미로운 패턴을 읽어냅니다. 서로마 제국은 단번에 무너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마치 끓는 물 속의 개구리처럼, 서서히 그리고 단계적으로 무너졌습니다. 그리고 각 단계의 붕괴가 다음 단계의 붕괴를 더 쉽게 만들었습니다. 권력망의 연쇄 붕괴였습니다.


동로마는 왜 살아남았나

여기서 중요한 비교가 등장합니다. 서로마는 476년에 멸망했지만, 동로마(비잔틴 제국)는 무려 1453년까지, 즉 서로마 멸망 후 거의 1000년을 더 지속했습니다.

왜 같은 제국에서 갈라진 두 부분이 이토록 다른 운명을 맞았을까요.

마이클 만은 몇 가지 구조적 차이를 지적합니다.

경제적 차이입니다. 동로마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은 유럽과 아시아를 연결하는 교역의 요충지였습니다. 흑해와 지중해를 잇는 보스포루스 해협을 장악한 콘스탄티노플은 상업적으로 훨씬 풍요로웠습니다. 서로마의 경제 중심이 군사 원정과 토지 착취였다면, 동로마는 활발한 상업 경제를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군사적 차이입니다. 서로마는 길고 취약한 라인강·다뉴브강 국경선을 지켜야 했습니다. 동로마는 콘스탄티노플이라는 난공불락의 요새 도시를 중심으로 방어를 조직할 수 있었습니다. 콘스탄티노플의 삼중 성벽은 1000년간 함락되지 않았습니다.

이념적 차이입니다. 동로마에서 기독교와 로마 황제권의 결합이 더 안정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황제가 기독교 교회의 수호자로서의 역할을 맡고, 교회가 황제권의 신성성을 뒷받침하는 공생 관계가 형성되었습니다. 이념 권력과 정치 권력의 결합이 서로마보다 훨씬 견고했습니다.

행정적 차이입니다. 동로마는 그리스어권 지역을 중심으로 하여 더 오래된 도시 문명과 행정 전통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관료제가 더 잘 작동했고, 세금 징수 체계가 더 효율적이었습니다. 하부구조적 권력이 더 강했습니다.

마이클 만은 동서로마의 차이가 우연이 아니라 구조적 차이에서 비롯된 것임을 강조합니다. 같은 황제의 두 아들에게 분할된 제국이 왜 이토록 다른 운명을 맞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이 권력망의 구조적 분석에서 나온다는 것입니다.


로마 멸망의 보편적 교훈

마이클 만은 로마 제국의 붕괴에서 모든 거대한 권력 구조의 붕괴에 적용되는 몇 가지 보편적 패턴을 도출합니다.

첫째, 권력망은 서로 의존하기 때문에 어느 하나의 붕괴가 전체의 붕괴를 촉발한다는 것입니다.

로마의 경제 쇠퇴가 군사력을 약화시켰습니다. 군사력 약화가 정치적 불안을 낳았습니다. 정치적 불안이 이념적 위기를 심화시켰습니다. 이념적 위기가 다시 경제적 신뢰를 무너뜨렸습니다. 이 순환은 어느 지점에서 시작되든 결국 전체를 끌어내렸습니다.

현대의 국가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경제 위기가 정치 불안을 낳고, 정치 불안이 외교적 고립을 낳고, 외교적 고립이 경제 위기를 심화시키는 연쇄 반응 — 이것은 로마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둘째, 제국의 과도한 팽창은 자기 파괴적이라는 것입니다.

팽창할수록 국경이 길어지고, 국경이 길어질수록 방어비가 늘고, 방어비가 늘수록 내부 투자가 줄고, 내부 투자가 줄수록 경제가 약화되고, 경제가 약화될수록 방어 능력이 떨어지는 악순환입니다. 이것이 폴 케네디가 말한 "제국의 과도한 팽창"의 메커니즘입니다. 로마뿐 아니라 스페인 제국, 영국 제국, 소련 제국이 모두 이 패턴을 반복했습니다.

셋째, 이념 권력의 소진은 돌이키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로마는 영원하다"는 믿음이 무너지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그러나 일단 무너지기 시작하자 빠르게 무너졌습니다. 이념 권력이 소진된 체계는 군사력과 경제력으로 잠시 유지될 수 있지만, 결국은 무너집니다. 반대로 이념 권력이 강한 체계는 군사적 패배와 경제적 어려움도 극복할 수 있습니다.

넷째, 제도적 해법은 그것을 작동시키려는 의지 없이는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디오클레티아누스의 사두 정치, 콘스탄티누스의 기독교 공인, 테오도시우스의 국교화 — 이것들은 모두 제국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제도적 시도였습니다. 그러나 그 제도들이 뿌리를 내리기 전에 황제들이 죽거나 내전이 일어났습니다. 제도는 그것을 유지하려는 사람들의 지속적 노력 없이는 작동하지 않습니다.


붕괴 이후 : 끝이 아닌 변환

476년, 서로마 제국이 공식적으로 끝났습니다. 그러나 역사는 계속되었습니다.

게르만 왕국들이 서유럽을 나누어 다스렸습니다. 프랑크 왕국, 서고트 왕국, 동고트 왕국, 반달 왕국 — 이들은 로마를 파괴하려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로마의 후계자를 자처했습니다. 로마법을 유지했습니다. 라틴어를 사용했습니다. 로마 교회를 지원했습니다.

교회가 로마의 제도적 유산을 이어받았습니다. 교황청이 서유럽 전체의 이념 권력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라틴어가 학문과 종교의 공통 언어로 살아남았습니다. 로마법이 교회법과 세속법 모두의 기반이 되었습니다.

마이클 만은 이것을 권력망의 재편이라고 봅니다. 로마 제국이라는 정치적 단위는 사라졌지만, 로마가 구축한 이념·경제·군사·정치 권력망의 요소들은 새로운 형태로 재조합되었습니다. 중세 유럽이 바로 그 재조합의 산물이었습니다.

권력의 공백은 항상 새로운 권력으로 채워집니다. 제국이 무너진 자리에서 새로운 권력의 실험이 시작됩니다. 로마의 붕괴가 중세를 낳았고, 중세가 근대를 낳았습니다.

역사는 멈추지 않습니다. 권력도 멈추지 않습니다. 다만 형태를 바꿀 뿐입니다.


로마가 우리에게 묻는 것

마지막으로 마이클 만이 던지는 질문으로 마무리하겠습니다.

21세기에 우리는 로마의 거울 앞에 서 있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군사력을 가진 나라가 국방비 과부하로 신음하고 있습니다. 세계화된 경제가 불평등을 심화시키고 중산층을 무너뜨리고 있습니다. 기존의 이념 권력이 포퓰리즘과 양극화에 의해 도전받고 있습니다. 민주주의 제도들이 제도를 지키려는 시민들의 의지 없이는 공허해질 수 있다는 것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로마는 이미 이 모든 것을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버텼습니다. 오랫동안, 놀랍도록 오랫동안.

로마가 결국 무너진 것은 외부의 적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로마가 무너진 것은 내부의 권력망이 서로를 지탱하지 못하게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수백 년에 걸친 수많은 선택들의 누적된 결과였습니다.

역사는 심판하지 않습니다. 다만 거울을 들어 보여줄 뿐입니다. 그 거울 앞에서 무엇을 볼 것인가는 우리의 선택입니다.


다음 화 예고 17화, 기독교는 어떻게 제국을 정복했나 : 이념 권력이 군사·정치 권력을 이긴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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