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 바닷가에서 백건우 선생님과 나눈 이야기(풍월한담 발췌)
, 그리고 음반 『슈만』(2020, DG)을 들으며
피아노 : 백건우, 슈만 : 어린이의 정경( Op.15, 유령 변주곡, 나흐트슈튀케 Op.23 )
통영 바닷가에서 선생님을 만났을 때, 지난번 쇼팽 음반에 이어 이번에는 슈만을 녹음하신 이유가 궁금했다. 두 작곡가의 차이에 대해 여쭤보자, 선생님은 잠시 생각에 잠기시더니 이렇게 말씀하셨다.
"쇼팽은... 단순한 사람이에요. 좁은 세계에서 큰 세계를 그린 사람이죠. 베토벤은 반대로 큰 세계를 악보에 담았고요."
그렇다면 슈만은?
"슈만은 자기와 음악이 하나예요."
그 한마디가 오래 남았다. 고백이 아니라 존재 자체가 음악이 된 사람.

음반 속 트로이메라이, 잃어버린 시간의 초상
통영에서의 인터뷰를 마치고 돌아와 백건우 선생님의 『슈만』(2020, DG) 음반을 펼쳤다. <어린이의 정경> 작품번호 15 중 7번 '트로이메라이(Träumerei)'. 누구나 한 번쯤 들어봤을 이 곡이 음반 속에서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다가왔다.
첫 음부터 달랐다. 너무나 조심스럽게, 마치 깨지기 쉬운 꿈을 다루듯 건반을 어루만지는 소리. 그것은 달콤하기만 한 선율이 아니었다. 그리움과 슬픔이 섞인, 돌아갈 수 없는 시간에 대한 동경. 통영에서 선생님이 하셨던 말씀이 떠올랐다.
"슈만의 선율은 기가 막히죠. 정말 기가 막힌데, 그게 시에 대한 사랑이 그렇게 만들었을 거예요."
선생님의 말씀처럼, 이 곡은 시였다. 그냥 조금 예쁘고 마는 게 아니라 깊었다.
음반으로 듣는 트로이메라이의 가장 큰 특징은 각 음 사이의 공간이었다. 특히 중간 부분, 선율이 높아지다가 다시 내려오는 그 순간들. 선생님은 각 음 사이에 미세한 침묵을 두셨다. 그 침묵이 음악을 더 깊게 만들었다. 꿈을 꾸다가 깨어날 것 같은, 깨어나고 싶지 않은, 그런 망설임이 녹음 속에서도 생생하게 전해졌다.
소중한 침묵을 깨뜨리는 첫 음
통영에서의 인터뷰 중, 선생님께서 공연에서 첫 음을 내시기 전의 순간에 대해 말씀하신 것이 인상적이었다. 마치 침묵이 너무나 소중해서, 그것을 깨뜨리려면 그만큼의 의미가 있어야 한다는 듯한 주저함.
"베토벤의 침묵에는 내용이 있어요. 계산된 침묵이죠. 그런데 슈만은... 더 절망적입니다."
선생님의 설명은 계속되었다.
"자기 삶을 놓고, 이게 앞으로 더 갈 건가, 여기서 멈출 건가... 생명이란 게 리듬이 있고 흘러가다가 그걸 정지시키는 것 같은 느낌. 존재할 건가, 아니면 말 건가. 그렇게 자기 자신에 대해 질문하고, 조금 가다가 또 정지하고..."
나흐트슈튀케 같은 곡은 한 음 한 음 사이에 그런 고요함이 들어있어서 치기가 힘들었다고 하셨다. 그 말씀에 담긴 한숨이 무겁게 느껴졌다.
음반을 들으며 그 침묵의 의미를 비로소 이해했다. DG 녹음의 선명함은 그 침묵들을 더욱 또렷하게 담아냈다. 페달이 떨어지며 소리가 사라지는 순간, 그리고 다음 음이 시작되기 직전의 그 찰나. 그 절묘한 타이밍이 음반 전체를 하나의 긴 호흡으로 만들었다.
어린이의 정경, 그러나 어른의 시선으로
<어린이의 정경>은 아이들을 위한 곡이 아니다. 어른이 된 슈만이 어린 시절을 회상하며 쓴 곡이다. 음반 속 트로이메라이에서 그게 명확하게 느껴졌다. '꿈꾸기'라는 제목이지만, 이건 아이의 천진난만한 꿈이 아니라 어른이 잃어버린 것들에 대해 꾸는 꿈이었다.
백건우 선생님의 연주에서 각 프레이즈의 끝에서 미묘하게 느려지는 템포, 그리고 다시 시작할 때의 망설임. 마치 추억 속을 거닐다가 현실로 돌아오길 주저하는 것 같았다. 이런 섬세한 뉘앙스는 음반이기에 더욱 명확하게 포착되었다.
통영에서 선생님이 하셨던 말씀.
"슈만은 자기와 음악이 하나예요. 고백이 아니라... 전체 작품이 다 자기와 하나예요."
그 말씀이 이해되었다. 트로이메라이는 단순히 아름다운 선율이 아니라 슈만 그 자체였다. 그의 내면, 그의 회한, 그의 그리움이 모두 담겨 있었다.
2020년, 팬데믹 시대에 발매된 슈만
『슈만』(2020, DG) 음반이 나온 건 전 세계가 팬데믹으로 멈춰 섰던 해였다. 모두가 불안과 고립 속에서 지냈던 그 시기에, 백건우 선생님의 슈만은 특별한 의미로 다가왔다.
음반을 반복해서 들으며 생각했다. 이 녹음이 왜 이렇게 마음을 울리는가. 단순히 연주가 훌륭해서가 아니다. 우리 모두가 가진 상실감, 돌아갈 수 없는 시간에 대한 그리움, 그럼에도 꿈꾸기를 멈추지 않는 마음... 그런 것들이 이 음반 전체에 스며있기 때문이다.
선생님의 연주는 기교를 뽐내지 않는다. 대신 각 음에 생명을 불어넣는다. 음이 시작되고, 숨 쉬고, 사라지는 그 전 과정을 소중하게 다룬다. DG의 녹음 기술은 그 미세한 터치의 변화들, 페달링의 섬세함까지 고스란히 담아냈다.

우리는 슈만을 정말 아는가
통영에서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슈만은 대중적인 작곡가가 아니었어요. 자기 세계를 그렸지, 청중이 좋아하니까 쓴 작품들이 아니에요."
트로이메라이는 예외적으로 대중적인 곡이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이 곡을 단지 아름다운 자장가 정도로만 듣는다. 카페 배경음악으로, 휴대폰 벨소리로 소비된다.
이 음반을 들으면 그게 얼마나 피상적인 이해인지 알게 된다. 이 곡은 훨씬 더 복잡하고 깊다. 각 음 뒤에 숨은 의미들, 화성의 미묘한 변화들, 그 안에 담긴 슈만의 영혼. 백건우 선생님의 해석은 그 모든 층위를 드러낸다.
그렇다면 슈만과 가까워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선생님의 대답은 명쾌했다.
"마음의 자세가 되어 있어야 해요."
달콤한 곡, 알려진 곡, 명곡... 그런 데만 머물지 말고 작곡가의 고민을, 그 사람의 창작 세계를 같이 경험해야 한다고. 그런 마음의 자세는 열 살부터 세상을 떠날 때까지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이건 음악뿐만 아니에요. 사람을 만날 때도 마찬가지죠. 정말로 상대방의 마음을 이해하려고 하는 자세가 되어 있는가..."
결국은 삶의 태도에 관한 이야기였다. 그리고 이 음반을 제대로 듣기 위해서도 같은 자세가 필요했다.
음반 속 후기 작품들의 발견
이 음반에는 자주 연주되지 않는 슈만의 후기 곡들이 많이 담겨 있다. 통영에서 선생님이 웃으시며 말씀하셨다.
"어느 피아니스트 얘기가 그런 곡이 있는 줄도 몰랐다고."
<유령 변주곡> 같은 경우, 외적으로만 들으면 별다른 음악적 사건이 일어나는 것 같지 않다. 그래서 오해를 많이 샀다. 정신분열의 소인이 있는 곡이라는 등...
"에이, 그것도 오해예요."
선생님은 단호하셨다.
"슈만은 클라라를 사랑했고, 정신병자고, 자살을 시도한 사람이고... 그걸로 그냥 다 요약해 버리잖아요. 그런데 그 사람의 인생을 보면 다 문제가 있었어요. 모든 게 쉽게 풀어지는 게 하나도 없어요."
그리고 덧붙이셨다.
"어떤 의사가 지적했지만, 정말 정신병자였다면 곡을 못 써요. 곡을 쓴다는 건 굉장히 논리정연한 마인드가 없으면 할 수 없는 일이거든요. 유령 변주곡도 정신이 없는 것 같지만 다 구조를 갖추고 있어요. 고도의 집중력과 논리력이 필요한 작업이에요."
음반으로 유령 변주곡을 들으며 그 말씀을 실감했다. 일견 단조롭게 들리는 변주들 속에 치밀한 구조가 숨어 있었다. 백건우 선생님의 연주는 그 구조를 명확하게 드러내면서도, 곡에 담긴 깊은 우울과 고독을 놓치지 않았다.
피아노 소리가 아니라 음악을 듣다
통영에서 선생님께 여쭤봤다. 공연이나 연습할 때 무엇을 듣느냐고.
"피아노 소리보다 음악이 들려야지."
무슨 말씀인지 잘 이해가 안 됐다. 피아노 소리를 들으면서 음악을 듣는 것 아닌가?
"아니에요. 악보에 담겨 있는 음악을 들을 수 있어야죠. 그것을 피아노라는 악기로 축소시키면 피아니스트밖에 안 돼요. 음악을 피아노라는 악기를 통해서 펼치면 무한한 세계가 나오는 거거든요. 그 세계를 들려주는 것이 음악가예요. 피아노 치는 기술자가 아니고."
『슈만』 음반을 들으며 그 말씀을 되새겼다. 선생님의 연주에서는 정말 피아노를 넘어선 무언가가 들렸다. 오케스트라의 현악기들처럼 노래하는 선율, 관악기처럼 숨 쉬는 화성들. 88개의 건반이 만들어내는 소리가 아니라, 그 너머의 무한한 세계.
특히 DG의 뛰어난 녹음 기술은 그 미묘한 음색의 변화들을 포착했다. 같은 음이라도 어떻게 터치하느냐에 따라 완전히 다른 색깔이 나는 것, 페달의 깊이에 따라 달라지는 공명의 풍성함. 이런 것들이 음반을 통해 세밀하게 전달되었다.
게르기예프와의 협연 이야기도 기억에 남는다. 나중에 이유를 물으니, 일본 연주자와 맞춘 소리를 없애는 데 시간이 걸렸다고 했다는 일화.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라 없애기 위해서.
그 이야기를 듣고 음반을 다시 들었다. 선생님의 연주에는 불필요한 것이 하나도 없었다. 과도한 감정 표현도, 기교의 과시도. 오직 음악 그 자체만 남아있었다. 덜어내고 덜어내서 본질만 남긴 소리.
음반이 담아낸 곡들의 흐름
통영에서 음반의 곡 순서에 대해서도 여쭤봤다.
"순서는 작곡된 연대를 생각지 않았어요. 곡의 흐름, 이게 제일 중요하고, 또 곡들이 서로 부딪치지 않고 연결이 되게끔... 그리고 듣는 사람이 이 음악을 새롭게 들을 수 있게 마음을 잡아주는 게 중요하니까, 곡의 길이라든지 성격이 같이 갈 수 있게 신경을 썼죠."
실제로 음반을 처음부터 끝까지 들으면 한 곡을 듣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는다. 각 곡들이 자연스럽게 이어지며 하나의 큰 서사를 만들어낸다. 작품번호나 작곡 시기와 상관없이, 오직 음악적 흐름만을 고려한 배치가 빛을 발했다.
트로이메라이에서 시작된 꿈은 다른 곡들을 거치며 심화되고, 때로는 악몽으로 변했다가, 다시 희망의 빛을 찾는다. 그 여정을 음반 한 장으로 경험하는 것은 특별한 체험이었다.
음악은 악세서리가 아니다
통영 인터뷰의 마지막에 선생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요즘은 음악을 대하는 태도가 많이 끌어내려졌어요. 전 세계적으로 그래요. 큰일이죠. 음악이 그저 장식이 되면 안 돼요. 음악은 우리 존재에 꼭 필요한 요소가 되어야지, 있어도 좋고 아니면 말고 하는 악세서리처럼 취급하면 안 됩니다."
스트리밍 시대에 음악은 쉽게 소비된다. 수많은 플레이리스트에 담겨 배경음으로 흘러간다.
하지만 백건우 선생님의 『슈만』 음반은 그런 식으로 들을 수 없다. 이 녹음은 우리에게 요구한다. 멈추고, 귀 기울이고, 마음을 열 것을.
음반 전체를 제대로 듣는 데는 시간이 걸린다. 그러나 그 시간 안에 한 사람의 인생이 들어있다. 슈만의 인생이, 그리고 그것을 평생 탐구해온 백건우 선생님의 인생이.
다시, 꿈을 꾸다
음반의 마지막 트랙이 끝난 후에도 한참을 그대로 앉아 있었다.
트로이메라이. 꿈꾸기.
우리는 무엇을 꿈꾸는가. 잃어버린 것에 대한 꿈,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시간에 대한 꿈,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름다움을 믿는 꿈.
백건우 선생님의 『슈만』(2020, DG)은 팬데믹 시대의 한복판에서 우리에게 그런 꿈을 꾸게 한다. 절망 속에서도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침묵 속에서도 의미를 찾고, 상실 속에서도 희망을 노래하는 법을.
이것이 바로 슈만이고, 백건우고, 음악이 우리에게 주는 선물이다.
통영 바닷가에서 나눈 대화의 여운이 음반을 들으며 더욱 깊어졌다. 선생님의 말씀은 천천히 띄엄띄엄 흐르면서도, 음악 이야기가 무르익으면 시처럼 흐름과 굽이를 이루었다.
슈만을 이해한다는 것, 음악을 대한다는 것, 결국 삶을 대하는 태도에 관한 이야기였다.
오늘 밤, 다시 음반을 펼친다. 헤드폰을 끼고, 눈을 감고, 마음을 연다. 그리고 꿈을 꾼다.
추천 음반
백건우 - 『슈만』 (Deutsche Grammophon, 2020)
수록곡: 어린이의 정경 Op.15, 유령 변주곡, 나흐트슈튀케 Op.23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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